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아지트
우리 마을 꽃산 밑에는
움푹 파인 양지바른 자리가 하나 있었다.
바람이 매서운 한겨울에도
그곳만큼은 햇살이 포근히 내려앉았다.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는 몰랐지만,
오래전부터 동네 아이들이 모이던
우리만의 ‘비밀 아지트’였다.
까맣게 그을린 냄비 하나,
나뭇가지를 모아 쌓아 둔 자리.
그곳에는 늘 불 피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영미는 하얀 편지 봉투에 담아 온
검은콩을 흔들며 자랑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우리는 손을 호호 불어 가며
마른 나뭇가지를 모았고,
주머니 속 작은 성냥갑을 꺼내
젖지 않게 조심스럽게 불을 붙였다.
성냥개비를 슥— 긁으면
‘치익!’ 소리와 함께 작은 불꽃이 살아났다.
희미한 연기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퍼졌고,
긁어모은 부드러운 낙엽잎을
나뭇가지 사이에 끼워 불을 지피면
찌그러진 냄비에 콩을 넣어 볶기 시작했다.
‘딱, 딱’ 소리를 내며 콩이 이리저리 튀어 올랐다.
“조금만 더! 아직 안 익었어.”
“야, 태우면 못 먹어!”
말다툼을 하면서도
콩이 노릇해질수록 우리 눈빛은 점점 더 반짝였다.
욕심이 앞 서 불을 세게 지폈다가
까맣게 태워 버린 날도 있었다.
결국 타 버린 냄새만 맡으며
서로 얼굴을 보다가 깔깔 웃어 버렸다.
연기가 눈에 들어와
눈물이 나도 그마저 즐거웠다.
추위는 우리 웃음소리에 묻혀 어디론가 사라졌다.
성냥은 그저 불을 붙이는 도구였지만,
그 시절에는
하루의 시작과 끝을 밝히는 불꽃이었다.
부엌에서 밥을 짓기 전 엄마가 성냥을 켜던
그 ‘치익’ 소리와 작은 불꽃의 따뜻함까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훈훈하다.
*비료포대썰매
겨울이 더 깊어지면
눈은 마치 솜사탕처럼 쌓였다.
하얀 세상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다시 꽃산으로 모였다.
“야, 꽃산으로 가자!”
“이번엔 내가 먼저 탈 거야!”
비료포대에 짚을 넣어 만든
썰매를 들고 언덕을 헉헉대며 올라가면
발밑은 ‘뽀드득’ 소리를 냈다.
비료 포대 속 짚뭇은 쿠션이 되었고,
앞쪽으로 밀려 모인 짚은
썰매에 속도를 더해 주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미끄러지듯 내려올 때의
짜릿함이 그 모든 걸 잊게 만들었다.
얼굴로 부서지는 눈,
귓불이 얼얼하게 시려도
노란 콧물이 손등을 덮어도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가끔은 썰매가 방향을 잃고
남의 시금치밭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기도 했다.
“야, 야! 멈춰! 멈춰!”
하지만 이미 늦었다.
썰매는 시금치 사이를 파고들었고,
푸른 잎사귀가 눈 위에 나뒹굴 졌다.
“아이고, 시금치 다 밟았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은 시커멓게,
코는 빨갛게,
손은 꽁꽁 얼었지만
마음만은 이상하리만치 따뜻했다.
햇살에 눈이 조금씩 녹아
썰매 길이 사라지면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손끝은 얼얼했지만
엄마가 내민 따뜻한 밥그릇과
장독대에서 퍼지던 된장 냄새 속에서
몸은 스르르 풀어졌다.
그리고 이불속에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내일 또 눈이 오면 좋겠다.
콩도 볶고, 썰매도 타고…
또 다 같이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
만약 지금 그 친구들과 함께라면,
그때를 떠올리며 소리 내어 깔깔 웃고 싶다.
그날처럼,
행복했던,
그 겨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