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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린 박하 Sep 24. 2023

황금색 무지개

관용과 다양성의 상징 무지개 비석

  

   “베를린은 가난하지만, 섹시하다(Berlin ist arm, aber sexy)”라는 한마디로 2003년 당시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던 베를린을 구한 클라우스 보베라이트(Klaus Wowereit) 시장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2001년 마흔여덟의 나이에 시장으로 당선된 후 2014년 퇴임 전까지 13년 동안 베를린 최장기 시장을 역임했다. 그는 선거 과정 중 TV 토론에서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밝히며, 이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시민들은 솔직하고 도전적인 보베라이트 시장을 열렬히 지지했다. 베를린은 LGBT(Lesbian, Gay, Bisexual and Transgender)들의 성지다. 그들 없는 베를린은 상상하기 힘들다.      



  매년 여름의 초입인 6월 말경에 베를린에서는 크리스토퍼 스트릿 데이(CSD) 행사가 열린다. CSD는 1969년 6월 27일 그리니치 빌리지 인근 뉴욕의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Christopher Street)에서 경찰의 동성애자 단속에 대항해 일어난 최초의 시위를 기념해 동성애자, 레즈비언, 양성애자, 트랜스젠더의 권리에 대한 시위성 축제다. 베를린에서만 통산 70만 명 이상의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거리 축제로 유럽 내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거리 행진 구간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은 놀란도르프플라츠(Nollendorfplatz)다. 베를린 쉐네벡(Schöneberg) 지구에 속하는 지역으로 현지인들에게는 “놀리(Nolli, Nolle)“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1864년  수데텐란트(Sudetenland)의 쿨름(Kulm)과 놀란도르프(Nollendorf) 근처에서 1813-1815년 프랑스와의 해방 전쟁 승리 후 참여한 장군과 전투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놀란도르프플라츠는 베를린의 여러 문화공동체 지역 키츠(kiez)들 중 이곳은 소위 무지개 키츠(Regenbogenkiez)로 불리며 성소수자들의 성지로 잘 알려져 있다.      


   1902년에 개통된 고가철도로 놀란도르프플라츠 지하철역은 U1부터 U4라인이 모두 통과하는 서베를린 지역의 교통의 주요 중심지이기도 한데 역사 위의 돔 모양이 좀 특이하다. 천장이 막혀있는 돔이 아니라 여섯 개의 철 구조물이 건축 완성 전의 비계 형태로 돔 모양을 하고 있다. 낮에는 그저 평범한 철심만 보이지만 해가 저물고 밤이 되면 돔에는 여섯 색깔 무지개 조명이 켜진다. 2013년 조명 아티스트 모리츠 베르멜스키르헤(Moritz Wermelskirch)에 의해 제작되었다. 돔에서 시선을 내려 역 출구의 오른쪽 벽면을 보면 붉은빛 화강암으로 된 역삼각형의 비석 “로자 빈켈(Rosa Winkel)”이 달려있다. 나치 시절 희생당한 동성애자 피해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추모비다.

 나치 시절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5만여 명 이상이 끌려갔다. 우생학에 미쳐있던 나치당은 동성애를 치료가 필요한 질병이자 전염병으로 간주하고 고된 노역과 폭력, 강제 거세, 생체실험 등의 악행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수감자들보다도 하등 한 대우를 받았고, 식별을 위해 역삼각형 마크를 달았다. 그 표식은 이제 희생자들을 상징하는 도형이 되었다. 1989년 놀란도르프 역의 로자빈켈은 독일 내에서 나치에 의한 동성애 추모비로는 최초다. 생각보다 최근이란 생각이 들겠지만 독일에서 동성애자에 대한 형사상 처벌 조항인 형법 175조가 사라진 것이 1994년이다. 2차 대전이 끝난 이후로 심지어 독일 통일 이후에도 그들은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었다.  1996년 관할 구인 쉐네벡(Schöneberg) 청사는 프라이드 위크 (Pride Week) 동안 관청 건물에 무지개 깃발을 단 최초의 지역구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동성애자들을 위한 호텔, 바(Bar), 카페, 피트니스, 병원, 의류점 등등 특화되어 있는 상가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민관이 협력해서 놀란도르프 지역의 문화를 지키고 존중하며 무지개 키츠(kiez)로 자리하고 있다.      



  놀렌도르프플라츠(Nollendorfplatz)는 이미 제국 후기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퀴어 문화와 밤 문화의 중심지였다. 유럽 문화의 골든 시기라 불렸던 1920년대 이곳에는 이미 수많은 레즈비언, 게이 바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했던 곳 중에 하나가 모츠 슈트라세(Motzstraße)에 있던 엘도라도(Eldorado)였다. 당시 베를린에 적어도 다섯 개의 엘도라도가 있었고 손꼽히는 2개의 트랜스젠더 바 중에 하나가 바로 여기였다. 마를레네 디트리히(Marlene Dietrich), 크로스토퍼 이셔우드(Christopher Isherwood), 오토 딕스(Otto Dix) 등 당대를 풍미하던 영화인, 작가, 예술가들이 만나 교류하고 영감을 나눈 아지트였다. 그들의 문학, 음악, 미술 작품을 통해 놀란도르프의 풍경과 이야기는 불멸의 추억으로 전해지고 있다. 1933년 나치 정권의 게이 문화 근절 정책으로 퇴폐 시설로 낙인찍히며 문을 닫게 되는 수모를 겪는다. 현재 이곳은 Romeo & Romeo라는 게이 카페가 들어서 있다. 1921년에 Kleiststrasse에 위치한 ‘클라이스트 카지노(Kleist Casino)’가 문을 열었는데 동성애자들을 위한 펍이자 유명인사들의 만남의 장소로 사랑받던 곳이었다. 이곳은 심지어 동성애 탄압의 광풍이 불었던 나치 시절 초반인 1936년까지도 살아남았다.     

      

  놀란도르프플라츠 역사에 나오면 가장 눈에 띄는 대형 건물이 하나 있다. 1906년에 지어질 당시 아르누보 스타일로 지어진 ‘신극장(Neue Schauspielhaus)’이었다. 극장 및 콘서트 홀로 사용되었던 이 건물은 1,2차 대전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아 오페라극장과 영화관 및 베를린 최대의 댄스 클럽으로 성업하다 경영악화로 문을 닫았다. 2019년부터 ""메트로 폴 (MetroPOL)"은 단발성 이벤트, 콘서트, 파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이 지역은 퀴어 문화의 메카로서 성소수자들 뿐만 아니라 예술가들과 일반 시민들에게 다양성이 존중받는 열린 문화로 사랑받고 있다.      


  해가 지고 나면 메트로 폴 위에 분홍빛 십자가 조명이 도드라지는데 그 건물과 역사 중간 작은 회차로 부분에 무언가 핑크색이 많이 들어간 4.5미터 높이의 금속 조형물을 하나 만날 수 있다. 윗부분은 핑크빛 삼각형으로 뾰족하고, 아래 기둥은 6개의 단면으로 나뉘어 각 면마다 무지개 색이 칠해져 있다. 처음 보면 육각형의 연필을 땅 위에 세워 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 조각은 '무지개 묘석(Die Regenbogenstele)'이란 제목으로 아티스트 살로메(Salomé, 본명: Wolfgang Ludwig Cihlarz, 1954~)의 작품이다. 제목에서 나타나듯 역시나 이곳 놀리(Nolli)의 정체성을 잘 나타내 주는 작품이다.


 외형상으로만 보면 일상의 사물을 확대해 낯선 물성을 마주하게 하는 클래스 올덴버그 류의 팝적인 면이 보이나 실제는 상징을 담은 개념적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 비석에는 두 개의 상징이 결합되어 있다. 첫 번 째는 연필의 끝부분처럼 보이는 윗 쪽의 단면, 핑크 트라이앵글(Rosa Winkel)이다. 이는 나치 시절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남성 동성애자를 구분해 탄압하기 위한 마크였다. 레즈비언과 집시 여성들은 검은색 역삼각형을, 동성애자이자 유대인일 경우는 분홍과 노랑의 삼각형을 겹친 별 모양 표식을 달게 했다. 억압과 강제의 마크는 현대에 들어 아픈 과거를 딛고선 그들의 인권과 자긍심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두 번째 상징은 무지개다. 무지개의 색깔은 LGBT (게이, 레즈비언, 양성애자, 트랜스젠더)로 불리는 성소수자들의 다양성을 나타낸다. 무지개를 사용한 깃발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78년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게이 퍼레이드에서 예술가 길버트 베이커가 주디 갈란드의 ‘오버 더 레인보우’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한 것으로 전해진다. 6색의 무지개는 각각 본연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빨강은 생명(Life), 주황은 치유(Healing), 노랑은 햇빛(Sunlight), 초록은 자연(Nature), 파랑은 조화(Harmony), 마지막으로 보라는 정신(Spirit)을 나타낸다. 6각의 단면에 무지개와 핑크 트라이앵글이 적절히 조화되어 연필의 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주변 상가협회의 모금과 주정부의 협력 아래 2000년 여름 퀴어 축제일에 맞추어 처음 공개되었다. 2000년 처음 선 보였을 당시에는 놀란도르프 역사를 나오자마자 2미터 정도 거리에 서있다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작가 살로메는 조각보다는 사실 회화로 더 알려져 있다. 살로메(Salomé, 본명 Wolfgang Ludwig Cihlarz)는 1954년 칼스루에(Karlsruhe)에서 태어났고 1972년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분단 시절 40세까지 서베를린에 주거 등록을 하면 병역면제가 되었기 때문에 당시 베를린은 많은 예술가들과 젊은이들로 넘쳐났다. 살로메는 74년부터 80년까지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회화를 공부하였고, 1977년 동료 예술가인 베른트 찜머(Bernd Zimmer), 헬무트 밋덴도르프(Helmut Middendorf), 라이너 페팅(Rainer Fetting)과 함께 모리츠 갤러리(Galerie am Moritzplatz)라는 자조 갤러리를 설립했다. 이들은 일명 ‘모리츠 보이스(Moritzboys)’라 불리며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를 휩쓸던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의 정적이고 금욕적인 예술에 반하여 작가의 주관적 감정을 ‘회화‘중심으로 표현하는 신표현주의가 대두되었다. 그들은 네오 표현주의 중에서도 ‘젊은 야수파(Junge Wilden)’로 분류되었다. 넓은 붓질과 강렬한 색채, 대상성(Gegenständlichkeit)을 특징으로 하며 성적 정체성, 다양한 형태의 사랑, 밤 문화, 현대인의 고독감을 기존의 회화 문법에서 벗어나 거칠면서도 화려한 그들의 회화는 당시 큰 인기를 누렸다. 젊은 야수파는 안젤름 키퍼와 임멘도르프의 신야수파(die neue Wilden)들과도 또 다른 궤적을 가지고 있다.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가진 베를린 출신과 이태리의 영향을 많이 받은 쾰른 중심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살로메는 젊은 야수파의 주요 멤버로서 활약했던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화가다. 그는 베를린이란 도시문화에 관심이 많았고 인물화, 동성애를 주제로 한 그림, 수영 시리즈 등이 유명하다. 펑크 음악 CD를 발표한 가수이기도 하다.      


“나는 예술이다(Ich bin Kunst)“_ 살로메     


자유와 다양성의 도시 베를린의 황금기를 지나 굴곡의 역사를 간직한 쉐네벡의 무지개 비석은 생긴 모습 그대로 다양한 색을 지닌 연필로 또 다른 역사를 쓰고 있다. 누구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과 피부색, 성 정체성 그 어떤 것으로든 차별받지 않으며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 누구나 예술이 되는 소중한 존재임을 온몸으로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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