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사를 보고 답답함을 느끼는 이유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소설과 기사의 유일한 차이를 ‘팩트’로 꼽았다. 그는 작가가 되기 전, 네바다주 카슨의 ‘테리토리얼 엔터프라이즈(Territorial Enterprise)’에서 3년간 기자로 일한 적이 있다. 작가와 기자 생활을 모두 경험한 ‘글쓰기의 대가’가 한 말이니, 단순한 수사는 아닐 것이다.
언론의 본질이 ‘팩트’에 있다는 인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일까. 올해 들어 국내 언론은 ‘팩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기사를 연이어 내고 있다. 조선일보는 이달 유튜브를 겨냥한 특집을 지면에 실었고, 경향신문은 올해 초 미국 빅테크 기업의 ‘탈진실’ 행보를 폭로하는 보도를 내보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많은 매체가 ‘팩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독자는 언론이 말하는 ‘팩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이전에 ‘언론고시’의 실상을 다룬 글에 달린 댓글이 떠오른다. 한 사용자는 “언론고시를 통과한 기자들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기보다 자기 사장의 입맛에 맞춰 기사를 만든다”며 “그렇다면 언론고시란 게 과연 필요한가”라는 의문을 표했다.
이는 언론의 본질을 제대로 조준한 질문이었다. 이런 시선이 낯설지 않다는 사실은, 그 비판 속에 현실이 반영돼 있음을 보여준다.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나는 그 이유가 언론과 대중이 ‘팩트’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언론은 구조적 원인에 주목하지만, 대중은 직접 책임을 추궁하기를 원한다. 때문에, 같은 사건을 보더라도 두 시선이 엇갈리는 일이 많다.
얼마 전 수일간 한 통신사의 개인정보 유출 사건을 취재하고도 기사를 쓰지 못한 일이 있었다. 작은 언론사에서 일하다 보니 속보 경쟁에서 통신사를 이길 수 없었고, 진상을 드러낼 만큼 충분한 정보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 한가지. 취재 과정에서 만난 대중과 기업 모두가 ‘팩트’를 원하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피해자들은 2차 피해를 걱정했고, 기업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피해를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공공기관은 수 차례 연락에도 불구하고 “가정적인 질문에는 답하기 어렵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 결과, 기자 수첩에는 법률 전문가의 발언을 정리한 메모만 늘었다.
다른 신문사 기자도 비슷한 상황에 고전하고 있는 듯했다. 논조에 따라 기업이나 소비자 쪽으로 다소 기운 면은 있었지만, 기사 대부분이 정부 보고서나 보도자료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한 업계 관계자는 내게 “제발 팩트에 기반한 기사 좀 써달라”고 토로했다. 그가 말한 ‘팩트’는 무엇이었을까. 적어도 감정을 해소해주는 ‘사이다’ 같은 일방적인 개념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처럼 사람마다 기대하는 ‘팩트’는 다르다. 기자는 그 사이 어딘가를 걸을 수밖에 없다. 팩트는 속을 뻥 뚫어주는 해답이 아니다. 오히려 오래 씹어야 겨우 의미가 드러나는 섬유질 같은 존재다. 언론은 완전한 진실을 전할 수 없다. 다만 최대한 정직하게, 다양한 현실 인식을 기록하려 애쓸 뿐이다.
팩트를 완전히 전달하지 못하는 답답함은 언론의 숙명이다. 그러나 그 한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진실을 함께 꺼내려는 독자가 있을 때, 비로소 ‘팩트’는 완성된다. 때로는 기사를 읽고 다소 답답한 마음이 들겠으나, 부득불 독자에게 너그러운 이해를 구하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