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를린 박하 Sep 24. 2023

연대, 자유, 평등, 정의 그리고 관용

독일 1세대 여성정치가 마리 유카츠

   

남자도 수상이 될 수 있나요?

2000년부터 기민당(CDU)대표로, 2005년부터 총리로 독일을 이끌어 온 앙겔라 메르켈이 2021년 정계은퇴발표를 하자 독일 십대 청소년들이 보인 반응이다. 미래의 유권자가 될 그들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보아 온 유일한 지도자의 퇴장이 낯설고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독일의 Z세대에게 최고 권력자는 여성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들은 ‘남자 총리의 시대가 올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너무 이른 일이다‘고 말한다. 잇다른 지방선거 실패와 기민당 지지율 하락으로 은퇴를 선언했지만 그녀는 위기와 혼란 속에서도 원칙을 고수하면서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흔히 메르켈을 엄마의 포용력과 온화함을 갖춘 '무티(Mutti)리더십'으로 표현하지만 그를 단순히 '여성성'의 틀로만 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는 2005년 좌우 대연정을 이끌어내며 통일 독일의 사상 최연소이자 첫 여성 총리에 올랐다. 그리스 경제 위기, 우크라이나 분쟁, 시리아 난민 사태, 코로나 펜더믹(pandemic)위기까지 국제적 현안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고 위기에 강한 리더쉽으로 평가받는다.      


  오늘날 이처럼 세계적 여성 정치가의 등장을 가능케 한 여성 참정권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유럽의 시민혁명을 시작으로 근대민주주의의 발전에 따라 선거권과 정치가로 입후보 할 수 있는 피선거권의 범위가 확대되어 왔으나 여성은 예외였다. 지금은 누구나 당연히 누리고 있는 선거권을 얻기 까지 체포와 구금 때론 죽음까지 불사하며 긴 세월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현존 독립국 중에 1893년 뉴질랜드가 세계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고, 1902년 호주, 1905년 핀란드, 1919년 네덜란드, 1920년 미국,  1928년에는 영국 여성에게 선거권이 주어졌다. 대한민국(1948)은 해방 이후 실시된 첫 선거부터 여성에게 선거권이 주어졌다. 유엔이 '여성 참정권 협약'을 채택한 것은 1952년의 일이다. 서방 국가 중에서는 스위스 여성들이 1971년에야 참정권을 획득했다. 가장 최근에는 2015년 여성의 선거 참여를 허용한 사우디아라비아가 있다. 독일의 경우는 1918년에야 여성투표가 가능했다. 노동하고 직업을 가질 권리, 고등교육을 받을 권리 등 오늘날 독일 여성들에게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권리들 대부분이 200여 년 전에는 다양한 형식의 투쟁과 도전, 수없이 반복되는 요청을 통해 인습과 편견의 벽을 뛰어넘고 쟁취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 지난한 투쟁에 선봉에 섰던 인물 중 조금은 낯설지만 기억해야 할 이름이 하나 있다. 마리 유카츠(Marie Juchacz)! 그는 보수적인 독일에서 여성의 참정권을 이뤄내고, 남자들만의 리그였던 정계에 진출해서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국회 연설대에 섰던 독일 1세대 여성정치가다. 평생을 노동자들을 위한 복지와 여성인권을 위해 일했던 그녀의 배경은 그리 화려 하지 않았다. 1879년 란데스베르크(Landsberg)에서 태어난 그녀는 초등학교에 다니다 일찍부터 1893년부터 가사도우미, 공장 노동자, 경비원으로 일했다. 1898년부터는 재봉사 견습을 시작했고 1903년 선생님이었던 베른하르트 유카츠(Bernhard Juchacz)와 결혼했다. 1906년 이혼하게 되었다. 당시 누구도 이혼녀에게 재단 일을 맡기려는 사람은 없었다.


 생계를 위해 더 기회가 많은 대도시로 이주하기로 결심하고 두 자녀와 여동생 뢸(Elisabeth Röhl)과 함께 베를린으로 향한다. 그 당시 여성들은 정치적인 행동을 금지 당했지만 두 자매는 저녁 독서 모임을 만들어 시민들의 빈곤을 완화하고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얻는 방법들에 대해 논의하고 토론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여성은 정당 활동을 할 수 없었다. 독일사회민주당(이하 사민당: SPD,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만은 예외였다. 1908년 그녀는 여동생과 함께 사민당에 입당하게 된다. 1913년에 쾰른에서 주로 아헨 지역의 섬유 노동자 조직을 담당했다. 1913년에서 1917년까지 사민당 전임 여성 비서관을 맡게 된다. 다른 여성들과 식품위원회로 봉사하고 미망인과 고아들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여성 근로자의 이익을 위한 평등저널 “Die Gleichheit”의 편집 관리를 담당하고, 중앙당 집행위원회에 선출되었다.



  그는 여성참정권 도입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1918년 11월12일 마침내 독일에서 여성의 보편적 선거권이 인정되었다. 이듬해 1919년 1월 19일 국회 선거에서 투표권이 있는 1,770만 명의 여성 중 82%가 투표에 참여했다. 마리 유카츠(Marie Juchacz)를 포함하여 300명의 여성이 출마했으며 37명이 선출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는 1919년 2월 19일 여성의원으로 독일 국회 연단에서 첫 연설을 하게 된다.      

"신사, 숙녀 여러분! 독일의 여성들이 의회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태도로 사람들과 대화 할 수 있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나는 이것을 독일의 오래된 편견을 극복한 혁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마리 주 카치 (Marie Juchacz) : 1919 년 2 월 19 일 바이마르 국회 연설에서

Marie Juchacz (1879-1956)


그는 첫 연설에서 역사적인 순간의 소회를 밝히고 정치인의 임무와 세계 대전 후 국가의 상황과 새로운 정부에 대한 비판을 언급했다. 독일 사회민주당(SPD)은 1863년 독일 노동자 협회와 1869년 8독일 사회민주노동당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두 조직은 1875년 사회주의 노동자당으로 통합하고, 1890년 독일사회민주당(독일어: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으로 당명을 개정하였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이며 세계 최초의 맑스주의 영향을 받는 좌파정당 중 하나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나치당 집권 전인 1932년까지 노동계급 정당의 색이 강했다. 사민당의 국회의원으로서 유카츠는 여성의 출산 및 출산 보호, 청소년 복지와 아동인권 등의 정책 마련을 위해 노력했다.


 그에게 있어 가장 큰 정치적 성과는 노동자 복지를 위해 1919년 사회민주당 내의 사회복지위원회로 출발한 ‘노동자복지협회(Arbeiterwohlfahrt, AWO)’의 설립이다. 1차 세계 대전 후 긴급히 도움이 필요한 전쟁 희생자, 미망인, 고아 및 실직자들을 위해 자선만이 아닌 연대와 참여를 통해 자립을 돕는 방식을 제안했다. 1933년 히틀러 재위 기간 폐쇄되었으나 2차 대전 이후 재건되어 현재까지 독일 최대의 사회복지 민간기구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AWO의 창립자이자 초대 회장을 지냈고, 전후 1949년에 다시 명예회장으로 돌아와 56년에 생을 마감한다.         


  AWO의 창립자로 독일 정치사에 남을 인물로 마리에 유카츠를 기리는 작품이 2017년 8월 18일 메링 플라츠(Mehringplatz)의 남동쪽에 있는 작은 공원에 세워졌다. 그 앞으로 기트쉬네슈트라세(Gitschiner Straße)앞으로 차량들이 지나가고 도로 위로 할레셔스토어( Hallesches Tor)역으로 지하철이 운행된다. 바쁜 주위 경관에 비해 공원이라야 변변한 벤치도 없고 목가적이지도 않으며 종종 홈리스들이 밤을 보내기도 하는 약간은 초라한 곳이다. 메링 플라츠 (Mehringplatz) 근처를  예전에 벨레 알리안스 플라츠(Belle Alliance Platz)라 불렸고 그 곳에 AWO의 첫 번째 사무실이 있었다. 이름 없는 이 작은 공원은 생전에 유카츠가 사무실에서 나와 산책을 즐기던 곳이었다. 그를 기억하는 기념비적 작품은 일생 동안 어려움 속에서도 차별과 인권의 사각 지대에 놓인 이들을 위해 일했던 그의 강인한 신념을 간결하면서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일단 녹갈색의 강철이란 재료가 그의 인성을 나타내기 적절했다. 이 작품을 만든 베를린 출신의 작가인 게르트 비너(Gerd Winner)는 평생 사회주의자로서 정치적인 모범을 보였고, 겸손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유카츠를 제대로 보여주는데 많은 고민을 했고 ‘기억과 알림’의 역할에 중점을 두었다. 작품은 양 옆의 날개 같은 2개의 면과 중간 지점의 판으로 삼각형을 이룬다. 작가는 단지 바닥 위에 조각을 세우는 것이 아닌 땅과 연결되어 있는 이미지를 원했다. 그래서 보통 조각품을 돋보이기 위한 지지대가 없이 직접 바닥에 고정시킨 형태를 하고 있다. 사선으로 접혀진 가운데 면은 유카츠의 얼굴이 음영기법으로 뚫려 있어 관객이 어느 각도에서 보던지 그의 존재감을 잘 부각시킨다. 대지와 직접 맞닿은 유카츠의 이미지 사이로 공원의 초록색 풀잎과 햇빛이 넘실대며 작품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길가를 등지고 정면으로 보았을 때 지상에서 최대 높이가 3.5미터에 달하는데 어찌 보면 작은 산의 형상이다. 얼굴 아래에는 그의 생몰년도가 써있고, 양 날개처럼 뻗친 부분에는 AWO 설립 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다섯 가지 가치를 나타내는 단어들이 새겨져 있다.


 연대(Solidarität),자유(Freiheit), 평등(Gleichheit), 정의(Gerechtigkeit) 그리고 관용(Toleranz) !     

  작품이 대중에게 공개되던 기념일 사민당 대표였던 마틴 슐츠(Martin Schulz)는 연대를 기반으로 한 사회에 대한 Juchacz의 공로에 경의를 표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이 항상 우리 행동의 초점이 되어야 하며 남녀가 법 앞에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늘 상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일 의회의 첫 여성의원 연설 후 거의 100년이 지났지만 남녀 평등에 대한 Juchacz의 우려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 시대에 맞섰던 많은 불의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연대, 자유, 평등, 정의 그리고 관용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위해 평생을 살았던 그의 삶은 도시의 작은 모퉁이에 서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연대의 자극을 던져 준다.            

   

이전 04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 민주주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