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이 바람이 될 때

폴 칼라니티, 이종인 옮김, 흐름출판

by 혜안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에 대한 응답이 떠올랐다. 그건 내가 오래전 학부 시절 배웠던 사뮈엘 베케트의 구절이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나는 침대에서 나와 한 걸음 앞으로 내딛고는 그 구절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I can't go on. I'll go on).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순회 방문객과도 같지만, 설사 내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실제로 죽기 전까지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폐암 시한부가 된 신경외과의의 마지막 22개월 간의 여정. 이 책은 수료를 15개월 앞둔 신경외과 레지던트가 폐암 진단을 받게 되어, 자신의 병을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마주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평소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젊은 시절부터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더욱 적지 않을까. 작가인 폴 칼라니티는 학부생 시절부터 죽음에 끌렸던 것 같다.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던 그는 자연스레 문학의 길로 들어섰고, 다시 또 의학의 길, 그 중에서도 인간 정신과 관련 깊은 신경외과의 길로 나아갔다. 이 책은 그가 아직 건강했던 의사로서의 삶에서 시작해 폐암 진단 후의 환자로서의 삶, 그리고 의사겸 환자였던 삶까지, 삶과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의사가 되었으며 끝에는 자신의 죽음과 마주해야했던 그의 구도의 기록이다. 그는 말한다. "바로 이런 순간을 그들과 함께 깊이 파고들기를 원했었다. 그렇다면, 죽음을 이해하고 싶었던 청년에게 불치병은 완벽한 선물이 아닌가?" 라고.


의사의 일이란 환자를 살리는 일이기도 하지만 환자가 앞으로의 여정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목자의 역할이기도 하다. 가끔 나도 의사가 되었으면 좋았을걸 하고 실없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내가 회사에 출근해서 하는 일이 사회에 무슨 도움이 되나 하는 생각이 들 때 그렇다. 한편 누군가를 살리는 의사라는 직업은, 직업의 의미 따위 고민할 필요없이 소명 의식으로 하는 천직, 즉 하늘에서 내려주는 직업같다. 하지만 의사라는 직업을 환자를 살리는 것으로만 보는 것은 그 직업의 기술적인 측면만 이해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의사라는 직업의 깊이는 그 보다 더 많은 선택의 순간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가령 뇌수술을 통해 환자는 목숨을 부지 하겠지만 영원히 자기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능력을 잃어버릴 것이 예상되는 경우에, 환자의 남은 인생은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 폴 칼라니티가 의사로서 도전 했던 일은, 환자에게 있어서 의미 있는 삶은 무엇 인가를 이해하고 환자의 영혼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이 책에는 "내가 생각하는 의사의 일이란 두 개의 선로를 잘 연결해서 환자가 순조로운 기차 여행을 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라는 구절이 있다. 의사의 직업이란 환자가 병에 걸리기 전의 삶과 후의 삶, 환자의 삶에서 죽음으로의 여정, 혹은 환자와 그 가족의 삶이라는, 이어지기 힘든 두 선로를 잇기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닐까.


자신의 죽음과 마주하여 죽어가는 대신 계속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레지던트 수료가 15개월 앞으로 다가왔을 때, 작가는 폐암 진단을 받게 된다. "나는 사람들이 삶의 과도기를 잘 넘기도록 도와주는 목자의 자격을 반납하고,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양이 되었다." 라고 그는 말한다. 작가는 자신에게 남은 날이 석 달이라면 가족과 시간을 보낼 것이고, 일 년 이라면 책을 쓸 것이고, 만약 십 년이라면 의사로서의 삶으로 복귀할 것이지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는 결국 확률로 밖에 알 수 없기 때문에 계획을 짜는 능력을 잃었다고 한다. 내가 만약 그런 상황에 있다면 나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우리 모두는 공평하게 하루라는 시간을 가지지만 그게 석 달 이어진다면, 일 년 이어진다면, 혹은 십 년 이어진다고 가정한다면, 각각의 시나리오마다 내 삶의 계획은 아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것 같다. 다만 지금까지 해오던 일 중에서 중요치 않은 일들을 중단하고, 가족과의 시간을 더 소중히 하지 않을까. 작가는 죽어가는 대신 계속 살아가기로 다짐하는데 이것은 병에 맞서 싸워 이기겠다 의지가 아니라, 죽음에 대해 체념하지 않고 남은 삶을 의미있게 살아가겠다는 의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시간 동안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 하루라는 시간의 의미를 더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대로 확실히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작가와 그의 아내 루시는 고민 끝에 아이를 가지기로 한다. 고통을 피하는 것만이 삶은 아니므로 그들은 인생에 또 다른 차원의 의미를 더해줄 아이를 낳기로 한 것이다.


끝은 멀어지는 듯 보이다가 다시 어느새 눈앞에 다가온다. 항암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작가는 외과의로 복귀를 하고 힘겹게 버텨낸다. 레지던트 수료 라는 자신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걸 해냈지만 몸에 부담이 갔기 때문인지 줄어가던 암이 더 커졌다. 결국 작가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정말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숨을 거둔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 답게 연명 치료를 하지 않고 가족들에 둘러싸여 사랑이 충만한 상태로 그는 떠나갔다. 나도 머리로는 삶이 필연적으로 죽음과 함께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일상 생활에서 그것을 의식하고 살아가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내 자신이 영원불멸할 것이라는 전제를 두고 살아가는 것 같다. 짧은 순간의 환희와 인생의 아름다움과 고통의 순간들은 삶의 제한적인 측면으로 더욱 증폭되는 것이지만, 매일의 삶은 그저 무미건조하거나 하기 싫은 것을 견뎌내는 과정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럴 때면 죽음이 반드시 오는 과정임을 상기하고 원점으로 돌아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작가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했고, 죽어가기를 선택하는 대신 그 안에서 계속 살아가기를 선택했던 것처럼. 죽어가는 과정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삶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하여.


책의 마지막에는 작가의 아내 루시 칼라니티의 글이 실려 있다. 그녀는 딸과 가끔 그의 무덤에 들러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듯 부쩍 자란 풀들을 손으로 쓰다듬기도 하고, 딸이 혼자 노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하면서. 삶이 죽음과 함께라면, 결혼도 사별과 함께인 사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배우자의 죽음은 결혼을 통해 거쳐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이다. 배우자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슬퍼하고, 그럼에도 또 꿋꿋하게 버텨내는 날들 또한 배우자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고 또 계속해서 사랑해나가는 우리 삶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떠난 이들은 남은 이들의 마음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겠지.

에머슨은 이런 글을 남겼다. "보는 자가 언제나 말하는 자이다. 그의 꿈은 어떻게든 말로 표현되며, 그는 장엄한 환희 속에 그 꿈을 널리 알린다." 용감한 보는 자 폴은 이 책을 쓰면서 말하는 자가 되었고, 우리에게 진실한 마음으로 죽음을 대면하라고 가르쳐주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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