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푹 찌는 날이었다. 밤 사이 비가 제법 많이 내렸다가 오전에 그치더니 구름이 아직은 가시지 않은 채로 공기중에 습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친구와 수영장에 가기로 했다. 장마가 시작된다고 한 주여서 과연 갈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때마침 약속을 잡았던 오늘 이렇게 갠 것이었다. 좀 쨍쨍하지 않으면 어떠하랴! 오히려 좋아!를 외치며 우리는 잠원 한강수영장에 가기로 하고 약속 시간까지 정한 후 각자 준비를 했다. 나는 대중교통으로 갈 생각이어서 버스정류장에서 내린 다음 한강공원으로 가는 길목에 생긴 한 카페에 가보기로 했다. 수영장으로 걸어가는 길 딱 중간에 위치한 카페였고 먹음직스런 베이글을 팔고있길래 커피와 함께 사가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카페 앞에 도착한 나는 약속 시간보다 10분 늦었지만 소식이 없는 친구에게 어디냐고 전화를 걸었다. 차를 가져오는데도 무려 30분이 더 걸릴 것 같다는 것이 아닌가! 이왕 이렇게 된거 그냥 카페에서 혼자 커피부터 마시고 있자며 자리를 잡았다. 작은 전시관처럼 생긴 이 카페는 테이블이 3개밖에 없었다. 단층이지만 천장에도 햇살이 들어오는 창이 나있고 전면부는 아예 통유리창으로 되어있어서 밖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구조였다. 안에 있는 직원과 손님들은 마치 쇼케이스 안에 있는 베이글이 된 기분일 것만 같은 재미있는 공간이었다. 아무래도 한강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니 한강에서 마실 테이크아웃 커피를 사가는 손님이 훨씬 많은듯했다. 나는 혼자 조용히 벽 쪽 테이블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 구경을 하기도 하고 SNS를 들여다보며 이 근처에서 저녁은 뭘 먹어야할지 검색하기도 했다. 어느덧 이야기했던 30분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다시 전화를 했지만 아직도 20분이 더 걸릴 것 같다고 하는 이 친구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언제나 지각 대장인 친구이긴 했지만 이렇게 1시간을 늦는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전화를 끊고 진지하게 집으로 돌아갈지에 대해 고민을 했다. 하지만 막상 또 혼자 카페에 와있으니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새로운 카페를 하나 더 뚫은 것에 대한 만족감이 커서 화를 누그러트릴 수 있었다.
괘씸한 친구가 주문했던 베이글과 커피를 챙겨서 도착 시간에 맞춰 수영장으로 향했다. 사실 오늘 수영장에 온 가장 큰 목적은 친구의 사진을 찍어주기 위해서였다. 만나서 한바탕 화를 내고는 빠르게 수영장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수영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다소 과하다싶을 정도로 삼각대까지 설치하며 사진 찍기에 몰두한 우리였다. 웬 인스타충들이 왔나 싶었겠지만 이토록 비키니 사진에 열중한 이유는 큰 수술을 앞둔 친구의 아마도 마지막일, 매끈한 배를 남기기 위해서였다.
그 친구는 오늘 현재 시각 수술대 위에 누워있다. 작년 이맘때쯤 이 친구의 잔소리 덕분에 건강에 무관심했던 나는 처음으로 MRI 검사를 받아보고 병을 발견하고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게됐다. 너무 무서웠지만 덕분에 좋은 병원을 찾아가 빠르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1년 뒤 지금, 항상 건강에 진심이던 그녀는 아픈 어머니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배를 가르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수술이 무사히 잘 끝나기를 기도하며 기다림에 대해 생각한다. 약속 장소에서 건강한 상대방을 기다리는 사람의 한가로운 마음과 아픈 상대방의 회복을 기다리는 초조한 마음을 비교해 보면서.
아마 커다란 흉터가 남겠지만 당당한 효녀의 훈장이 되겠지? 저번 주엔 얄미웠는데 이번 주는 자랑스러운 그녀가 어서 깨어나길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