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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린 박하 Sep 24. 2023

무력(武力)은 무력(無力)하다

치유의 황금 균열

  

  매년 유럽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11월 말부터 한 달간 대림절(Advent, 待臨節) 동안 크리스마스 마켓(독일어: Weihnachtsmarkt)이 열린다. 중세 시대 독일어권 지역에서 처음 유래한 바이나흐트마크트는 요즘엔 유럽 전역에서 열리고 있다. 크리스마스 시기에만 먹는 각종 먹거리와 기념품 상점, 놀이기구 시설과 공연, 화려한 트리 장식 등이 어우러져 춥고 긴 유럽의 겨울에 없어서는 안 될 큰 축제의 장이다. 가족들과 친구, 연인끼리 정향과 시나몬이 들어간 뜨거운 글뤼바인(Glühwein)을 홀짝이고 두툼한 렙쿠흔(Lebkuchen)과 흰 눈 같은 슈톨렌(Stollen)을 나눠 먹고 사랑하는 이를 위한 선물을 고르기 위해 크리스마스 마켓을 방문하는 것은 이 시기에만 누릴 수 있는 낭만이다. 거대한 쇼핑몰과 백화점에서 느낄 수 없는 크리스 마켓이 주는 분위기가 있다. 각 마켓마다 특징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크고 화려한 조명과 통나무 상점들로 마치 중세를 배경으로 한 동화나라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이맘때면 다른 도시의 아름답고 환상적인 마켓을 보러 여행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독일에서는 약 2,500개의 마켓이 열리고 매년 1억 5천만 명이 넘는 방문객이 찾을 정도로 경제적으로도 큰 시장이다. 베를린에서는 문서상으로 1530년에 최초로 성탄마켓이 열렸고 현재 80개가 넘는 마켓이 매년 열리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곳은 젠다멘마크(Gendarmenmarkt)를 꼽는다. 콘체르트하우스 베를린을 중심으로 프랑스 돔과 독일 돔이 나란히 서있어 중세 건축물이 둘러쌓어 그 자체로도 시간이 멈춘 듯 아름다운 곳인데 마켓이 서면 큰 트리와 뽀죡한 백색 지붕과 황금별 상점들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외에도 알렉산더플라츠(Alexanderplatz), 샬로텐부르크 성(Schloss Charlottenburg), 포츠다머 플라츠(Potsdamerplatz), 브라잇샤이트플라츠(Breitscheidplatz) 등이 유명하다. 이 중에서도 브라잇샤이트플라츠는 카이져 빌헬름 교회(Kaiser-Wilhelm-Gedächtniskirche)를 중심으로 근처 동물원(Zoologischer Garten) 역과 명품 쇼핑가인 쿠담(Kudamm) 거리가 위치해 있어 베를린에서 가장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을 자랑하는 곳이다. 베를린 국제영화제, 부활절 축제, 맥주 축제 등등 일 년 내내 행사가 끊이지 않고 늘 사람들로 붐비는 베를린에서 도 가장 인기 많은 관광명소 중에 하나다.      



 2016년 12월 19일 오후 8시경 카이져 빌헬름 교회 앞. 거리는 다가오는 성탄절을 얼마 앞두고 들뜬 기분으로 크리스마스 마켓을 즐기러 온 인파로 가득했다. 맞은편 비키니 건물의 화려한 조명과 신교회 앞에 선 대형 트리, 곳곳에 걸린 밝은 장식들 아래로 지나는 사람들로 불야성을 이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글뤼바인을 홀짝이며 추위를 녹이는 사람, 처음 들뜬 마음으로 베를린을 들른 여행객, 손을 맞잡고 나온 연인, 어린 자녀들과 외출 나온 가족들은 저마다 크리스마스의 정취를 흠뻑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다 시간이 멈춘 듯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마켓 바로 옆에 난 차도를 지나던 커다란 스카니아(Scania-R-450) 대형 트럭이 인도로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누군가 실수로 들어왔겠지 하는 예상과 다르게 운전자는 전조등도 켜지 않고 속도도 줄이지 않은 채 80여 미터를 그대로 돌진해 들어왔다. 무거운 철근을 실은 트럭은 그 자체로 살인 병기가 되어 길 가던 수많은 행인들을 잔인하게 밟고 지나갔다.


 평화롭던 거리는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고 곳곳에 널 부러진 시체들과 신음하는 부상자들이 속출했고 공포의 비명소리가 가득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수십 대의 경찰차와 응급차가 몰려왔고 사고 주변은 통제됐다. 베를린 주변 지역에서는 밤새도록 응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이날 트럭 갈취를 위해 미리 죽임을 당한 폴란드 운전사를 포함해 무고한 시민 12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부상당하는 큰 인명피해가 났다. 같은 해 7월 니스에서 일어났던 트럭 테러와 유사한 범행수법이었다. 범인은 튀니지 출신의 24세 아니스 암리(Anis Amri)였다. 그는 방화와 테러 모의 혐의로 이탈리아에서 난민 부적격자 판정을 받아 추방되었다 2015년 독일에 잠입했다. 독일서도 망명 신청이 거부되었고 신분증 위조, 절도, 마약 밀매 등의 경범죄 경력과 잠재적 테러리스트에 올라 있던 위험인물이었다. 범인은 현장에서 도주했다 나흘 뒤 12월 23일에서야 이탈리아 밀라노 근처에서 경찰과의 총격전 끝에 사살되었다.


 이 사건은 독일에서 발생한 테러 가운데 최대의 사상자 수를 기록했다. 게다가 독일의 심장부인 수도 베를린 한복판에서 기독교권 최대의 명절인 크리스마스를 불과 며칠 앞두고 벌어진 일이라 더 큰 공분을 샀다. 2015년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온 대량의 난민들을 가장 많이 수용했던 독일 정부 입장에서 연달아 터진 난민 관련 테러사건들이 악재로 작용했지만 베를린 테러사건은 차원이 다른 치명타였다. 사건 발생 이후 사전 예방 조치 미흡함, 안전 불감증, 범인 검거 과정, 피해자 보상, 사건 조사 과정 의혹 등 많은 비판의 소리들이 있었다. 사고가 난 이후에도 교회 앞 계단에는 언제나 희생자들을 기리는 꽃과 촛불이 놓여 있고  추모하는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정확히 일 년 뒤, 2017년 12월 19일. 카이저 빌헬름 교회 앞에서 테러 공격의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과 슈타인마이어(Frank-Walter Steinmeier) 대통령, 뮐러(Michael Müller) 베를린 시장 등 주요 정부 인사들과 유가족들, 시민들이 모였다.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은 ‘테러분자들이 우리의 단결과 협동이 분열되기를 원하고, 우리의 삶에 피해를 입히려 하며, 사람들을 환영하는 우리의 열린 자세를 가로막고, 문화와 종교 간 증오를 확산시키고 있다’는 경고와 피해자들의 위로를 말을 전했다. 아울러 테러 예방과 유가족 보상과 대처, 사후 대처 과정과 관련된 정부의 실책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이날 1주년 추모행사를 맞아 사건이 났던 자리에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기념 작품이 공개되었다. 사건 발생 후 1년이 지난 시점에서 독일 정부의 반성과 기념비 제작은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이례적(異例的)이고 빠른 대처 일수도 있다. 이날 처음 선을 보인 작품의 이름은 ‘황금 균열’(Goldener Riss). 신교회 서쪽 방향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계단을 내려 보도블록을 가로질러 대략 2~3센티 두께의 황금색 선이 17미터가량 뻗어 있고, 4칸의 화강암 계단에 12명 희생자들의 이름이 백색으로 새겨 있고 계단의 맨 위에는 다음의 문구가 쓰여 있다.  


 "2016년 12월 19일 크리스마스 시장에 대한 테러 공격의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모든 사람들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이 날 기념사에서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테러에 굴복하지 않고 같이 슬퍼하고 위로하는 것이 자유를 지키는 연대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뮐러 시장은 작품으로서의 균열은 공격으로 인한 상처이자 관용을 상징하며 우리 사회에 공포와 증오로 인해 갈라진 균열과 경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소회 했다.  참가한 시민들은 계단과 균열의 자리에 추모의 꽃다발과 촛불을 밝히며 희생자의 이름 하나하나를 읽으며 함께 그들을 기억했다. ‘인간은 더 이상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때만 죽는다(Der Mensch ist erst wirklich tot, wenn niemand mehr an ihn denkt)’는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말처럼 베를린은 테러의 희생자를 잊지 않을 것이다.      


 작품은 베를린 건축 회사 인 Merz Merz (mm +)가 디자인했다. Merz Merz는 건축가 한스 귄터 메르쯔(Hans-Günter Merz)가 2012년에 설립한 HG Merz의 자회사다. 슈투트가르트와 베를린에 기반을 둔 HG Merz는 베를린 슈타츠 오페라(Staatsoper), 구국립미술관(Alten Nationalgalerie)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물의 복원과 확장을 전문으로 한다. 학제 간 팀과 건축, 과학, 미술 및 디자인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제 네트워크를 통해 전 세계 주요 박물관 및 전시회를 디자인하고 미디어 커뮤니케이션과 브랜딩 분야도 지원하고 있다. HG Merz는 주로 독일어권 국가에서 프로젝트를 수행하지만 2012년 설립된 mm +는 국제 시장에서 내러티브의 힘이 있는 공간을 만드는데 중점을 둔 작업들을 해왔다.    

       

   테러사건 이후 사건 장소 관할 구역인 샬로텐부르크-빌머스도르프( Charlottenburg-Wilmersdorf) 지구 상원의원들과 지역사회 관계자, 피해자 가족 대표 및 각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주축이 되어 기념 작품을 위한 조언과 제안 사항을 바탕으로 공모전이 치러졌고 지금의 디자인이 만장일치로 선택되었다. 유족들은 희생자들의 이름이 한 블록 안에 모여 있지 않고 흩어져 있어서 개개인이 꽃과 양초를 놓는 추모의 공간을 따로 가질 수 있는 점에 만족해 했다. 심사위원단에 의하면 선정작은 조용한 디자인으로 바닥에 박힌 균열은 슈톨퍼슈타인처럼 작동하며 ‘시’적인 해결점으로 평가받았다. 균열은 눈에 보이는 흉터를 나타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치유될 것이며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일상생활에 스며들어 광장 전체의 사야를 방해하지 않는 것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Der Riss soll die Narbe symbolisieren, die sichtbar bleibt “

"균열은 눈에 보이는 흉터를 상징해야 한다 “     


  작품은 희생자들의 이름이 있는 계단과 도로를 가로지르는 ‘균열‘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희생자들의 이름이 쓰여 있는 계단은 옆에 원래 있던 계단 사이에 새로 제작해 놓였다. 미세한 모래, 석회석 분말과 백색 시멘트 등 특별한 제조법으로 만든 고성능 콘크리트를 사용해 표면의 기공이 닫혀 풍화 및 물에 대한 저항력이 높다. 그 위에 새겨진 문자가 매끄럽게 새겨지기 위해 방수제가 첨가되어 시간이 지나도 글자가 어두워지지 않고 험한 날씨에도 내구성이 좋게 유지될 수 있다. 사람들은 꽃과 양초로 희생자를 추모할 수 있고 계단에 멈추거나 앉아서 쉴 수도 있다. 거리 위를 지나는 보행자는 물론 스케이트 보드나 전자 스쿠터, 자전거를 타고 가다 보면 균열 부위에서 덜컹 요철을 느끼게 된다. 남겨진 상처는 잊힘 없이 일상생활의 일부로 이어지며 기억된다. 희생자의 유족과 부상자들의 삶은 2016년 12월 19일 "전"과 "후"로 나뉘어 있다. 베를린도 마찬가지다. 17미터에 이르는 균열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다. 기념비적 구조가 아닌 단순성을 지니며 도시의 전후와 시공간의 간격을 단단히 고정시킨다.      


작품의 책임자였던 프란켄베르크(Pablo von Frankenberg)는 Berliner Morgenpost와의 인터뷰에서 작품 제작 전반에 대한 소감과 의의에 대해 설명했다.      

도시의 상처에 대한 아이디어를 어떻게 찾았나?

:그러한 테러 공격 발생한 후 1년 만에 기념비적인 장소를 만드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많은 것은 여전히 열려 있다. 유가족들과 부상자들은 슬픔과 상실, 부상의 후유증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관련 수사도 계속되고 있고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우리는 사건과 장소에 대한 태도를 스스로 발견해야 했다. 우리의 디자인이 이 사건을 보는 방법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우리가 하는 모든 것, 모든 말, 사고가 여전히 과정의 일부라는 것을 느꼈다.    

 

"균열"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떻게 생겼나?

:우선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인 기억과 양초, 꽃을 두는 추모가 계속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작품은 폐쇄된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 있는 것이어야 했다. 우리는 가능한 한 일상생활에서 삶을 가능하게 하고 싶었다. 이 장소는 항상 이벤트와 행사들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통행하는 곳이다. 여기에 무언가 흐름을 차단하고 싶지 않았고 해서 포장된 도로에 상징적 균열을 일으키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균열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나?

:그것은 2016년 12월 19일의 희생자와 유가족, 상처 입은 이들과 현 사회에서 발생하는 분열을 나타낸다. 테러는 우리 사회의 개방성과 관용에 도전했다. 우리는이 균열을 나타내고 싶었고 그것을 치유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치유는 잊거나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는 금빛이 나는 청동 합금으로 균열을 메꾸고 막았다. 갈라진 틈은 상처이자 동시에 치유를 의미한다.     

기념 작품은 정확히 어떤 모습인가?

17m 길이의 균열은 작년부터 양초와 꽃이 모인 부다페스트 거리(Budapester Straße) 옆의 기념교회(Gedächtniskirche)에서 시작된다. 계단을 따라 화강암 슬라브로 이동해서 거리로 쏟아져 내린다. 재료는 청동 합금이다.     

사람들이 균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Breitscheidplatz는 매우 활기 넘칩니다. 균열은 이 삶을 반영할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청동 합금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접촉이 많으면 많을수록 연마되어 표면에 광택이 난다. 예를 들어, 그것을 걷는 사람들, 스위퍼 및 광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해. 즉, 장소를 오가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 많이 기억될 수 있다. 유가족들은 작품 디자인 과정에 밀접하게 관여했다. 그들의 희망사항을 개진했고 최종 선택과정의 배심원의 일원이기도 했다.     

테러를 다루는 법?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고 그것과 함께 살아야 한다. 우리 사회는 그것을 견딜 만큼 강해야 한다. 우리는 그래서 바닥이 그런 의지를 표징 하기 위한 적절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눈에 잘 띄어야 한다. 베를린의 험한 날씨에 노출되고 행인들의 왕래 속에서 금속은 더 연마되고 햇빛을 받아 갈수록 더 빛이 나게 될 것이다. 선의 방향이 직선의 한 방향에서 다른 방향으로 균열이 가있다. 그것은 주변 광장의 일상생활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     

디자인에 대한 비판이 있습니까?

: 균열이 간 위치에 관한 것과 계단 위 비문 내용에 관한 비판이 있다. 균열이 나 있는 경로는 사건 당일 트럭의 진행 루트를 따라 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상징이지 사건 현장 추적장치가 아니다. 그리고 비문의 구절에 ‘이슬람교도’라는 단어가 언급되지 않은 점을 지적하는데 그것은 기억의 존엄성과 희생자와도 관련이 없다. 어느 테러 현장의 기념비에도 가해자의 정보는 넣지 않는다.      

 

 황금 균열이란 작품이 놓이게 된 데는 테러와 난민사태라는 유럽의 공통적 문제와 베를린의 특수성이 배경이 된다. 사건이 나기 이틀 전 바로 그 크리스마스 마켓을 방문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집과 사고 현장이 그리 멀지 않은 탓에 그날 밤은 밤새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놀란 가슴을 진정하기가 어려웠다. 그 자리에서 사고를 직접 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 피해자가 될 수 있었겠구나 하는 공포감이 이후에도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하물며 피해자 가족과 부상자들은 평생을 상상도 못 할 트라우마를 겪게 될 것이다. 이런 끔찍한 테러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고 난민사태와는 어떤 관계인지 올바로 직시할 필요가 있다. 2015년 시리아 내전, 아랍권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정치적, 경제적 불안으로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유럽으로 난민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는 그 해 100만 명이 넘는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며 메르켈은 `난민의 무터(어머니)`로 불렸다. 그러나 '무제한'의 이민 정책은 사회 혼란으로 이어졌다.  난민을 위한 사회 통합 정책의 불충분과 잇따른 난민 발 테러 사건 등으로 반(反) 난민 정서를 등에 업고 AfD 같은 극우정당이 인기를 얻으며 난민 포용책은 인도적 지지와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다.


 2016년 1월 쾰른 집단 성폭행 사건은 국민적 분노를 일으켰고 베를린 트럭 테러는 크리스마스를 겨냥한 종교적 의미의 테러라는데 더 큰 비난을 받았다. ‘테러’는 정치, 종교, 사상적 목적을 위해 폭력을 수단으로 민간인이나 비무장 개인, 단체, 국가를 상대로 공포를 조장하는 행위를 말한다. 공포를 조장하여 목적을 달성하는 테러의 대부분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으로 일반화시킬 수는 없다. 사회질서와 윤리를 무너뜨리고 안정과 지속을 방해하는 모든 행위가 공포로 발현될 수 있다고 할 때 테러의 범위는 보다 넓어진다. 그럼에도 이슬람은 잠정적 테러리스트라는 선입견이 많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과 서구 언론에서의 기독교는 평화와 자유, 이슬람은 폭력과 억압, 악마라는 이분법적 보도 관행에 대부분 기인한다.

 

 세계 인구 65억 중 15억 명이 이슬람을 믿는다.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세계적인 종교다. 테러범의 상당수가 무슬림이지만 무슬림 전체가 테러리스트인 것은 아니다. 기독교에도 수많은 종파와 이단이 존재하듯 이슬람에서도 소수 극단적 근본주의 무슬림이 중심이 된 IS 같은 단체들이 생겨났고 대부분의 유럽 이슬람교도들 조차 이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전 무슬림 제국은 지역 내 그리스도인의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고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이 공존하며 지냈다. 수세기 걸쳐 종교라는 이름으로 십자군과 마녀사냥으로 수많은 무고한 이들을 고문하고 살해한 그리스도교 보다 어떤 면에선 관용적이었다.


테러, 난민, 이슬람은 연결점은 가질지언정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흔히 유럽의 난민사태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는 이들이 흔히 내세우는 역사적 예시가 로마제국의 멸망이 게르만족의 이동을 막지 못해 생겼다는 것이다. 몰려드는 난민들을 막지 못하면 유럽도 로마처럼 얼마 가지 않아 무너질 거라는 논리다. 이것은 혐오의 정당화를 위한 편협하고 단편적인 사관에 불과하다. 천년 제국 로마가 무너진 것은 종교, 정치, 경제, 사회 걸친 복합적인 이유에서였다. 그 무식한 게르만족의 중심에 독일이 있으며 이들은 지금 유럽연합이라는 제국을 이뤘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의 전제에 훈족의 침략이 있었으나 로마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유럽의 입장은 다르다. 이전 유럽 제국들은 식민지배로 부를 축적했고 중동문제에 개입해 내전과 전쟁을 일으킨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승자박의 결과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이주를 반복해왔고 난민의 배경을 갖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다. 경제적, 사회적 이유로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인류는 이동해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난민사태로 무슬림이 유입되면 유럽 문화가 훼손된다는 주장은 시대착오이며 문화 근시안 적이다. 많은 이민자들이 선호하는 국가인 독일만 보더라도 역사 속에서 슬라브족, 켈트족, 게르만족들이 섞여서 유대인, 후게노트, 그리스, 보헤미안 등의 외래문화 영향을 받으며 성장해 온 혼합 민족이다. 단일 민족이고 우월하다는 인종차별은 허상이다. 메르켈 총리는 여러 차례 공식석상에서 "독일의 400만 명 이슬람교도들은 독일에 속한다. 그들의 종교 역시 독일에 속한다, 우리는 가능한 긍정적으로 종교들이 공존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테러와 난민 문제는 강력한 대테러 정책과, 난민 억제와 같은 원론 처방에 앞서 반 이슬람 감정 완화, 불평등과 차별 해소 등 사회, 문화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증오와 혐오는 문명 간의 충돌만 낳는다. 난민 사태는 이미 막을 수 없는 기류이며 유럽은 인류학적 대 전환기에 놓여있다. 기억할 것은 배척과 쇄국(鎖國)으로 번영한 나라는 없다는 사실이다.    

  

 테러가 일어난 곳의 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 (Kaiser-Wilhelm-Gedächtniskirche)는 카이저 빌헬름 2세 (Kaiser Wilhelm II)가 독일제국의 통일을 이뤘던 그의 할아버지 빌헬름 1세를 기리기 위해 세운 개신교 교회다. 신로마네스크(Neo-Romanesque) 양식으로 1895년 사이에 지어졌다. 높이 113미터에 2천 여명의 신도를 한 번에 수용할 만큼 큰 규모로 화려한 모자이크와 벽화로 장식된 아름다운 교회였다. 그러나 1943년 2차 세계대전 공습으로 처참히 파손되었고 그중 첨탑 부분만 남겨 전쟁의 참혹함을 상기시키는 기념관이 되었다. 맞은편에는 1963년에 건축가 에곤 아이어 만 (Egon Eiermann)에 의해 모더니즘 스타일의 신교회가 지어졌다. 외부는 시멘트로 된 수수한 팔각형 건물이나 내부는 푸른색을 중심으로 루비 레드, 에메랄드 빛이 어우러진 21,292개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신비로운 반전 매력을 가졌다. 베를린 서부의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로 베를린 사람들은 흉한 구교회를 베를린의 충치( )라고도 부른다. 카이저 빌헬름 구교회에 들어서면 폭격으로 그림이 갈라지고 일부일지라도 황금빛 가득한 정교하고 화려한 장식벽화는 당시 교회가 얼마나 웅장하고 아름다웠는지는 짐작하게 한다. 천정에 알파와 오메가를 사이에 둔 예수와 대척점인 바닥에 아우라로 빛나는 성인 한 명의 대형 모자이크를 발견할 수 있다. 커다란 창으로 용을 퇴치하는 인물은 바로 성 게오르그(Georg Heiliger)다.      



  영어로는 세인트 조지(Saint George)로 알려져 있는 그는 3세기경 카파도키아(현재 터키의 일부)의 한 그리스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 아래서 군 장교로 복무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역사상 가장 심한 기독교 박해로 유명한 왕이었다. 제우스 신전과 이교도를 섬기고 개종하라는 황제의 명을 어기고 끝까지 기독교 신앙을 지킨 게오르그는 심한 고문 끝에 순교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Constantinus Magna)가 밀라노 칙령으로 313년 기독교를 공인한 후 그는 많은 곳에서 그들의 수호성인으로 추대되었다. 군인의 수호성인이자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캐나다, 영국, 독일, 포르투갈, 불가리아, 슬로베니아, 그리스, 터키, 러시아 내의 도시들과 보이스카웃의 수호성인으로서 기독교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인이다. 게오르그와 관련해서는 13세기 ‘황금 전설(Legenda Aurea)’에 나오는 전설로 더 유명하다. 한 마을에 용에게 제물이 될 위기에 있는 공주를 구해주고 용을 제거 한 뒤 모든 마을 사람들이 세례를 받게 하고 왕에게 받은 대가도 시민들에게 모두 돌려주고 떠났다는 내용이다. 라파엘로(Raffael), 루벤스(Peter Paul Rubens), 뒤러(Albrecht Dürer)등 많은 화가들의 이 소재를 그림으로 다뤘다.


 기독교 공인 이후 선교와 교세 확장을 빌미로 귀족과 교회들의 권력을 위해 봉사하는 직업 전사들의 필요로 인해 ‘십자군’이 등장하게 된다. 10세기 이전까지 순교자의 이미지가 강했던 게오르그는 제국주의의 정복과 탐욕을 채우고 십자군의 폭력을 정당화해주는 상징으로 포장하기에 더없이 좋은 소재였다. 신화에 등장하는 ‘용’은 적그리스도의 의미로 기독교 이외의 모든 세계로 윤색되었다. 게오르그는 기독교권에서만 인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살았던 흑해 연안은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기독교인들은 그곳을 세인트 조지의 발상지로, 유대인들은 선지자 엘리아의 매장지로, 지역 무슬림들은 전설적인 세인트 알 카더(al-Khader)의 고향으로 간주한다. 특히 팔레스타인들에게는 이스라엘의 억압에 저항하는 인물이자 수호자이기도 하다. 그는 아랍 출신이었고, 전설의 용이 살던 마을은 레바논의 베이루트로 정통 이슬람 배경을 가졌다. 이스라엘의 시온주의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 내 극우 기독교 단체들은 자신들을 성조지의 후예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그가 오늘 지중해를 건너다 빠졌다면 골치 아픈 난민으로 몰아 구출조차 않았을 것이다.


 성조지의 신화는 현재도 진행형이다. 그가 공격했던 용은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에게는 그리스도인이었고, 광폭의 십자군에게는 무슬림과 이슬람이었다. 지금의 IS와 같은 무장테러집단은 무고한 이들을 ‘용‘으로 만들어 버렸다. 게오르그가 오랜 기간 지역과 종교를 뛰어넘어 사랑받았던 것은 출신 배경과 지위가 아닌 불의에 굴하지 않는 신념을 가졌고, 약자를 배려할 줄 아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Saint George Killing the Dragon, woodcut by Albrecht Dürer (1501/4)


 베를린 한복판에 무너진 교회의 게오르그는 그래서 좀 더 특별하다. 아픈 과거와 상처를 누구보다 많이 간직한 베를린은 시련으로 굳은살이 박인 도시다. 2번의 세계 대전으로 처참히 부서진 가운데 다시 일어섰고, 기나긴 냉전시절 장벽 아래 어둠의 날들을 견디었고 마침내 통일을 이루었다.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뼛속 깊이 알고 있다. 도시 곳곳에 저지른 과오를 숨김없이 드러내어 반성하고, 흉한 상처는 그대로 남겨 견지의 교훈으로 삼는다. 베를린은 테러로 무너질 도시가 아니다. 전쟁의 상흔에 테러의 고통까지 겪었지만 혐오와 공포라는 ‘용’으로부터 지켜줄 든든한 수호천사가 있다. 찢긴 상처는 이내 아물고 황금빛으로 반짝일 것이다. 그리고 잊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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