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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린 박하 Sep 24. 2023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 민주주의

꽃 같은 청년의 죽음

  


 1967년은 국내외 근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이 대거 발생했던 한 해다. 유럽공동체(EC) 발족했고, 제3차 중동전쟁이 일어났다. 10월에는 세계 혁명가의 아이콘인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 정부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한국에서는 7월 8일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간첩단 조작 사건인 동백림 사건(東伯林事件)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6월 2일 서베를린의 도이치 오페라에서는 독일 근현대사의 도화선이 된 중요한 한 사건이 발생한다.     


 도이치오페라(Deutsche Oper)는 베를린의 3대 오페라 극장의 하나로 옛 서베를린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미니멀하고 차분한 회색 건물로 독일스럽다란 느낌이 물씬 풍긴다. 1912년 당시 프로이센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였던 이곳 샬로텐부르크(Charlottenburg)에 세워진 오페라극장은 지금과는 다른 신고전주의 양식의 클래식한 건물이었다. 나치 시절에 이곳은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나치의 괴벨(Joseph Goebbels) 수상의 경쟁자였던 괴링(Hermann Göring) 수중에 있던 슈타츠 오페라(Staatsoper)에 대응해 도이치오페라하우스(Deutsches Opernhaus)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전쟁 기간 파손과 복구를 계속했고, 분단 시절에는 서베를린의 대표 오페라극장으로 재건축을 통해 1961년에 재오픈하였다.


 도이치 오페라 지하철역 입구로 나오면 바로 실물 크기의 청동 부조물이 서있다. 마치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을 연상케 하듯 청년 하나가 상의가 벗겨진 채 거꾸로 쳐 박혀 있다. 헬멧을 쓰고 얼굴이 가려진 두 명의 경찰이 등장하는데 한 사람은 청년의 양팔을 등 뒤로 꺾어 강하게 제압하고 있고 다른 경찰도 포박을 돕고 있다. 화면 왼쪽에는 어떤 인물의 형태가 제대로 보이진 않고 구호가 쓰인 푯말과 그것을 꼭 쥐고 있는 두 손이 등장한다. 부조 맨 오른쪽에는 유일하게 얼굴이 정확하게 잘 보이는 인물이 보이고 그 위로는 얼굴보다 크게 강조된 주먹이 들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등장인물의 형태와 소품, 동작들의 표현이 부드럽고 사실적이기보다는 단순하고 거칠게 묘사되어있다. 어둡고 습한 진흙탕 위에서 벌어지는 일인 것처럼 차갑고 처절한 느낌을 준다. 작품이 의미하는 특정한 내용을 모르고 보더라도 마주하기 힘들어 고개 돌리거나 불편한 마음이 들게 한다. 클래식한 오페라를 감상하러 오는 극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알프레드 히르드리카(Alfred Hrdlicka)의 작품으로 1971년 제작되었지만 이 자리에는 1990년에 세워지게 된다. 도대체 이곳 오페라 극장과는 어떤 연관이 있고 어떤 사건이 발생한 것일까.  

   

 사건이 발생한 날은 1967년 6월 2일 오후 8시경이었다. 이란의 독재자 팔레비 2세가 독일을 찾았고 이날 도이치 오페라에서 서독의 주요 정치인들과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Die Zauberflöte)’를 관람하고 있었다. 팔레비 2세는 자국의 독재체제에 대항하는 자국의 학생들과 지식인들을 탄압했던 인물이었다. 이란의 반민주적인 행태에도 불구하고 당시 독일과의 중요한 무역 파트너였던 이란의 독재자는 독일 정부의 환대를 받으며 방문했고 이에 대한 항의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극장 앞에서 반대 시위를 벌였다. 독일 정부는 시위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로 결정하고, 이날 경찰들은 ‘여우사냥(Füchse jagen)‘이라는 작전 구호 아래 시위 참가자들을 강하게 진압하였다. 시위 주동자들을 색출 체포하기 위해 소위 그라이 퍼(Greifer)라 불리는 사복경찰들이 투입되었다. 무장하지 않은 시민을 군홧발로 밟거나 쫓기는 젊은이들을 무차별하게 구타하는 등 무력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키려는 경찰과 벽돌 등으로 대항했던 시위대간의 충돌은 격렬했다.


 경찰을 피해 달리다 크루메슈트라세(Krumme Straße) 66번지 안뜰에 몰려 두 세명의 경찰에게 심한 폭행을 당하고 시위가 경찰들과 학생들 간의 난투극이 격화되며 급기야 어디선가 총성이 울렸고 학생 한 명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이날 시위에 참가했던 벤노 오네조르그(Benno Ohnesorg)로 그 당시 베를린 자유대학에 재학하는 학생이었다. 그는 머리에 많은 피를 흘리며 의식을 잃고 쓰려졌다. 부상당한 오네조르그를 안고 사격을 중단하라 외치며 도움을 요청하는 하우스(Friederike Hausmann)만을 촬영한 다넨바움(Uwe Dannenbaum)의 보도사진이 유명한데, 긴박했던 그날의 정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구조되는 과정도 상당히 지체가 되었고 이후 병원에서 방치되다 시피하며 그는 끝내 죽음을 맞았다.

Friederike Hausmann am 02.06.1967 mit dem sterbenden Studenten Benno Ohnesorg.

(Foto: dpa)



 이후 몇 가지 총기사건의 증거를 은폐하려는 석연찮은 시도들이 있었고, 베를린 시정부와 경찰의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가 계속되었다. 대표적인 보수 언론인 ‘빌트 Bild’ 지는 연일 경찰의 가혹한 진압을 옹호하였고 시위 학생운동에게 폭도라는 표현으로 반감을 표현했다. 시민들의 불만은 가중되었고 격렬한 시위들이 계속되었다. 결국 총기를 동반한 경찰의 과도한 진압의 부당성을 인정하고 시장과 검찰총장, 내무장관이 사임했다. 6월 2일 그의 죽음 이후 이듬해 SDS의 지도자인 루디 두취케가 베를린에서 총격으로 사망하며 독일의 68 운동이 가속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며 경제에만 집중했던 서독에 적재되었던 모든 사회 문제와 모순들이 곪아 터져 나왔고 이에 대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들의 중심에는 독일 사회주의 학생연맹(SDS)과 광범위한 원외 야당(Die Außerparlamentarische Opposition-APO)의 활동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민주화 과정에서의 부조리함과 동구권의 왜곡된 소련의 공산주의에도 비판을 가했다. 정작 총격을 가한 경찰 쿠라스(Karl-Heinz Kurras)는 이후 2번의 재판에서도 정당방위에 의한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 사건은 제3세계 국가들에서의 착취와 억압에 대한 저항을 자국의 민주화 투쟁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죽음은 독일 68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그가 동독의 집권 사회주의 통합당 당원이자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고위 간부였던 것으로 확인되며 충격을 주었다.


 이 논란은 68 운동이 독일 사회의 근본적인 자유화와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동독 조종설’은 적군파 테러주의와 함께 反비판의 주요 축이 되기도 했다. 68 혁명의 의미는 단순한 시대 사건이 아닌 유동적, 사회적 현상으로 하나의 큰 패러다임으로 봐야 한다. 1969년 사민당이 기민당과 연정을 끊고 원내 1당이 되고 그 유명한 빌리 브란트의 바르샤바 무릎 사과(Kniefall von Warschau)를 필두로 요직에 있던 나치 인사들의 적폐 청산과 본격적인 사과와 희생자들에 대한 기념물들이 세워진 것도 모두 그 이후에 이뤄진 것들이다. 독일이 비교적 과거청산을 철저하게 이룬 나라로 평가받는 것도 68 운동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권력 쟁취 없이 세계를 바꾼 유일한 혁명은 오늘날 21세기에 이르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반대, 반전평화, 반핵운동, 소수자의 인권, 환경, 여성 운동을 실천하는 노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오네조르크의 사망사건은 독일 작가 우베팀(Uwe Timm)의 1974년 소설 ‘뜨거운 여름(Heißer Sommer)’에서도 다뤄진다. 소설은 68 운동을 배경으로 주인공들이 시대적 사건들과 관련해 변화되는 과정이 동시대 상황과 잘 서술되어 있는 작품이다.  

  

 사건이 일어난 1967년 이란의 독재자 팔레비 2세가 관람했던 오페라 마술피리는 모차르트의 대표적인 오페라 중에 하나다. 극 중 밤의 여왕이 부르는 아리아 ‘나의 가슴은 분노로 불타올라(Der Hölle Rache kocht in meinem Herzen)’는 두 옥타브에 걸친 높은 테시투라(tessitura)로 매우 유명하다. 현자 '자라스트로(Sarastro)'가 지배하는 지혜의 세계에 대항하는 '밤의 여왕(Königin der Nacht)'의 어둠의 세계 사이의 대립이 주가 되는 내용이다. 정의와 빛의 세계는 끝내 승리한다. 공교롭게도 정의롭지 못한 독재가가 교훈을 얻기에 매우 적절한 작품이었다.


 사건 발생 23년이 지난 1990년에야 독일은 과거 역사의 잘못을 인정하고 이 기념 작품을 도이치 오페라(Deutsche Oper) 앞에 세웠다. 그리고 2007년에서야 베를린 경찰은 처음으로 이 기념비 앞에 헌화했다. 그가 죽은 지 무려 40년이 지난 후였다. 잘못된 역사를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는 많은 경우 안타깝게도 긴 시간이 필요했다. 역사는 늘 앞으로 발전해 나아가지만은 않는다. 때로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회귀하기도 한다. 과거의 역사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발전도 없다. 우리 역사에서도 노동운동과 민주화를 외치다 아프게 스러져간 그들의 이름을 기억한다. 지금의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권리와 자유는 그 변화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 많은 이들의 노고가 있었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쓰러졌던 많은 이들의 피를 먹고 자랐다. 꽃 같은 청년들의 안타까운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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