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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Nov 17. 2019

알람은 꺼둘게요

나의 힐링 모먼트를 찾다

'저에게 있어서 잠이 진짜 소중하거든요.'

MBC에서 방영된 '소풍'이라는 프로그램에 아이유가 출연해서 했던 말이다. 아이유의 밤편지라는 노래는 단순히 '사랑해', '보고 싶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반딧불이를 좋아하는 사람의 창가로 보내어 이 밤 편안하게 잠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이야기하는 노래이다. 이 영상을 보며 '맞아 맞아, 저게 진짜 사랑이지' 극하게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나 또한, 잠에 대한 소중한 마음이 그 누구보다 크기 때문이다. 집에서 도보로 20분 내에 위치한 초중고등학교를 나왔지만, 가까운 곳 사는 사람이 더 지각이 잦다는 말을 증명이나 하듯 지각이 잦았다. 온몸이 일어나길 거부하는데 눈을 떠야 하는 그 아침들이 매일 괴로웠다. 등교의 자유가 주어졌던 대학교 때에는 1교시는 생각도 안 하고 무조건 3교시부터 시간표에 담았다. 보통 핸드폰 속 알람 어플을 보면 그 사람이 아침형 인간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데, 나와 같은 사람은 거의 5분 단위로 알람이 설정되어있다. 7시 정각, 5분, 10분, 15분... 그리고 혹시 몰라 40분까지 빼곡히 알람이 켜져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알람을 꺼버리고 다시 잠에 들기 쉽기 때문이다.


출근하는 삶을 시작했다.

9시에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던 내가 9시까지 출근하는 회사원이 되었다. 출근 준비를 하고 10분 정도 일찍 도착하기 위해서는 7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조금 지나면 적응되겠지 싶던 아침은 아마 평생 동안 숙제로 남을 것 같다.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나는 기분을 맛보고 싶어서 올해도 벌써 3번째 베개를 주문했다. 인터넷 상에 온갖 꿀잠 베개, 기절 베개, 그리고 이태리에서 의사가 만들었다는 기능성 베개까지. 베개뿐만 아니라 조금 더 숙면을 취하고 싶어 침대 위에 까는 토퍼도 새로 사고, 여름과 가을엔 모기 때문에 잠을 설치는 것이 너무 싫어서 모기장도 설치했다. 매일 앉아있다 보니 다리가 부어 푹 자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또한 해결하기 위해 종아리용 쿠션도 장만했다. 숙면할 수 있다는 광고에 쉽게 지갑을 연다. 나중에는 애플워치를 사용하며 수면의 패턴을 확인했는데, 깊은 수면을 하는 시간이 보통 1~2시간 정도 나와야 하는데, 나는 1시간이 되지 않는 날이 많았다. 수면의 질을 눈으로 확인하니 더욱 숙면에 집착하게 되었다.


매일 알람을 맞추며 잠에 들었다.

어느 금요일 밤, 잠에 들기 전 습관처럼 알람을 맞추기 위해 어플을 켰다. 입사 초기에는 퇴근 후 저녁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약속을 잡았다. 취준생일 때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캘린더를 꽉꽉 채웠다. 주중엔 출근을 위해, 주말엔 약속을 위해 알람을 맞추고 잠에 들었다. 근데 오늘은 알람을 맞출 필요가 없었다. 내일 아무런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다. 알람 앱을 다시 닫고 눈을 감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미쳤다. 너무 행복한데?

오랜만에 꿀잠을 잤다. 12시에 가까운 시간, 허리의 뻐근함과 함께 눈을 떴다. 이렇게 늦게 일어나도 헐레벌떡 머리를 감을 필요도 없었고, 핸드폰엔 아무런 부재중도 쌓여있지 않았다. 비록 아침이 없어진 하루였지만 행복함이 그 빈자리를 넘치게 채웠다. 부담 없는 아침의 행복감을 곱씹으며 여유로운 주말을 보냈다. 또다시 월요일이 오고, 다섯 번의 아침을 시끄러운 아이폰의 전파 탐지기 소리로 눈을 뜬다. 그리고 보상처럼 찾아온 금요일 밤. 지난주에 느꼈던 행복이 다시 찾아왔다. 마음껏 자고 싶은 만큼 자다가 자연스럽게 눈을 뜨는 내일을 기대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행복한 것보다 행복하다는 감정을 인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늦잠 자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때에는 그냥 일상에 불과하고 가끔은 게으른 내가 한심하게 느껴진 적도 있었다. 소중한 주말의 오전을 날려버렸다는 생각에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이것을 직장생활의 엄청난 행복이라고 인지하는 순간 완전히 달라졌다. 그 누구도 감히 방해할 수 없는 나만의 힐링 모먼트가 생긴 것이다. 알람 없이 잠에 드는 순간에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을 안 뒤로, 그 순간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왔다. 금요일 밤 침대에 눕기 전에 설레는 마음까지 든다. 이번 한주도 힘겨웠지만 잠과 잘 싸워 훌륭히 출근했으니, 오늘은 아무 걱정하지 않고 푹 자도 된다는 스스로 주는 최고의 보상이다. 주말 점심에 만나자는 친구의 말에 이젠 망설여진다. 점심 약속을 나가기 위해선 10시에 기상 알람을 맞춰야 하는데, 이것은 내가 5일 동안 손꼽아 기다려왔던 나의 행복을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저녁 약속으로 친구를 회유한다. 알람 없이 잠에 드는 시간은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 포기하고 싶지 않다.


알람을 맞추지 않고 잠에 드는 밤, 나만의 힐링 모먼트.

칭찬과 보상이 각박한 회사에서 내가 어떨 때 가장 행복한지 아는 것은 하나의 무기를 얻는 것과 같다. 힐링 모먼트는 스트레스 해소에 효과적인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처럼 걱정 없이 늘어지게 잠을 자는 것이 아니더라도, 회사생활을 통해 가장 짜릿하게 느꼈던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그 순간들을 되돌아보며, 그게 행복한 순간이었음을 이해해보자. 알고 난 뒤 다시 그 순간을 만난다면 분명 그때보다 더 행복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회사원으로서 힐링 모먼트를 갖게 됐다는 것, 이또한 회사생활의 가장 큰 성취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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