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마지막 레이스가 더 달콤한 법
정리의 시작은
물건을 어떻게 분류하고
어디 놓을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다 꺼내서 펼쳐 놓는 거란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새로운 관점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있는 걸 다 꺼내 놓는다?
서랍 속 물건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야말로 카오스,
대혼란의 사태가 벌어질 것 같아
아찔하니 겁이 나서
도저히 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마음이 무척이나
휘휘 거리던 어느 날 오후.
서서히 차오르는 슬픔을 떨쳐 버리기 위해
뭐라도 하고 싶었던 그때.
정작 정리하고 싶은 건 따로 있었는데
애꿎은 애만 잡듯
나는 서랍 하나를 물고 늘어진다.
서랍을 싹 비우고 나면
내 마음도 조금은 비워지지 않을까
믿어보면서..
깊고 넓었던 서랍에는 생각보다
많은 물건들이 서로 엉켜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서랍을 통째로 엎어 본다. 좌르르~
놀랍다.
무슨 작고 신기한 것이 그렇게나
많이 들어가 있는지..
사실은 신발장이나
옷장을 정리하고 싶었는데
그건 이전에 몇 번 도전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단호하지 못한 나는
매번 이런 추억 저런 추억을 소환하면서
정리하고 버리기에 번번이 실패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성공해 볼 요량으로
옷이나 신발보다는
만만한 잡동사니 서랍을 노린 것이다.
사두고 쓰지는 않은 다이어리,
여행 기념으로 산 연필과 볼펜들,
무늬가 예쁜 여름 부채, 머그잔,
색종이, 그림물감, 작은 그림 캔버스,
귀여운 색의 양말, 반짝거리는 스티커,
구겨진 지도..
낯선 도시의 버스 승차권,
그림 앞에서 가슴이 벅찼던
어느 해 봄날의 전시 입장권까지..
하나하나 살펴보는 얼마간은
마치 추억 여행이라도 떠난 듯
신기하게 즐겁기도 했다.
그러다 탄성을 지른다.
그렇게 찾고 싶었던 아이의 첫 그림
잘 보관해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사하고도 못 찾아서 낙담했던
아이의 첫 그림이 세상에!
거기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늘의 슬픔따윈 잊어버린다.
그리고 환하게 웃는다.
그야말로 횡재한 기분이다.
그리고 다시 잃게 될 것이 두려워
쏟아놓은 물건들 사이로 손을 더듬거려
폰을 찾아 사진을 넉넉히 찍어둔다.
사진으로라도 남아 있으면
행여 잃어버리거나
물건을 보내 주었을 때도
상심이 덜하다고
누군가가 일깨워 주었다.
삶은 이렇게나 단순하고 어이없는 것을..
갑작스레 닥친 시련이나 이별에
얼굴을 묻고 한숨과 눈물을 짓다가도
아이의 웃는 얼굴이라든가,
그날따라 잘 만들어진 저녁 식사
생각지도 않게 피어오른
꽃망울 하나에도
온마음에 불이 환하게 켜지기도
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래 그런 게 삶이지. 그런 게 인생이야.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시간이 포개질수록 깨달아지는 것이
많은 것이 인생이기도 한 것이다.
갑자기 힘이 난 나는
순식간에 서랍을 정리해 버린다.
그렇게 하루에 하나의 서랍을 정리하고
그러다 방 하나를, 신발장 하나를
이런 방식으로
창고까지 정리를 마쳤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덜컥 샀지만
도저히 신고 나갈 데가 없는 구두라든가
내가 보기에 아까운 물건들은
지인들을 데려다가 고르게도 했다.
이젠 몸에 배여서
수시로 정리를 하곤 하는데
햇살이 좋은 날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서랍 하나씩 정리하는 건
즐기는 취미가 되었다.
(늘 정리할 게 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렇게 비우고 정리하는 습관들은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옮겨갔다.
서랍을 정리할 때처럼
내 모든 감정들을 전부 꺼내본다.
분노와 자책, 고통과 슬픔
공포와 걱정, 후회와 원망..
이기심..
미처 생각지도 않은 것들도 나열된다.
놀랍기도 하고 연민도 느껴진다.
'네 잘못이 아니야'
혹은 '그럴 수도 있지'
다독이고 위로하면서
감정을 겨우 흘러 보내고
아직은 잘 모르겠는 감정들
그리고 남겨 둘 만한 감정들을
다시 싸서 간직한다.
그제야 필요한 것만 들어있는
서랍의 여백처럼
마음 한편도 환해진다.
당연히 숨쉬기도 한결 편해진다.
정리를 취미로 삼으면서
더 좋았던 것은
점점 소비를 지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장은 갖고 싶더라도
그것이 자리를 잡을 생각을 하니
애써 비워둔 공간이 아쉬워
그만두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에도 쓸데없는 감정들은
되도록이면 들여놓지 않으려 한다.
정리의 기본은
쇼핑을 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엄격한 미니멀 리스트가 아닌 다음에야
여전히 사들이고 있는 것처럼
싫은 감정도
또다시 생겨 날 것이다.
대신
되도록 필요한 것만 소비하려는
에센셜리스트나
심플라이퍼를 지향하듯이
내 마음에도 내 생각에도
꼭 필요한 마음,
고운 마음, 따뜻한 생각만
담아두도록
매일 애쓰면서 살고 싶다.
그러니까 물건을 살 때처럼
내 마음에도
자주 물어봐줘야 할 것 같다.
그거, 정말.. 필요한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