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숙, 샨티
"아...! 삶이란 따스한 봄바람을 타고 퍼져나가는 재스민의 꽃향기 같이 달콤한 것이지요."
"지금까지 수도원에서 수행하면서 스승에게 배운 것은, 삶이란 장미의 가시와도 같아서 어디를 붙잡아도 아프고 움직일 때마다 피를 흘리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삶이란 이렇게 고통스럽고 아픈 것이지 않습니까?"
"아 그래요...? 그건 스승의 말을 무조건 믿고 그렇게 선택한 당신의 삶이 그런 것일 뿐이지요."
불안한 마음이 들 때. 내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 나는 우리 집 커피테이블에 항상 놓여 있는 책을 손에 든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기 위해 먼 길을 돌아 온 사람의 지혜가 담긴 책. 최근에 이직을 하면서 매일 약간의 두려움을 갖고 지냈다. 경력직이라 연봉도 높여서 왔는데 모르는 것 투성이에 언제 나의 무능력함을 들킬 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말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경쟁적이었다. 훌라후프를 처음 배웠을 때는 동네 골목에서 캄캄한 밤이 올 때까지 훌라후프를 돌렸고, 줄넘기를 처음 했을 때는 마음대로 안 되는 게 너무나도 억울해 눈물을 흘리며 줄을 넘었다. 경쟁도 반복하다보면 습(習)이 되나 보다. 서른 초반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경쟁적인 사람이다. 주말에 즐기면서 하던 달리기도 경쟁자가 있으면 죽어라 뛰어다니고, 누군가가 나보다 잘 하는 것 같으면 슬그머니 질투심이 올라온다. 그 결과로 나는 스스로에 대한 높은 이상이 있다. 그런데 이상은 이상일 뿐이니 부족한 부분이 조금이라도 드러나는 것 같으면 불안함이 고개를 쳐든다. 이직을 한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처음 반 년 정도는 배울 것도 많고 적응할 것도 많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한지만, 속으로는 내가 너무 바보같지는 않은지 너무 초짜 티가 나지는 않는지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한다. 그럴 때면 이 책에서 말하듯 조금 다른 시선으로 나의 상황을 바라보려고 한다 - 내가 누구라는 허상을 붙들고 그것을 지키느라 힘들고 괴로워하기 보다는, 이 순간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도 된다는 걸 허락할 때,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다 내려놓는 것은 힘들다.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씩 연습해 볼 수는 있다. 모른다고 인정해버리면 이 또한 얼마나 기쁘고 좋은 배움의 기회 인가를 떠올려 보자. 허상에 붙들려 뭐에 씌인 것처럼 두려움 만을 취사 선택해서 보고 있을 필요는 없다.
위대한 일은 없다. 위대한 사랑이 있을 뿐. 누구나 그렇듯 어렸을 때는 대학생만 되어도 큰 어른이고, 서른 살이 넘으면 '아주' 큰 어른으로 세상에 대한 밝은 눈이 있는 줄 알았다. 더불어 나는 내가 큰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 상상했다. 하지만 지금 나이가 되어 보니, 어릴 적 상상했던 것과는 거리가 꽤 되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직장은 다니긴 하지만 그게 위인전에 나올 법한 위대한 일인 것 같지는 않고, 밝은 눈은 커녕 안구건조증을 달고 산다. 그럼 내 인생의 의미는 어디서 찾으라는 건가. 작가는 "위대한 일은 없다. 오직 작은 일들만 있을 뿐이다. 그걸 위대한 사랑으로 하면 된다." 라는 글귀를 보고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는 오래된 믿음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실마리를 찾았다고 한다. 위대한 일만을 찾아 다녔으니 지금까지 만날 수 없었던 것이고, 위대한 일들을 못 찾는 내가 늘 못마땅 했고, 위대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평범한 자신이 가망 없는 인간처럼 느껴졌던 거라고. 내 삶을 들여다본다. 그렇다. 나의 일상도 작은 일 투성이다. 전철 타고 회사 가고, 아침 인사 하고, 코드 쓰고, 문서 정리 하고, 코드 리뷰 하고, 점심 먹고, 동료들과 대화하고, 전철 타고 집에 가고, 남편과 저녁 먹고, 설거지 하고, 그냥 그런 작은 일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정말 오직 작은 일들'만' 있다. 그래, 위대하고 큰 일은 없다. 오직 내 삶을 채우는 귀엽고 예쁜 작은 일들을 오늘도 내일도 위대한 사랑을 담아 하면 된다.
우리는 숨을 나누는 한 몸이다. 나는 때때로 누군가가 싫다는 감정이 든다. 며칠 전 아침 출근길에 전철을 탔을 때 옆 사람도 신경쓰지 않고 비집고 들어와 내 발을 반쯤 밟은 남자를 보고 정말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오늘 퇴근 길에는 만원 전철에서 유튜브 동영상 보겠다고 손잡이도 잡고 있지 않은 여자를 보고 정말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많고 복잡한 도쿄로 이사오고 나서는 유독 전철 안에서 누군가가 싫어진다. 또 숨쉴 때 마다 체취며 잡다한 냄새를 다 같이 공유하는 상황이니 생각만 해도 갑갑하다. 이럴 땐 어김없이 이 책의 한 장 '너의 날숨이 나의 들숨이 되고' 가 생각이 난다. 지하철 칸에 터질 듯이 들어찬 사람들은 서로의 숨을 공유하고 있다. 숨을 너무 공유한 나머지 산소 부족으로 머리가 아플 때도 있을 정도다. 우리는 또한 다른 동물, 풀숲, 나무 등 수많은 유기체들과도 숨을 서로 공유한다. 나무가 내쉬는 산소는 우리의 들숨이 되고, 우리의 날숨은 나무에게는 들숨이 된다. 모든 유기체가 숨을 통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숨이 멎는다는 것은 곧 생명이 멎는 것을 의미하므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숨을 통해 생명을 나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다시 생각해보니 같은 숨을 나누는 동지 끼리 너무 싫어하지 말자는 생각이 든다. 사람, 동물, 식물,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유기체들을 숨을 나누는 한 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면 내 몸을 아끼듯 모두를 아낄 수 있지 않을까.
먼저 행복을 선택하자. 이 책에는 한 노신부가 히말라야에서 수행하는 요기를 찾아가는 일화가 실려 있다. 삶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노신부의 질문에 요기는 이렇게 답한다. "아...! 삶이란 따스한 봄바람을 타고 퍼져나가는 재스민의 꽃향기같이 달콤한 것이지요." 요기의 대답에 놀란 신부가 되묻는다. "지금까지 수도원에서 수행하면서 스승에게 배운 것은, 삶이란 장미의 가시와도 같아서 어디를 붙잡아도 아프고 움직일 때마다 피를 흘리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삶이란 이렇게 고통스럽고 아픈 것이지 않습니까?" 요기는 대답한다. "아 그래요...? 그건 스승의 말을 무조건 믿고 그렇게 선택한 당신의 삶이 그런 것일 뿐이지요." 우리는 많은 순간에 고통의 면만을 바라본다. 그것은 고통이 가지는 두려움을 피하고 극복 하려는 생존의 본능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때문에 인생을 극복하는 대상이나 체념하는 대상으로 바라보기 쉽다. 하지만 수행 요기가 말한 것처럼 삶을 보는 방식을 우리가 직접 선택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고통에 집중하기 보다 행복으로 눈길을 돌릴 수 있어야 한다. 행복을 찾으러 다니는 게 아니라 행복을 먼저 선택하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나는 오늘 하루 사물과 사건의 좋은 면을 보기 위한 선택들을 했는가 되돌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