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마지막 레이스가 달콤한 법
말할 것도 없이 책은 나의 둘도 없는 친구다.
그 친구는 일단 나를 데리고 나가준다.
스위스의 작은 마을이었다가
뉴욕의 어퍼이스트 화려한 골목이었다가
공항 대기실, 혹은 달콤한 냄새가 나는 베이커리 카페,
혹은 대자연, 어디든 내가 좋아할 만한 곳으로 데려가 준다.
당연하게도 너무 취향저격이다.
미끈한 비행기를 타고, 어떤 때는 덜컹거리는 느린 기차로,
때로는 두 발로 하는 산책에 기꺼이 동행하면서 바람을 쐬게 해 준다.
얼마나 고마운 친구인가.
그렇게 친구와 보내는 동안은 근심도 고통도 잊을 수 있다.
이래도 될까 마음이 서걱거리긴 해도
애초에 타고난 비관주의는 아니었기에 쉽게 미소 짓고 웃는다.
그렇게 울다 웃기를 반복한다.
나의 친구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를 더 현명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기꺼이 도와준다.
진지하게 자기 성찰은 하고 있는지 조용히 물어오고,
집안에서 키우기 너무 근사한 몬스테라라든가 유칼립투스가
고양이나 개에게는 해롭다는 사실을 책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 외에도 식물세밀화가가 쓴 <식물의 책>은 작가의 섬세하고 따뜻한 그림 덕분에
당장에 산과 들판으로 달려 나가고 싶게 만든다.
롭 무어의 <결단>이라는 책은
누구도 처음부터 모든 답을 가지로 있지 않다. 시작하기 너무 늦은 때는 없지만
기다리면 항상 너무 늦는다.
는 말로 도무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나를
등 떠밀어 주기도 하지 않았던가.
믿었던 사람에게 크게 실망하고 풀이 죽었을 때
<이제껏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라는 책을 읽으며 한 수 배우기도 했고,
고다 아야의 <나무>에서는 작가가
"굽고 뒤틀렸다는 건 말하자면 힘이 있다는 뜻이잖아요,
그 힘 때문에 나무가 부러지거나 쓰러지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거잖아요'
라고 나무를 항변하는 장면에서는
나무와 세상을 보는 그녀의 감각에 감탄하며 나조차도 울컥했던 것 같다.
책 그러니까 다정한 나의 친구는
풀 죽어 있는 나의 어깨를 언제나 감싸주었으며,
끊임없이 나를 놀라게 함으로써
무감각해지려는 나의 오감들을 깨워 주었고,
결국은 감사와 기쁨, 생에 희망까지 안겨다 주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예상치 못한 재난에 부딪히게 되면
어김없이 서점으로 달려간다.
아니 이제는 인터넷 주문을 시작한다.
책을 볼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선호하는 방법은 물론 도서관이지만,
나의 소도시 도서관은 보통 두 가지에 해당했다.
찾는 책이 대출 중이거나 아예 없거나.
서점은 찾아달라는 책을 아주 기쁘게는 아니어도
적어도 '내 일이죠'라는 식으로 받아주는 직원들 덕분에 힘이 났는데
어째서인지 요즘은 무뚝뚝한 것이 트레드인양
'아니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는 식'을 몇 번 경험하고 나서는
아쉽게도 가장 꺼려지는 방법이 되어 버렸다.
아, 그럴 때마다 책방이 하고 싶은 병이 도진다.
누구든 편안하게 들러서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있고,
찾는 책은 무엇이든 밝게 웃으며 '퍼펙트'라고 말해주며 찾아주는 책방,
어째서인지 커피와 시나몬 도넛은 당연히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
아 공상은 그만하고...
읽고 싶은 책을 다 사서 본다는 건 불가능하다.
우선, 경제적인 면에서 벅차고 읽고 나서도 대략 난감하다.
책을 꽃을 수 있는 곳, 쌓을 수 있는 곳은 이미 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다시 읽기'.
책장에 오래 꽂혀 있는 책을 하나씩 가져와 다시 읽기로 한 것인데
읽었다고 생각했고, 떡하니 밑줄이 그어진 것을 보니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아주 좋아하는 책이니까 지난 정리에도 살아남은 것일 텐데도
도대체 이 새로운 느낌은 뭐란 말인가.
조금 황당하지만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이 빛을 발한다.(좋단다)
다시 읽기는 여러모로 유용하다.
첫째,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책이니 취향 걱정을 안 해도 좋다는 점,
둘째, 지출을 어느 정도 막아준다는 점,
셋째, 책의 감상이나 느낌이 같을 리 없다. 곧 책의 재발견이다.
책을 친구 삼는다는 건
살면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현명한 행동 중 하나일 것이다.
혼자 있고 싶을 때, 혹은 혼자 있어야 할 때
제법 든든한 동지가 되어주고
여행을 가지 못할 때는 책으로 대신 달랠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은 솔직하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순탄하게 살아온 작가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다 털어놓음으로써
공감과 위로를 기대했던 마음에 부응해 준다.
때로는 천연덕스러운 유머와 위트로 우리를 웃겨주기로 한다.
그런 작가들조차도 불우한 기억들이 많다는데 놀란다.
가볍게 농담을 던지는 귀여운 책들을 보면서 기운을 차린다.
'그래, 그만 생각하자'라고.
좋은 친구를 곁에 둔 덕분에 지난 일 년여 시간들을 잘 건너올 수 있었다.
힘든 일은 언제라도 다시 찾아오겠지만,
최소한 나에게는 책이라는 친구가 있고 그때마다 넌지시 답을 제시해 주리라 믿는다.
어떤 식으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