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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안쪽에서 여름을 바라보다

02–릴케의 장미의 내부

by 김기수



꽃잎이 겹겹이 말려 있는 장미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단단하고도 부드럽게 감싸인 내부엔, 도대체 어떤 풍경이 있을까.

릴케는 그것을 “장미의 내부”라고 불렀고,

나는 그 말에 멈춰 섰다.


**


장미의 안쪽은 생각보다 깊었다.

그곳에는 바람도, 소리도, 분주한 움직임도 없었다.

그저 고요하게 잔잔한 호수 같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수면 위엔 하늘이 비쳤다.

그 하늘이 어디의 하늘인지 나는 잘 몰랐지만,

왠지 내 마음 속 어딘가와 닿아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릴케가 본 것도 그런 하늘이었으리라.

바깥이 아니라, 자신 안에 존재하는 하늘.

누군가의 시선이나 기대가 아닌,

자기 자신이 피워낸 여름의 하늘.


**


릴케는 말했다.

장미는 이제 자기 자신을 거의 지탱할 수 없다고.

그 말이 낯설지 않았다.

우리도 때로는 너무 많은 감정, 너무 깊은 생각,

또는 너무 간절한 사랑 때문에

자기 자신조차 지탱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안쪽에서부터 흘러넘친다.

말로도 다 전하지 못한 것들이

눈빛이나 손끝에서 새어나오고,

조용히 흘러나온 마음은

누군가의 하루를 물들인다.


**


장미는 자기 안의 여름을

그리도 조용히 흘려보냈다.

겹겹이 쌓인 꽃잎 사이로 나날이 흘러나와

마침내 한 방, 하나의 계절이 되었다.

그 방은 릴케가 말했듯,

꿈속의 방처럼 조용하고 충만했다.


그걸 보며 나는,

내 마음 안에 머물던 감정들을

조금은 흘려보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겁다고 느껴졌던 내면의 무게는

어쩌면 누군가에게 닿을 빛이 될 수 있으니까.


**


조용히 피어나는 삶이 있다.

외치는 대신, 있는 그대로 존재하면서

자신의 계절을 충실히 살아내는 존재.

장미처럼, 우리도 그렇게 피어나면 되는 걸까.

지금 내 안의 여름은,

어느 만큼이나 무르익었을까.



장미의 내부

Das Rosen-Innere

R. M. 릴케-지음

이런 내부에 대한 외부가 어디에 있을까.

어떤 아픔에

그런 아마포를 갖다 댈까.

근심 없이

활짝 핀 이 장미의 내부 호수에

어떤 하늘이

비치고 있을까.

보라, 장미가 얼마나 탐스럽게

만발하여 있는가를.

떨리는 손으로도 그것을 지게 할 수 없으리라.

장미는 이제 자기 자신을 거의 지탱할 수 없다.

많은 꽃은

감당할 수 없이 불어나서

내부 공간으로부터 넘쳐 나와

바깥의 여름 나날로 흘러 들어간다,

그 나날이 점점 충만하여 빗장을 걸어

여름 전체가 하나의 방이,

꿈속의 방이 될 때까지.


릴케(Rainer Maria Rilke)의 시 「장미의 내부 (Das Rosen-Innere)」는 단순한 자연의 이미지 너머,

인간의 내면과 감정, 존재의 본질을 은유적으로 탐색하는 깊이 있는 작품입니다.

아래에 시의 구성과 정서를 바탕으로 주요 이미지와 각 연의 해석해 보았어요



전체적 심정과 배경


릴케는 자연, 특히 꽃과 같은 섬세한 존재를 통해 인간의 내면세계를 비유하는 데 탁월한 시인입니다.

이 시는 “장미”라는 하나의 존재 안에 담긴 충만함, 내면성, 그리고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다룹니다.

장미는 단지 꽃이 아니라, 존재의 깊이, 정서적 충만함, 또는 영혼의 중심을 상징합니다.


이 시는 정적인 아름다움 속에 숨겨진 무게와 깊이,

그리고 그것이 외부 세계로 퍼져나가는 감정의 넘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의 각 연 해석


1연


이런 내부에 대한 외부가 어디에 있을까.

어떤 아픔에 그런 아마포를 갖다 댈까.


• 의미:

장미의 ‘내부’는 단순히 물리적 중심이 아니라, 깊이 있는 정서적 공간, 또는 내면세계를 의미합니다.

이런 내면을 외부가 과연 이해하거나 포용할 수 있을까? 아마포는 상처 위에 덮는 천이죠.

하지만 이 ‘장미의 내부’는 고통의 자리가 아니라, 외려 너무 충만해서 외부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뜻도 함축합니다.

• 심정:

자기 내면의 깊이를 외부가 이해해주길 바라는 동시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고독과 비밀스러움이 배어 있습니다.



2연


근심 없이 활짝 핀 이 장미의 내부 호수에 어떤 하늘이 비치고 있을까.


• 의미:

‘내부 호수’는 고요하고 깊은 자아 또는 감정의 세계.

거기에 어떤 하늘(=외부 세계, 또는 상위의 존재)이 비쳐질까?

즉, 완전한 자기 안에 외부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 들어오는가를 묻습니다.

• 심정:

경이와 경외, 그리고 스스로조차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내면에 대한 물음이 담겨 있습니다.



3연


보라, 장미가 얼마나 탐스럽게 만발하여 있는가를.

떨리는 손으로도 그것을 지게 할 수 없으리라.


• 의미:

장미는 절정의 순간에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풍요로워서, 인간이 그 아름다움을 쉽게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떨리는 손’은 감정이 흔들리는 인간이죠. 그런 인간조차 이 장미의 충만함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 심정:

경탄과 경외, 동시에 그 아름다움을 감당하지 못하는 연약함이 느껴집니다.



4연


장미는 이제 자기 자신을 거의 지탱할 수 없다.

많은 꽃은 감당할 수 없이 불어나서 내부 공간으로부터 넘쳐 나와

바깥의 여름 나날로 흘러 들어간다,


• 의미:

장미는 자신의 충만함으로 인해 무너질 정도입니다.

내면의 감정, 생명력, 사랑, 혹은 존재의 본질이 넘쳐 외부로 흘러나갑니다.

여기서 ‘여름’은 감정의 절정, 인생의 풍요로움, 혹은 시간의 흐름일 수 있죠.

• 심정:

아름다움이 넘쳐나지만, 동시에 그것을 버텨내기 어려운 고통스러움이 배어 있습니다.

이는 예술가나 감수성 강한 존재들이 겪는 감정의 넘침과 소진과도 연결됩니다.



5연


그 나날이 점점 충만하여 빗장을 걸어

여름 전체가 하나의 방이, 꿈속의 방이 될 때까지.


• 의미:

결국, 그 넘치는 감정과 시간은 모두 하나의 방으로 모입니다.

그곳은 ‘꿈속의 방’—현실과 이상, 내면과 외부가 혼재된 장소입니다.

‘빗장을 걸다’는 건 그 충만함이 닫혀 버렸다는 뜻도 되고, 한편으로는 외부를 차단한 고요한 내면의 완성일 수도 있습니다.

• 심정:

몽환적이고 초월적인 정서가 풍깁니다. 모든 것이 충만하여 더는 흘러나오지 않는, 어쩌면 완성의 순간이죠.


릴케 개인의 배경


릴케의 삶

• 릴케(1875~1926)는 끊임없이 예술적 완성, 존재의 깊이, 영혼의 내면을 탐구한 시인이었어요.

• “신의 부재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시를 통해 던졌고,

사랑, 고독, 죽음, 예술,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탐색이 그의 시에 드러납니다.

• 특히 릴케는 자아의 내면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그 사유를 통해 시와 존재를 연결했죠.


‘장미’에 대한 상징

• 릴케는 장미를 반복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장미는 아름다움, 연약함, 내밀함, 그리고 존재의 본질을 담은 상징이었어요.

• 장미의 ‘내부’는 단순한 식물 구조가 아니라, 자아의 중심, 감정의 심연, 존재의 진실한 핵심을 비유합니다.


요약하자면:

릴케는 이 시에서 인간의 내면세계를 장미로 비유하며,

그 아름다움이 얼마나 풍성하고 무겁고 심지어는 감당하기 어려운가를 이야기합니다.

동시에 그것이 외부 세계와 맺는 관계에 대한 깊은 철학적 질문도 던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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