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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로 편지를 써

레코드와 카세트

by 김기수

《되감기》


탁— 소리와 함께

레코드는 돌아갔다

시간을 긁어내며

잊지 못한 이름들을 속삭이듯.


카세트는 눌린 채 기다렸다

누군가 다시

‘녹음’을 누를까봐

마음속 이야기를 테이프에 숨겨놓고.


늘어진 테이프처럼

그리움은 쭉—

길게 늘어져서

손으로 감을 수밖에 없었다


연필을 끼워 돌릴 때마다

내 안의 시절도

한 칸, 또 한 칸

되감기 되었지


그때의 너는 말이 없었고

소리는 따뜻했고

잡음조차 그리운 음악이었어


세상은 디지털로 앞서갔지만

나는 여전히

탁— 하고 시작되는 음악을 기다려

그 속에

너의 목소리가

살짝, 숨겨져 있기를.



《기억은 우산이다》


기억은 접히지 않는 우산

햇살이 쏟아지는 날에도

나는 늘 그 그림자 안을 걸었다


커피는 식고, 시간은 끓고

창밖엔 비도 없는데

너의 이름만 묻어났다

물기처럼, 조용히.


사랑은 늘

“기다릴게”라고 말하곤

뒤돌아서서 먼저 멀어졌다

그게 사랑의 특기 같았다


밤은 자꾸 내게 말을 걸었다

잊을 수 있냐고

그런 말 좀 하지 말지

기억은 우산이라며


나는 그 우산 아래 서 있는 사람이고

지나간 이야기들은

바람에 펄럭이는,

버려진 전단지가 아니라

마음에 붙은 표지판이었다.


여기, 여기서부터

널 생각하는 길이 시작된다.





말하지 않아도 남는 것들》


말하지 않아도 남는 게 있어

그건

마지막에 들은 인사보다

더 오래 기억되는,

숨겨진 표정 같은 거야


누군가 지나간 자리엔

늘 작은 빛이 묻어나

그 사람이 사라지고 나면

햇살도

괜히 그 사람 같아 보이곤 하지


문득 커피가 식어 있으면

그건 그냥 커피가 아니라

어딘가 흐르고 있는 시간의 냄새고


창밖에서 흔들리는 커튼은

바람이 아니라

그리움이 손짓하는 중이야


우산은 비를 막기 위해서 있지만

가끔은

함께 서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해


사람은

기억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기억을 곁에 두고

조용히 묻어가는 존재야


그래서

지나간 이야기가

가끔은

살아 있는 나보다 더 선명하게

숨 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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