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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해석, 그리고 '백(back)'

작가 지망생이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에 대하야

by 전지훈

“작가가 되려면 독창적인 화풍보다 어떤 학교를 나왔느냐가 더 중요해.”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를 보고 사람의 성품을 판단하는 학벌주의가 짙게 밴 이 말은 대학교 2학년 때 들었던 애니메이션 전공 수업을 지도했던 교수님의 입에서 나왔다. 물론, 좋은 대학교에 진학하려면 내신과 수능에서 높은 점수나 등급을 받아야 하고, 그러려면 ‘남들 놀 때 공부하는’ 부지런함과 성실함이라는 소양을 갖춰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출신 학교로 사람을 평가하는 행태는 근대 영국 철학자 베이컨의 경험주의적 관점에서 ‘과학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전제에 동의하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특히 이 주장은 빈센트 반 고흐나 폴 고갱, 장 미셸 바스키아 등 고등 교육을 받지 않은 많은 예술가가 작품성을 인정받은 사례들로 충분히 논파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이 수업을 듣던 동기들은 이 주장을 반박하지 않았다. 어두운 강의실 전면에 내걸린 스크린 위에서는 디자인 학과로 유명한 서울 소재 4년제 대학 출신 작가가 그린 ‘아이언 맨’, ‘헐크’, ‘원더우먼’ 같은 미국 코믹스 캐릭터를 동양화 양식으로 그린 작품들이 어슴푸레 빛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작품을 바라보면서 ‘허탈함’이 치밀어 올랐다. 소설가 박완서가 <도둑맞은 가난>의 원고지에 ‘부자는 가난마저 훔친다.’라는 문구를 적어 넣으며 느꼈던 감정도 그랬을 터다. 서브컬처는 주류 예술계가 한때 급이 낮은 문화라는 이유로 ‘하위’로 분류하던 영역이었다. 그런데 주류 예술계는 어느새 이 분야의 해석권마저 빼앗으려 들고 있었다. 교수님은 “만약 우리 학교 수준 출신 작가가 이 정도 명성을 얻으려면, 평론가와 연줄이 있어야 할 거다.”라는 말로 쐐기를 박았다.


예술에서 작품은 작가와 관객 사이에 놓인 소통 창구다. 이런 관점에서 작품 해석은 작가와 관객 사이의 대화가 된다. 그러나 미셸 푸코가 지식이 해석의 층위를 만든다고 지적한 대로, 무언가를 해석하는 능력은 때론 권력이 된다. 문제를 푸는데 익숙한 한국 사회는 ‘모든 문제에 답이 있다.’라고 믿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다 보니 ‘작품’이라는 예술의 본질보다 작가의 ‘유명세’와 ‘배경’에 집착하는 사람도 많다. 그 덕분이었을까. 수년 전 찾았던 ‘팀 버튼 전시회’에서는 작품 관람에 더해 극성 부모들의 손에 이끌려 온 아이들이 그림을 보고 놀라 울음보를 터뜨리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들의 뇌리에는 팀 버튼의 작품 속에 담긴 ‘소외’와 ‘부적응’이라는 메시지보다 ‘칼아츠(CalArts)’에서 공부하고 ‘디즈니’에서 일했다는 그의 이력이 더 강렬하게 남았을 것이다.

예술계를 장악한 학벌주의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능력주의 기조를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한국 예술계에서 작가는 이름난 대학의 학위와 유명 평론가와의 인맥 없이 인정받기 어렵다. 이런 배경을 아는 내게 ‘금융권에서 일하려면 뭐가 제일 중요하냐’라는 질문에 ‘아버지가 가장 중요하다.’라고 이야기하는 시사금융 유튜브 채널의 동영상 장면은 어딘가 낯익다. 신문 정치 칼럼 지면에서는 탄핵 이후 ‘광장의 목소리’를 ‘정치’로 들여와야 한다는 구호를 거의 매일 찾아볼 수 있지만, 그것이 과연 배경과 학벌로 개인의 ‘급’을 나누고, 목소리를 선별하는 구태가 빈번한 한국 사회에서 실현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앞선다. 어쩌면 우리는 조지 오웰이 이야기한 대로,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라는 헌법 조문 아래에 작은 글씨로 ‘어떤 국민은 다른 국민보다 더 평등하다.’라는 글귀가 적힌 사회에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권위를 비판하는 글을 쓰면서도, 권위자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말과 권위, 그리고 업적을 빌리지 않으면 메시지에 힘을 실을 수 없는 상황은 아이러니하다. 만약 글을 읽는 동안 이 글에서 어떤 문제도 느끼지 못했다면, 그것이 곧 진정한 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의식하지 않고는 인식할 수조차 없는, 내면에 자리 잡은 뿌리 깊은 습관을 언제쯤 떨쳐낼 수 있을까. 예상컨대 전지전능한 존재가 한날 한시에 갑자기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적어도 내가 늙어 죽기까지는 그럴 일은 없으리라 장담할 수는 있겠다. 부디 언젠가는 이 성급한 결론이 뒤집어지기를, 그래서 내가 틀렸다는 소리를 듣는 날이 꼭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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