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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린 박하 Dec 15. 2022

열린 눈으로, 깨어 있으라!

Robert Koch-Institut : mit offenen Augen

 

 


  2020년 3월 13일 한국의 좀비물 ‘킹덤(Kingdom) 시즌2’가 넷플릭스(Netflix)를 통해 공개되었다. 시즌1에 이어 탄탄한 시나리오와 수려한 한국의 산수를 담은 뛰어난 영상미, 섬세한 좀비들의 움직임과 주연 배우들의 열연으로 세계적 인기를 누렸다. 조선 시대 왕권을 탐하는 조 씨 일가의 권력욕으로 생사역(生死疫: 살지도 죽지도 않는 역병)이 창궐하고 이를 막으려는 왕세자의 고군분투가 주된 내용이다. 킹덤 2 개봉과 같은 시기 WHO(세계 보건기구)는 3월 11월 코로나19(COVID-19)로 인한  팬더믹(pandemic)을 선언했다. 킹덤이 전염병을 소재로 하는 터라 3차 대전을 방불케 할 정도의 코로나 폐해로 온 지구가 신음하는 현 세태를 잘 반영해 시청자들로부터 더욱 공감을 얻었다. 극 중 순식간에 감염이 확산되는 것과 발원 지역을 봉쇄하는 것, 정부의 무능한 대처 등등 마치 코로나 사태를 예견하고 만든 것처럼 많은 부분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흡사했다. 국민을 진정으로 위하는 정치는 무엇이고 좋은 리더는 어떠해야 하는지 많은 사유(思惟)를 하게 하는 수작(秀作)이었다.


코비드 사태 초반에 연일 보도되는 엄청난 감염자수와 사망자 숫자는 누군가의 가족이고 사랑하는 사람일거라는 안타까움보다 하나의 통계로만 인식되어 공포감을 더했다. 사람들은 그 동안 누렸던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이었는지 뼈져리게 느끼게 되었다. COVID-19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드라마가 다음 시즌을 예고하듯 현실에서도 바이러스와 인류와의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바이러스는 숙주에서만 생존하는 무생물이다. 인간은 치료제를 개발할 것이고 바이러스는 살아남으려고 계속 변이(變異) 할 것이다.

 

 독일은 COVID-19 대응에 있어서 초기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유럽 내 다른 국가들에 비해 비교적 잘 대처해 왔다. 독일 정부의 엄격한 대처도 주효했지만 무엇보다 전문적으로 질병관리를 주도했던 로베르트 코흐 연구소(이하 RKI:Robert Koch Institute)의 공이 컸다. 로베르트 코흐 연구소 (RKI)는 1891년에서 설립된 생명 의학 분야에서 독일 정부의 중앙 과학 기관이며 독일의 공중보건 보호를 위한 가장 중요한 기관 중 하나다. 코로나로 인해 독일 질병관리본부로서 한층 위상이 높아진 RKI 연구소 본관 건물 앞에 주목할 만한 예술 작품 하나가 서있다.     

      

  로베르트 코흐연구소(Robert Koch-Institut, RKI)의 주인공인 로베르트 코흐(Robert Heinrich Hermann Koch, 1843~1910)는 현대 세균학의 토대를 세운 독일의 의사이자 미생물학자로 세균학(細菌學, bacteriology)의 아버지라 불린다. 결핵, 콜레라 탄저병의 특정한 원인 인자를 발견하고 전염병의 개념에 대한 실험적 증거를 제공하였다. 결핵균(Mycobacterium tuberculosis)의 발견과 세균학 창시의 공로로 190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19세기에는 결핵, 콜레라 등의 감염으로 인한 질병으로 독일에서만 매년 수십만 명이 사망했다. 그는 이런 종류의 질병이 박테리아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개별 병원체와 감염경로를 파악하여 치료와 예방의 길을 열었다. 미생물학 분야에서 여러 기본적인 실험 기술을 만들어 개선하였고 전염병 방지를 위한 공중보건과 위생 관련한 중요한 발견들을 하였다.


Robert Koch (1843-1910)


코흐가 애초 영향을 받았던 프랑스의 파스퇴르(Louis Pasteur)와는 이후 미생물학 분야에서 독일과 프랑스 두 국가의 자존심을 건 학문적 라이벌이 되었다. 의사와 화학자로서 둘 다 애국심도 남달랐는데 이론에 대한 이견과 치료제 개발로 부딪히기도 하고, 각자의 연구 분야에서 본인은 물론 제자 세대에 이르기까지 선의의 경쟁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코흐는 쾨팅겐대학교(Georg-August-Universität Göttingen)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이후 심한 근시(近視)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당시 군의관으로 자원입대를 했다. 재대 후 볼스타인(Wollstein)이라는 작은 지역 보건의(保健醫)로 복무하면서 열악한 환경에서도 질병과 세균에 관 연구 성과를 냈고 이후 베를린을 무대로 더욱 연구에 매진하며 세균학과 공중보건에 큰 업적을 남겼다.


독일인으로서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의사 코흐의 일생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치 정권에 의해 정치선전과 나치 우생학(Nazi eugenics)의 도구로 철저히 이용당하게 된다. 1939년 9월 영화 ‘로버트 코흐, 죽음의 퇴치자(Robert Koch-der Bekämpfer des Todes)가 베를린 팔라스트(Palast am Zoo)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제3제국에서 나치 선전 영화계의 스타 감독이었던 한스 슈타인호프(Hans Steinhoff)가 제작을 맡았다. 영화는 결핵에 걸려 고생하는 아이들과 부모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며 질병을 퇴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의사 코흐의 모습을 민족의 영웅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의 일생에 영향을 미쳤던 유대인 지인들은 물론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코흐의 순수한 학문적 업적은 나치가 주장하는 아리아인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정권의 불합리성과 부족함을 채우고 정당화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의 소재로 도색(塗色)되었다.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수상이 물러난 이듬해인 1891년 베를린에 프로이센전염병연구소(Preußische Institut für Infektionskrankheiten)가 최초로 문을 열었고 코흐는 이곳의 소장으로 1904년까지 근무했다. 이는 현재 로베르트 코흐연구소(Robert Koch Institute, 이하 RKI)의 전신으로 결핵균 발견 30주년이 되던 1912년 코흐 박사의 공로를 기려 현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RKI는 병원성 세균 및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관리, 예방 등 독일의 감염병과 공중 보건에 대한 전반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국가기관이다. 독일 국민 건강을 위한 감시, 상담업무는 물론 유럽 국가들과 공조하는 글로벌한 연구기관이다. 한국의 질병관리본부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기관으로 2020년 코로나 정국에서 독일 정부와 함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RKI는 베를린에 본사를 두고 있고, 450명의 과학자와 전문가들을 포함해 약 1,100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독일의 공중보건기관으로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고 향상하는 것을 미션으로 하고 있다.


이런 기관 미션이 무색하게도 1933년에서 1945년 사이에 RKI는 국가 사회주의 보건정책에 협조하며 양심을 저버린 반인륜적 범죄에 가담한 흑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연구소는 나치 정권을 위한 각종 연구와 자문 활동에 적극 협조했다. 인사 조직에서도 변화가 있었는데 모든 유대인 출신 직원들이 해고되었다. 적어도 12명의 과학자들이 연구를 중단해야 했고 실직과 계속되는 차별로 대부분 타국으로 이주했다. 1935년 RKI는 제국 보건 사무소(Reich Health Office) 아래에 배치되었고 모든 인사권은 국가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나치당의 정책을 지지했고 나치 정권이 제공 한 연구 기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그들은 의료 기관과 강제 수용소에서 인간에게 치명적인 상해를 가할 수 있는 실험들을 자행했고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2차 대전 당시 RKI 외에도 독일 최고의 기초과학연구단체인 막스플랑크 과학진흥협회(Max-Planck-Gesellschaft)의 전신 카이저빌헬름협회(Kaiser-Wilhelm-Gesellschaft)도 나치 생체실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죽음의 천사로 악명 높았던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의 스승인 오트마 프라이헤르 폰 베르슈어(Otmar Freiherr von Verschuer) 연구소장 주도로 민족 고유의 질병 퇴치를 위한 단백질을 찾는다며 수많은 쌍둥이들의 혈액을 이용했다. 그 외에도 뇌과학연구소(Kaiser-Wilhelm-Institut für Hirnforschung), 뮌헨의 독일 정신의학연구소(Institut für Psychiatrie)에서는 정신 장애인들과 뇌손상 환자들의 뇌를 수집하기 위해 대량학살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나치는 우생학(Medizin im Nationalsozialismus)을 통한 인종 개량에 집착했다. 범죄자, 반체제 인사, 동성애, 병약자 및 장애인 수십만 명이 가치 없는 생명으로 간주되어 불임화(不姙化) 되었고 안락사당했다. 나치 우생학 정책을 가장 빠르고 열렬하게 지지한 집단이 당시 독일 의료인들이었다. 그들은 ‘국가사회주의(나치주의)’가 응용 생물학의 선두주자라 칭송했다. 히틀러도 변호사, 엔지니어, 건축가 없이는 일할 수 있어도 의사들 없이는 불가능하다며 그들을 치켜세웠고 이전보다 더 높은 대우를 해주었다. 나치 생체실험에 참여했던 의사들의 악행을 고발한 미셸 시메스(Michel Cymes)의 ‘나쁜 의사들(Hippocrate aux Enfers, 2015)‘에 보면 그들이 단지 악행을 강요당해 정신 이상이 온 시대의 피해자가 아니라 명문대를 졸업했고 우수한 두뇌를 가졌으며 정신병 검사에서도 정상 진단을 받은 멀쩡한 수재들이었다고 한다. 학문의 성지인 대학부터 RKI 같은 연구소들은 나치와 더불어 인면수심의 공범들이었고 이들이 벌인 끔찍한 실험들은 현대 과학에 공헌한 바 없으며 고통과 죽음만 몰고 왔다고 결론짓는다. 그곳에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는 존재하지 않았다.     


 “첨단 과학과 이데올로기가 결합되면,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세계대전 당시 독일 포로수용소에서의 인체실험은 전쟁을 위한 것으로 감압(減壓) 실험, 냉동 실험, 말라리아 시험, 이페릿가스(Yperite Gas, 염소가스) 실험, 술폰 아미드(Sulfonamides) 실험, 뼈 이식실험, 바닷물 실험, 전염병 및 각종 질병 실험, 불임 시술, 독극물 실험, 안락사 등 본인들의 의학 지식과 기술을 얻기 위해 포로들을 마구잡이로 이용하였다. 실험이 끝나고 희생자들은 죽거나 영원한 장애,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1947년 2차 대전에 의료인들이 저질렀던 범죄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통해 과학자의 연구 윤리 기준인 뉘른베르크 강령(Nuremberg Code, 독일어 Nürnberger Kodex)이 만들어졌다. 의료 및 심리학적 생체 실험의 준비와 진행에 있어서 오늘날 쓰이는 핵심적인 윤리 법칙이다. 그럼에도 전쟁이 끝난 후 이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과학자와 의사는 소수에 불과하다. 이들은 신분을 위장해 해외로 도주하거나 나치 과학자들을 비밀리에 모집했던 미국으로 건너가 법의 심판을 피했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RKI의 자금과 제안으로 샤리테(Charité) 병원의 의학사 연구소의 역사가들은 과거 나치 집권 하에서 RKI가 참여했던 의료 범죄를 광범위하게 조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RKI의 과학, 정치 및 과학 정책 활동을 가능한 한 완벽하게 제도적 편견 없이 연구한 결과는 "국가사회주의 로버트 코흐 연구소"라는 서적으로 출판되었다. RKI의 나치 치하 제도적 참여는 다방면에 걸쳐 있다.


첫째, 베를린 달렘(Dahlem)에 있는 제국 보건 사무소(Reich Health Office)와 연구소 역할로 둘째, 독일 제국 전역의 위생 기관 및 보건소에 대한 공인된 품질 관리 전문가 감독으로서 셋째, 도시 보건 및 대학 교육에 참여한 국가 교육 및 연구 기관으로서 넷째, 군사 및 산업 간의 긴밀한 협력의 형태로, 군대 및 개별 대학 기관과의 관계가 다루어졌다. 연구소는 이후로도 이 주제에 대한 토론을 계속해오고 있다. 독일 최고의 두뇌들이 모인 엘리트 과학기관으로서 나치 정부의 정책에 적극 동조하고 협조했던 사실은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수많은 비인간적 실험으로 무고한 생명들을 유린했었던 과거사를 낱낱이 들추어 조사하고 과학자로서 지녀야 할 윤리와 휴머니즘을 저버린데 대한 자아비판과 반성을 연구와 세미나 등을 통해 계속해오고 있다.      


 이에 연장선에서 2011년에는 나치 시절 반인륜적 실험의 희생자들과, 차별받았던 유대인 연구자들을 기억하는 공공미술작품을 설치했다. 책을 출판하는 것 이상으로 오늘날의 RKI의 연구원들이 역사에서 배우고 자신과 연구 프로젝트를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진행하기를 원하는 다짐을 예술로 구현해 시각화하기 위해 미술 공모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미래에 독일 기억 문화의 중요한 업적으로서 해방의 에너지와 자기비판적 관점이 손실되지 않기를 희망했다. 과거의 기관의 모순되고 불합리한 문제들을 직시하고 RKI의 과거, 현재, 미래의 비전을 담은 작품으로 하이케 폰비츠(Heike Ponwitz)의 ‘mit offenen Augen’이 최종 선정되었다. 작품 제목 인 ‘열린 눈으로(mit offenen Augen)’는 ‘경고와 의무‘를 뜻한다. 폰비츠(Heike Ponwitz)는 베를린 예술대학 출신으로 1986년부터 조각, 설치, 사진 및 그림을 포함한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작가로 활동해 왔다. 그는 특정 장소에 담긴 역사와 의미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감각 있는 작품들을 해왔다. 1986년부터 2001년까지 베를린 미술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했고 국내외 수많은 수상경력을 가지고 있다. 이번 작품은 일관되고 지적이며 섬세하게 주제를 다룬 점이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야외 작품의 경우 프로이센을 대표하는 붉은 벽돌로 된 연구소 건축물을 가리지 않는 가시성 영역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작품은 크게 RKI 건물 입구의 뜰에 설치작품과 내부 로비 벽에 걸린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구소 현관에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의 흉상을 중심으로 양쪽 벽 위에 아크릴 유리로 된 거울에 수많은 이들의 눈 사진이 이어져 있다. 이 눈은 피해자나 가해자의 것도 아니고 어느 특정 인종이나 나라를 지칭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범세계적으로 어디에나 존재하는 일종의 모니터링 역할을 하는 감시의 눈이다. 나타난 눈들은 현명하게 보이거나 불만에 차있거나 저마다 미묘하게 다른 느낌을 준다. 로비의 두 기둥은 무광택의 검정 바탕에 흰색 활자로 아돌프 무슈크(Adolf Muschg)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검은색 기둥은 연구소의 어두운 과거를 상징한다. 연구소 내부 작품은 관람에 제약이 있기에 여기서는 누구나 쉽게 접근 가능한 연구소 건물 외부 작품 위주로 보려고 한다.      


열린 눈으로 (mit offenen Augen)

"우리는 희생자들에게 씻을 수없는 빚을 졌다, 경직됨 없이 눈으로 직시해야 한다. “

(Wir sind den Opfern das Unerträgliche schuldig, uns selber ins Auge zu schauen, ohne zu erstarren. “ Adolf Muschg) _ 아돌프 무슈크(Adolf Muschg)


1994년 스위스 작가 아돌프 무슈크 (Adolf Muschg)가 게오르그 뷔흐너 (Georg-Büchner-Preis) 수상 소감이었던 말이 이 작품 개념의 출발점이었다.     

  RKI 정문 앞에 길이 8미터 폭 1.8미터의 직사각형 모양의 흰 장미가 가득 심어진 바닥 위에 3개의 유리 패널이 1미터 간격으로 세워져 있다. 마치 도미노 놀이의 판처럼 약해 보이기도 하지만 각각의 유리 패널은 2.5미터 폭 1.4미터 크기로 지하에는 직경 55센티미터의 지지대가 안전하게 받쳐주고 있다. 3장의 패널은 각각 연구소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한다. 정면에서 보면 Robert Koch Institute 기관명과  mit offenen Augen 작품 제목이 새겨진 첫판과 중간에 원형의 흑백 사진, 그리고 맨 뒤에 흰색의 텍스트가 담긴 판들이 투명한 유리를 통과하면서 3장의 레이어를 가진 한 장의 완성된 화면으로 보인다.


첫 번째 패널의 제목은 현재의 RKI의 모습으로 ‘열린 눈으로’ 깨어있는 지성을 가진 과학기관으로서 수행해야 하는 중요한 비전을 나타낸다. 두 번째는 둥근 프레임에 수많은 군중이 모여 있는 사진이 보인다. 원형은 연구에 주로 쓰이는 현미경을 뜻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둥그런 모양은 세계 인류 전체를 담은 것이다. 마지막 판은 나머지 둘과 다르게 방향이 반대로 돌려져 있는데 과거 나치 시대에 협조했던 연구소의 역할에 대한 텍스트가 담겨 있다. 소제목에는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만 볼 수 있다(Man sieht nur, was man weiß)‘는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인용문이 새겨있다.


여러 분야에서 알 수 있듯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고 습득한 지식과 사실 안에서 무엇을 제대로 인지하고 바로 볼 수 있다. 기관의 과거 오류를 직시하고 바로 보는 과정을 통해서 쇄신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겼다. 작가의 작품에서 단어와 텍스트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언어의 기호와 상징을 재료 화한 요셉 코수스(Joseph Kosuth)의 개념미술이나 메시지 전달에 중점을 둔 제니 홀저(Jenny Holzer)하고는 의미의 결이 다르다. 사진과 작품에 삽입된 단어와 문장은 차라리 알렉산더 클루게(Alexander Kluge)의 영화 애국자(Die Patriotin, 1979)에서 칼크라우스(Karl Kraus)의 말을 인용했던 방식과 통한다. 영화 후반부에 "한 단어를 가까이 볼수록 그것은 멀리(낯설게) 보인다. (Je näher man ein Wort ansieht, desto ferner sieht es zurück. DEUTSCHLAND)"라는 크라우스(Karl Kraus)의 문장 아래 대문자로 ‘독일’(DEUTSCHLAND)이라고 쓰인 화면이 나온다. 대문자로 표기된 DEUTSCHLAND란 단어로 가까이 독일을 접할 때 구체적인 앎의 실체로서가 아닌 낯섦과 뜨악함의 대상으로 다가올 수 있다.


폰비츠의 언어는 시적이고 비판적 성격을 지닌다. 개념미술의 재료와 수단으로써 문장과 단어라기보다는 문학 자체의 은유와 결과물로서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의 작품은 과거에 대한 비판과 인류의 가치를 되새기는 촉매제가 된다. 잘못된 과거의 활동을 철저히 분석하고 반면교사(反面敎師)의 교훈을 삼겠다는 기관의 의지를 잘 담았다. 과거의 사건은 바꿀 수 없다. 그러나 그것에 직면할 수는 있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진실이더라도 그것을 마주하고 그것을 기억하고 그것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하고 피해자는 기억되어야 하며 그 어떤 악행도 재생되거나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전쟁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신문을 읽지 않아도 그것은 알 수 있는 일이다. 정말이지 그건 슬픈 일이다. 그것은 사람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은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런 슬픔과 같은 것이다. 죽음과 싸우는 일은 매우 아름답고 고상하고 존경할 만한 일이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하는 싸움도 마찬가지다.” _ 헤르만 헤세          


 진화론이건 창조론이건 자연과 동물이 먼저 생겨나고 인간은 맨 나중에 탄생한다. 인간은 자연의 폭력과 파괴의 정복자가 아닌 공생의 관리자로서 의무를 가지고 있다. 땅과 바다의 모든 동식물과 자연은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환경이다. 세상에 귀하지 않은 생물은 없다. 하물며 신의 형상을 가진 인간은 무가보(無價寶)의 존재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으로 지구가 망가지고 그 폐해는 고스란히 인류에게 되돌아오고 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큰 죄악은 전쟁이다. 21세기 우리는 차원이 다른 전쟁에 직면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세균과 바이러스의 공격에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쓰려졌다. 어느 때처럼 이기고 또 살아남을 테지만 우리는 의료와 방역,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분야에서 걸쳐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세상을 살게 될 것이다. 평화는 전쟁과 전쟁 사이의 휴지기에 불과할지 모른다. 과학이 이데올로기와 자본에 휘둘리면 괴물이 된다는 것을 역사는 말한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말처럼 죽음과 싸우는 일은 매우 아름답고 고상하고 존경할 만한 일이다. 변함없이 열린 눈으로 히포크라테스 선서(Hippocratic Oath)를 실천하는 전 세계 의료진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 순간도 생명을 살리는 그들의 고귀한 헌신에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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