이청백은 숨을 몰아쉬었다. 찬물에 잠긴 듯한 현실감 없는 아침. 딥페이크 개발실. 어제와 같고, 오늘과도 같은 공간.
모니터는 켜져 있었고, 렌더링이 반쯤 진행된 영상이 정지된 화면에 걸려 있었다. 손끝에 이상한 감각이 맴돌았다. 누군가를 만졌던 것 같은 감촉. 아니, 누군가를… 찢었던 기억.
그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식은땀이 흘렀다.
“왜 이러지…”
무의식적으로 손목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자국. 이전엔 없던 상처. 그 순간 창밖 그림자가 스르륵 스쳐갔다.
"…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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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흘렀다. 그는 딥페이크를 만들지 않았다. 대신 모니터 앞에서 멍하니 앉아 시간을 흘려보냈다. 문득, 자신이 누군가를 만난 기억이 떠올랐다. 흐릿한 여자의 얼굴. 무언가를 부탁하던 목소리.
그리고 피.
욕조 안에 잠긴 붉은 물. 자신의 팔에 축 늘어진 여자의 몸. 입엔 미소, 눈엔 눈물.
“그림자야… 넌 정말 멋진 선물을 줬구나.”
그는 그 장면이 꿈인지 기억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더 생생해졌다. 다음 날, 또 다른 여성이 그를 찾아왔다. 그녀는 말했다.
“그 영상… 당신 거죠. 삭제해 주세요. 제 인생이… 무너졌어요.”
이청백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뇌 한쪽에선 '도와줘야 한다'는 이성이 작게 속삭였지만, 다른 쪽에선 그림자의 웃음소리가 더 크고 분명하게 울려 퍼졌다.
“지워주면 뭐든지 하겠다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그는 몸을 숙여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그럼, 울지만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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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그의 손에 또 하나의 생명이 꺼졌다. 이청백은 다시 그 감각을 느꼈다. 피부 아래로 파고드는 칼끝의 진동. 이가 부딪히는 소리. 살이 갈라질 때 나는 축축한 찢김.
“살아있다…”
그는 중얼였다.
그리고 멈추지 않았다. 다섯 번째, 열 번째, 스무 번째.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의 손에 죽었다. 살해의 이유도, 대상도 불분명했다. 그저 '그림자가 속삭였기 때문에'.
거울을 보면,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가 웃고 있었다.
“우린 하나야.”
어느 날, 그는 스스로를 찌르기 시작했다. 손목, 복부, 가슴. 그러나 죽지 않았다. 그림자는 말했다.
“넌 죽을 자격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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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인 계기는 그가 죽인 한 여성의 가족이 찾아오면서 시작됐다. 남편과 아버지, 두 남자가 망가진 얼굴로 그를 찾아왔고, 바닥에 무릎 꿇은 채 울부짖었다.
“당신이 우리 딸을 죽였지… 맞죠? 왜 그랬어요… 왜 그런 짓을…”
이청백은 그들의 말을 알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귀를 막고 있었고, 그림자의 속삭임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하지만 그날 밤, 처음으로 그림자가 말을 멈췄다.
침묵. 그 공백 속에서, 그는 자신의 죄를 또렷이 느꼈다. 아무런 소리 없이 울었다. 그리고 알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그림자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인간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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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 섰을 때, 도시의 불빛은 더 이상 눈부시지 않았다.
“이제… 그만하자.”
그는 속삭이며 난간 위에 올랐다. 아래는 공허한 어둠.
“죽어도 괜찮겠지. 그래도…”
그림자는 그의 귓가에서 마지막으로 말했다.
“죽는다고 끝날까?”
그는 웃었다. 그리고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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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백의 시신은 다음 날 발견되었다. 뉴스는 ‘AI 개발자, 연쇄살인 뒤 극단 선택’이라는 자극적인 타이틀로 보도했다. 시청자들은 몇 초간 관심을 가지다 곧 다른 뉴스로 넘어갔다.
그렇게, 그는 잊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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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호텔 펜트하우스. 임지환은 와인잔을 흔들고 있었다.
TV 속 이청백의 죽음 보도를 조용히 바라보던 그는 리모컨을 꺼버렸다.
“소모품 하나, 잘 쓰고 버렸네.”
그는 서랍을 열었다. 오래된 노트 한 권. 페이지를 넘기자, 서인의 이름이 나왔다.
“넌 결국 시간을 돌렸구나. 참… 그 정의로운 척하는 눈빛. 질린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얼마나 준비했는데. 얼마나 천천히 유도했는데. 넌 항상 죄를 깨닫고 용서를 택했지.”
그는 창문을 열었다. 밤바람이 와인의 향기를 흩뜨렸다.
“이제는 내가 직접 손 써야겠군.”
그는 서랍 안 깊숙한 곳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서인이 파티장에서 웃고 있는 사진. 그 뒤편, 어렴풋한 실루엣. 그는 자신의 모습이 흐리게 찍힌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넌 몰랐겠지. 처음 마약 건넸던 게 나였다는 거. , 나는 너의 선택들을 관찰했어...”
그는 손가락으로 서인의 얼굴을 문질렀다.
“이제 널 지울 차례야.”
문을 두드리는 소리. 검은 정장 남자가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명령하신 물건,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
임지환은 가볍게 웃으며 창문을 닫았다.
“소원은 말이지… 누굴 위해 쓰는지가 아니라, 누굴 망가뜨리느냐가 중요해.”
그의 그림자가 벽에 길게 드리워졌다. 그리고 그 그림자 안, 또 다른 무언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