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혹은 이웃들

_마지막 레이스가 달콤한 법

by 하이움

친구가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저 드라마 같은

친구가 나에게는 없다.


무슨 일이 터지면

저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즉각적으로 연락을 해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내 보일 수 있는 친구가 있나?


우선 현실은 당장 필요한 시간에 달려올 친구를 가려야 한다.

A는 지금 같은 도시에 살고 있지 않지

B는 둘째가 중간고사 기간일 거야

C는 병원 치료 끝난 지 얼마 안 됐잖아

D는 얘기를 하는 쪽이지 듣는 쪽은 아니잖아....


이런저런 이유로 많지도 않은

친구들이 떨어져 나간다.

어쩐지 김이 샌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10대 시절처럼

간단하게 만나 지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고

친구하나만 바라보고 살기에는

이미 모든 게 너무 복잡해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나 역시도 무조건 달려가 줄 수 있냐 말이다. (원통하게도)


우리가 대수롭게 여기지만

서로 시간이 맞아

브런치를 먹고 있는 건

작은 기적인지도 모른다.


이런 연유로

나는 털어놓을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어영부영하는 사이 주변 사람들은

나의 불행을 감지하지 못한 채

나는 언제나 별 고민이 없는 사람이 되어간다.


그렇게 어쩌다

우정이 돋보이는 영화나 드라마라도

볼라치면 그들의 우정이 너무 부럽고

야금야금 약이 오르는 것이다.


저건 환상이야. 말도 안 돼.

일단 찐친들이 한마을, 한도시에 모여 산다는 것부터가

설정이 너무 억지스럽잖아.

그리고 아무리 오랜 친구지만

모든 걸 털어놓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다들 현실에 저런 친구가 없으니까

영화마다 늘 등장하는 거라고!

속지 마, 기죽지 마!


당장 가까이 있고 어떤 이야기든

듣는 시늉은 해주는

고마운 남편이 있지만

그동안 너무 많은 의지를 했다.

남편도 사람이다.

징징대기보다는 명랑하게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편이 좋겠지.


엄마의 지칠 줄 모르는 푸념들을 듣고

자라온 나로서는

아이에게 의지하는 것도

절대 피하고 싶은 일이다.

나를 위로하는데

그들의 시간을 다 써버리기를 원하지 않는다.


허물없이 불러내 시원한 맥주라도

한잔 하면 살 것 같은데..


올해처럼 여러 일이 한꺼번에 일어난 날

오래된 친구들이 무척이나 그리웠다.

말이 날까 불안하지 않고

눈물을 쏟아내어도 부끄럽지 않을 친구들..


어쩌다 이렇게 흩어져서 사는 걸까..


일기가 대안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는 너무 조용해서 어쩐지 김이 샌다.

그리고 모인 일기장을 나중에 누군가가

볼 거라고 생각하면 절대 솔직해지지 않는다.


오래전 아이가 어렸을 때

언제고 들킬 것을 염두해

칭찬과 감탄을 남발한 적이 있었는데

매일 뭔가를 쓰는 내가 궁금했던 아들이

엄마 일기 보여줘라고 했을 때

저에 대한 칭찬과 사랑을 확인하고

무척이나 흐뭇해하던 일이 생각난다.

그러니 이건 그리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속시원히 쏟아낼 곳이 없을까.

말해 뭘 해. 브런치지..


그렇게 시작된 나의 브런치 활동.


발행을 매일 하진 않더라도

글은 매일 쓰고 있으니

이런 기특한 일이 어디 있으며

무엇보다 맘에 드는 것은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신분을 숨기고 평범한 직업을 가지고

태연하게 살아가는 비밀요원처럼

나는 집에서 브런치 작가임을 숨긴다.

물론, 책을 출간한 작가도 아니고

브런치에서 인기 작가도 아니지만

소소한 나의 위장활동은

은밀한 즐거움을 안겨주며

기꺼이 비밀친구가 되어주었다.

어릴 적 마니또처럼..


그 어디에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밤마다 찾아가 속살거렸다.

그러는 동안

내 안의 불필요한 감정들이

조용히 사그라들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왜 쓰게 되었는지는 잊은 채

오로지 쓴다는 것에만

몰두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런 세상이 있다니..

신세계가 따로 없다.

'신세계'란 어떤 식으로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법이다.


당장 만나서 한바탕 수다로

불태우지 못한 아쉬움은 글로 풀고

비슷한 글을 발견하면서

마음을 달랬다.


그렇게 달래 놓은 마음들은

마침내 친구들과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면

좋은 얘깃거리가 되기도 하고

서로가 손을 마주 잡게 되는

더없이 적절한 계기가 되어 주기도 했다.


딱 이만큼이 완벽할지도 모르겠다.

정작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도망가고 싶어지는 것처럼

소중한 것은

참고 지켜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당장은 조금 외롭더라도.


잡은 손을 빼서 헤어져 돌아올 때는

얼마간은 서글펐지만

'괜찮아.. 이 정도면 충분해'라는

마음이 조심스럽게 피어오르곤 했다.


삶은 흐른다.

모든 것이 -이를테면

사랑과 우정이 다 만나질 때까지

보류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위로받지 못하는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그 시간을 어떻게 채우는가는

순전히 나의 태도에 달려 있을 것이다.


오래된 친구는 없을지 몰라도

오래된 나의 이웃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마음을 고쳐먹고 고개를 돌려본다.


매일 운동하면서 만나는 사람들

자주 오가는 마트나 세탁소 사장님

그리고 가끔 들리는 카페의 직원까지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건

생각보다 기분이 좋다.


그리고 그들과 나의 거리는

의외로 가까운 것 같다.

지루한 치과 치료시간을 버티고

겨우 막 레진을 씌우고 한숨을 돌리진

채 100일도 되지 않아서

곱창을 먹다가 레진이 두 조각으로

쩍 갈라져서

기겁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지금 내 이웃들은 알지만

오래된 친구들은 모르는 일이니까.


이렇듯 시시껄렁한 일상을

나눠 가지는 동안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갔다.


그렇게 지나간 날들이 나쁘지 않았고

그렇게 관계 맺은 사람들이

결코 의미 없지 않았다.

지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내 진정한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환상만 덜어내면

그들은 더없이 유쾌하고

친절한 이웃이 되어 준다. 기꺼이.


몇 년이 가도 한자리에 모일지 어떨지

모인다고 해도 내 상상의 그림처럼

완벽한 서로가 되어줄지 어떨지 모를 친구를 그리워하다

현실 한탄만 쏟아내기보다는

당장 내 주변의 이웃에게

더 호의를 보일 것,

그리고 그들의 호의를 저버리지 않는 것,


그게 위기에 대처하는

나의 방법이었고

지난 일 년,

몹시도 혼란스러워하던 나를 살렸다.


여전히 친구들이 그립고

그런 친구들을 가까운 둔 사람들이

부럽다.


하지만 달라진 게 있다면

자주 만나지 못하는 만큼

연락마저 뜸했던 친구들에게

이제는 생각날 때마다

안부 문자를 한다는 것이다.


몇번 오가는 대화만으로

마음에 온기가 스며들었다.


그리고 다정한 나의 이웃들에게

언제나 활짝 웃으면서 인사한다.

더없이 소중한 친구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