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오늘을 색칠합니다

햇살이 스며든 오후

by 김기수



[햇살이 스며드는 오후, 나는 오늘을 색칠합니다]


햇살이 조용히 책상 위로 내려앉습니다.

창문을 닦지 않았는데도 유리창 너머 봄빛은 투명하게 스며들어와,

방 안의 모든 것들을 부드럽게 덮습니다.

마치, 오래 묵혀둔 슬픔 위에 따뜻한 이불을 덮듯이.


나는 스케치북을 펼칩니다.

무언가를 잘 그리고 싶은 욕심보다, 그저 ‘지금의 나’를 닮은 색을 찾고 싶었습니다.

다육이는 작은 화분 속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고,

나는 그 조용함을 따라 천천히 잎을 그려 넣습니다.

색을 입히는 손끝에 마음이 묻어나는 순간,

말보다 더 솔직한 감정이 펜 끝에 맺힙니다.


책상 한 켠에는 분홍 머그잔이 놓여 있습니다.

화사한 꽃무늬가 새겨진 그 잔엔 맑은 물이 담겨 있고,

햇살이 반사되어 잔 속이 살짝 반짝입니다.

마시기보다 바라보는 것이 더 위로가 되는 순간도 있다는 걸,

나는 봄이 오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펜꽂이에는 줄지어 선 마카들이

한 사람의 감정을 온전히 담아낼 준비를 마친 듯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선명한 보라, 연두, 청록, 그리고 살구색.

색은 말이 없지만, 마음을 읽습니다.

오늘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색은 파란색이었습니다.

쓸쓸함과 맑음을 동시에 안고 있는 그 색.

그 색으로 나는 내 안의 고요를 그려봅니다.


이젤 위에 놓인 그림들이 봄의 작은 정원을 닮았습니다.

고양이의 눈동자는 마치 어딘가를 오래 바라보다 돌아온 사람처럼 깊고,

장미는 막 피어나려는 듯 봉오리를 간직한 채 붉은 숨을 쉬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화분 속의 나무는,

누구의 손길도 기다리지 않고 그저 묵묵히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에 괜스레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살아 있다는 건, 누군가 보지 않아도 계속 피어나는 일이라는 걸.


벽면을 채운 색의 조각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누군가의 봄이었고, 누군가의 겨울이었을지 모릅니다.

그 중 하나쯤은 나의 마음과 닮아 있겠지요.

그림을 바라보다 보면,

사라져버린 계절도 다시 불러올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봄은 이렇게 왔습니다.

그 어떤 소리보다 조용하게, 그 어떤 언어보다 선명하게.

무언가를 완성하지 않아도 괜찮은 오후,

나는 색을 고르고, 마음을 들여다보며,

오늘이라는 계절을 천천히 살아냅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하루는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변화는 다시는 오지 않을 계절을 떠나보내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