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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Oct 19. 2019

팀에서 원하는 신입사원과 나

지금 그대로도 충분해요

'여러분이 되고 싶은 신입사원의 모습을 그리고 그대로 행동하세요.'

신입사원 연수에서 들었던 수많은 강연 중 가장 인상 깊은 말이 있다. 특급 비법인 것처럼 말하는 강사의 강렬한 피치 때문인지 당장이라도 시도해보고 싶었다. 되고 싶은 사람을 생각하고 그대로 행동하라는 의미는 긍정적인 자기 암시를 통해 하기 어려운 목표 행동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색하지만 새로운 나를 만들려는 시도는 더 나은 나를 만들기 때문이다.


사실 여러 번 시도했던 방법이었다.

유럽으로 교환학생을 갔을 때, 외국인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인싸'가 되고 싶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나는 누구든지 될 수 있었기에 마치 게임에서 리셋 버튼을 누르고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는 것처럼 되고 싶은 페르소나를 그렸다. 누구와도 쉽게 어울리고 서툰 영어도 자신 있게 내뱉는 그런 당찬 한국인이 되고 싶었다. 처음엔 조금 되는 듯싶었다. 생전 처음 가본 클럽에서 못 마시는 맥주도 벌컥벌컥 마시고 곁눈질로 춤도 따라추며 즐겼다. 아니, 즐기는 척했다. 금세 지처버린 나는 인싸의 길을 포기하고, 내 모습 그대로 소수의 친한 친구들을 사귀고 소소한 모임과 여행을 즐기는 쪽을 택했다. 그게 훨씬 더 행복하고 편안했다. 생각해보면 많은 순간 나는 외향적이기 위해 노력했다. 학년이 바뀌는 학기 초마다 소위 나대기 위해 노력했으며, 대학교 입학할 땐 한 달 캘린더가 꽉 찰 만큼 약속을 잡았다. 동아리나 봉사활동 같은 새로운 모임이 형성될 때에도 나는 새로운 형상을 그렸다. 닮고 싶은 모습을 따라 행동하고, 그리고 지쳐 포기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20년 넘게 살아온 나라는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가끔 내가 내성적인 사람인지 외향적인 사람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은데, 51:49의 비율로 내성적인 성향이 더 강한 쪽인 것 같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방출된 에너지를 채우는 시간이 내겐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싸인 척하기 위한 모든 행동엔 용기와 에너지가 소모됐기 때문에 내가 그린 페르소나는 결국 진정한 내가 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사람들은 어떤 신입사원을 좋아할까?

연수에서 감명받았던 나는 또다시 신입사원 페르소나를 그렸다. 조용하고 소심한 사람보단 먼저 스스럼없이 다가가고 지겨운 사무실 분위기를 반전시켜줄 그런 푸릇푸릇한 신입사원을 사람들은 기대할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 회사는 정식 입사 전 두 군데의 부서에서 인턴실습을 진행했는데, 보통 한 부서에 2~3명의 인턴이 실습을 하는 형식이다. 집단 내에서는 감정의 역동이 1:1의 상황보다 굉장히 빠르게 일어나는데, 예를 들어 점심식사 장소가 회사 앞 김치찌개 집이라는 사실을 두 명의 인턴 중 누구에게 전했느냐에 따라 누군가는 씁쓸함을 느끼는 상황이 벌어진다. 보통 조금 더 외향적이고 리액션이 좋은 신입사원을 팀에서는 편하게 느낀다. 사실 나중에 후배로 인턴을 직접 받아본 이후에는 아무런 의미 없이 둘 중 한 명을 부르게 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신입사원 입장에서는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신경 쓰인다. 나 또한, 처음 시작하는 사회생활의 첫 단추를 잘 끼워보고 싶은 욕심에 밝고 긍정적인 신입사원이 되고 싶었다. 방긋 웃으며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선배들의 말에 '아 진짜요?' 자동반사 수준의 반응을 하며 웃음을 아끼지 않았다. 식사 중 침묵은 견딜 수가 없어서 퇴근 후엔 무엇을 하는지, 휴가 계획은 없으신지 자꾸만 대화거리를 만들어냈다.


언제나 그러했듯 나의 연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특히 회사에서는 더 짧게 막을 내렸다. 회사의 구성원은 타인과 교류를 하기 위해 출근하는 것이 아니다. 정해진 시간 동안 주어진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모이고, 그 과정 속에서 교류는 부가적으로 발생한다. 새로운 사람과 친해지기 위해 회사에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래가 아닌 '어른'들과 친해지는 스킬이 부족했는지 노력을 해도 잘 되지 않는 상황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긴 근무시간 동안 웃고 있을 수 없기에 대부분의 시간은 무표정으로 채워졌고, 갑자기 주어진 대화의 기회에 가상의 나는 나올 틈이 없었다. 내가 만든 슈퍼루키 페르소나는 좀처럼 잘 나오지 않았고, 진짜 나를 들켜버렸다. 나만 이렇게 팀에 어울리지 못하는 것일까 걱정의 시간이 계속되며 출근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던 중 친구의 말이 큰 힘이 되었다.


넌 어디서나 사랑받을 거야. 네가 지금까지 속했던 모임에서 사랑받은 것처럼


내가 사랑받았었나.

과거의 수많은 모임을 되돌아봤다.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대외활동을 통해 만난 여러 모임에서 나는 항상 페르소나가 되기에 실패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진짜 나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어울렸다. 진짜 모습이 드러났음에도 관계는 달라지지 않았다. 어떤 누구도 왜 처음에 그렇게 다른 사람인척 했는지 나무라지 않았다. 우리는 간혹 첫인상과 친해진 이후의 모습이 너무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이중성을 생각하게 되진 않는다. 누구나 처음 관계를 시작할 때의 모습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연기하던 모습도 결국 나의 일부이며,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은 진심은 내 모습은 가면 밖이나 안이나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시간이 흐르고 진짜 나의 모습이 드러났을 때에도 날 좋아해 주었던 이유는 관계가 지속되는 과정 속에 서로의 진심은 어떻게든 전달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내가 되기로 했다.

팀에 융화되기 위해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 모습 그대로 다가가기로 했다. 누군가 상사에게 '너네 신입사원 어때?' 물으면, '그냥 뭐 조용하고 착한 것 같아.'라는 무미건조한 평가를 들을지 몰라도 그게 진짜 나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억지로 '우리 신입 최고야'라는 평을 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느리지만 여러 업무에 부딪히면서, 팀원들과 자연스럽게 시간이 쌓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서로 알아갈 기회는 많다. 내가 가진 것 이상의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3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팀원들과의 침묵이 더 이상 불편하지도, 그들과 친밀하게 지내기 위해 과도한 에너지를 쏟고 있지도 않다. 신입사원 때 느꼈던 것처럼 억지로 농담을 하거나 말을 지어내지 않아도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과 잘 지낼 수 있었다. 또다시 다른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게 될 때, 되고 싶은 사람을 따라 할 수 있겠지만, 그 과정 자체가 '나'라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고 더 이상 그 페르소나 만들기에 실패한 나 자신을 탓하지도 않을 것이다. 내 모습 그대로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지금 그대로도 우린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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