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스며든 오후
[햇살이 스며드는 오후, 나는 오늘을 색칠합니다]
햇살이 조용히 책상 위로 내려앉습니다.
창문을 닦지 않았는데도 유리창 너머 봄빛은 투명하게 스며들어와,
방 안의 모든 것들을 부드럽게 덮습니다.
마치, 오래 묵혀둔 슬픔 위에 따뜻한 이불을 덮듯이.
나는 스케치북을 펼칩니다.
무언가를 잘 그리고 싶은 욕심보다, 그저 ‘지금의 나’를 닮은 색을 찾고 싶었습니다.
다육이는 작은 화분 속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고,
나는 그 조용함을 따라 천천히 잎을 그려 넣습니다.
색을 입히는 손끝에 마음이 묻어나는 순간,
말보다 더 솔직한 감정이 펜 끝에 맺힙니다.
책상 한 켠에는 분홍 머그잔이 놓여 있습니다.
화사한 꽃무늬가 새겨진 그 잔엔 맑은 물이 담겨 있고,
햇살이 반사되어 잔 속이 살짝 반짝입니다.
마시기보다 바라보는 것이 더 위로가 되는 순간도 있다는 걸,
나는 봄이 오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펜꽂이에는 줄지어 선 마카들이
한 사람의 감정을 온전히 담아낼 준비를 마친 듯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선명한 보라, 연두, 청록, 그리고 살구색.
색은 말이 없지만, 마음을 읽습니다.
오늘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색은 파란색이었습니다.
쓸쓸함과 맑음을 동시에 안고 있는 그 색.
그 색으로 나는 내 안의 고요를 그려봅니다.
이젤 위에 놓인 그림들이 봄의 작은 정원을 닮았습니다.
고양이의 눈동자는 마치 어딘가를 오래 바라보다 돌아온 사람처럼 깊고,
장미는 막 피어나려는 듯 봉오리를 간직한 채 붉은 숨을 쉬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화분 속의 나무는,
누구의 손길도 기다리지 않고 그저 묵묵히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에 괜스레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살아 있다는 건, 누군가 보지 않아도 계속 피어나는 일이라는 걸.
벽면을 채운 색의 조각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누군가의 봄이었고, 누군가의 겨울이었을지 모릅니다.
그 중 하나쯤은 나의 마음과 닮아 있겠지요.
그림을 바라보다 보면,
사라져버린 계절도 다시 불러올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봄은 이렇게 왔습니다.
그 어떤 소리보다 조용하게, 그 어떤 언어보다 선명하게.
무언가를 완성하지 않아도 괜찮은 오후,
나는 색을 고르고, 마음을 들여다보며,
오늘이라는 계절을 천천히 살아냅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하루는 충분히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