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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난 Feb 04. 2024

조선소 하청 노동자로 일하다-(1)

조선소 입성기



인생을 살다보면 애매한 시기를 겪게 된다. 무언가를 하기에는 짧고, 아무것도 안하자니 아까운 그런 시기말이다. 첫 번째 애매한 시기는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입학 사이의 시기였다. 그리고 두 번째 애매한 시기는 군 입대를 앞두고 찾아왔다.


4월 입대예정이었던 나는 학기 종료와 입대 사이의 4개월이라는 애매한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다가 돈이나 벌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구인구직 사이트를 뒤져보았지만, 인생 첫 아르바이트를 건설현장에서 했던 나는 최저시급을 주는 대부분의 아르바이트들이 성에 차지 않았다. 더군다나 어린 시절의 나는 어렸을 때 고생을 해봐야 한다는 이상한 신념까지 있었다. 이런 여러가지 요인들이 나를 자연스럽게 조선소로 이끌었다.


조선소에서의 생활은 절대 잊을 수 없는 몇 가지 기억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우선 내가 거제도로 내려간 날부터가 그러했다. 그 날은 크리스마스였다. 나는 내가 일하게된 업체에서 알려준 모텔을 찾아갔다. 모텔 주인은 반지하에 있는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래도 나름 자전거 여행을 하며 모텔과 여관을 꽤 들락날락했던 경험이 있던 나는 경악을 금치못했다. 모텔에 반지하 방이 있는 것도 처음보았고, 카운터에 적혀있는 숙박비는 허름한 모텔 상태에 비해 지나치게 비쌌기 때문이다.


우선 조선소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안전교육을 받아야했다. 안전교육 강사는 자거나 딴짓을 하면 즉시 쫒아내겠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실제로 몇 명을 지목해서 쫒아냈다. 나는 8시간의 지루한 교육을 듣는 동안 졸지않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했다. 여기까지 오기위해 투자한 비용과 시간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조선소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건강보험공단에서 검진을 받아야 했는데, 평일에만 검진을 했기 때문에 검진을 받기 위해 무단결석을 감수해야했다. 건강검진비용도 10만원 정도로, 학생이었던 나에게는 엄청나게 큰 돈이었다.


내가 첫 출근을 한 날은 새해 둘째날인 1월 2일이었다. 출근 첫 날 조선소의 입구에는 새해 첫 날인 1월 1일에 작업 중 사망한 사람을 추모하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스카이(고소작업차)의 작업대가 꺾여 추락했다고 했다. 새해 첫 날 가장을 잃은 가족의슬픔이 얼마나 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한 가족의 새해의 설렘과 희망가득함은 하루를 가지못하고 처절한 절망으로 바뀌었다.


나는 취부사의 조공을 하게 되었다. 사수를 소개받았을 때 한눈에 한 성깔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짙은 눈썹과 경상도 사투리에 껄렁껄렁함이 더해진 말투는 학창시절에 말썽 좀 부렸을 법한 사람이 가지고있는 전형적인 이미지였다.(실제로도 그랬다) 그는 나를 별로 내키지않아했다. 내가 몇 개월 있다가 갈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일을 가르쳐서 계속 써먹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나를 쫒아낼 요량이었는지 신입이 오면 으레 걸치는 절차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며칠동안 내게 거의 말도 걸지 않았고, 일도 시키지 않았다. 일이 힘든 것 만큼 괴로운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작업순서에 맞게 공구를 건네주기 시작했다. 자작자동차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그라인더나 드릴 같은 공구를 많이 사용해보았기 때문에 일이 어떤식으로 진행되는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그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았다. 묵묵히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했고, 꼭 부를 일이 있을 때 '사수님'이라 불렀다. 그는 이런 나를 보며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는  어느날 갑자기 자신을 사수님이라고 부르는 내게 말했다.


"사수님이 뭐고, 행님이라 불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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