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마음이 떠내려가던 오후
비 오는 날의 하굣길은
우리 만의 세상이었다.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고랑을 따라 콸콸 모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무신을 벗어 손에 들었다.
우리는 바지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리고
물살 속 작은 언덕을 밟았다가 미끄러지고
또다시 부드러운 흙길을 찾아
오르락내리락하며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빗방울은 머리카락을 타고,
뺨을 흘러내렸다.
그 순간만큼은
젖은 옷도, 혼날 걱정도 잊었다.
검정 고무신은 어느새 '배'가 되었고
고무신 뒤꿈치를 뒤집으면 돛처럼 균형을 잡으며
바람을 받아 물 위에
곧게 서서 미끄러지듯 흘러갔다.
"내 것 먼저 보낸다"
"야! 조심해 굽이돈다"
친구들의 목소리는 빗소리와 뒤섞여 돌메산을 울렸다.
하지만 내 차례가 되자
물살이 갑자기 거세게 휘돌았다.
“아, 내 신발!”
손을 뻗었지만
물은 나에게 장난이라도 치듯
신발을 데리고 놀다가
순식간에 물살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물살이 모여드는 고랑 옆에 쭈그리고 앉아,
고무신을 한참을 기다렸다
“야, 야 괜찮아~
또 사면되지 뭐!”
친구들은 웃으며 말했지만
그 웃음 속에서
내 마음은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집에 가면 분명 혼날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젖은 발로 마루에 올라서자마자
“고무신 또 잃었어!”
엄마의 호통은 번개처럼 내리쳤고
나는 그저 고개만 숙인 채 서 있었다.
엄마는 한숨을 길게 쉬며 남아 있는 신발 한 짝만 내려다보았다.
“비 오는 날 신발 가지고 그만 조만 놀아라…”
그날 밤, 얇은 이불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혹시 냇물을 따라 바다까지 흘러갔을까.
아니면 돌에 걸려
아직도 그 자리에서 비를 맞고 있을까.
내일이 오면 다시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버지는 종이봉투 하나를 들고 오셨다
그 안에는 빨간 구두 한 켤레.
햇빛 아래 반짝이며 코끝에 새 구두 냄새가 났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구두를 만져 보았다.
아버지는 미소만 지으시며
내 발에 구두를 신겨 주셨다.
언니의 큰 신발을 끌고 다니던
내 발이 그제야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손끝은 거칠었고,
신발 속에서 내 발은 내 마음처럼 설렜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만난 구두를 벗지 못한 채
이불속에 품고 잠들었다.
빨간 구두는
그 시절 내 세상의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