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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린 박하 Dec 15. 2022

포용과 관용, 보헤미안 광장

인류의 모든 역사엔 노마디즘의 봉헌이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는 "인류의 역사는 대상 행렬의 역사로 읽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역사에는 노마디즘의 봉인이 찍혀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에덴의 동산에서 추방된 그 순간부터 인간은 '차선의 대지'를 향한 기나긴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유목민으로서의 행위와 삶을 뜻하는 노마디즘은 인류 역사의 근간을 이뤄왔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은 태어난 고향과 삶의 터전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오기까지 평생을 안주하지 않고 개척과 모험적 삶을 살았다. 그의 후손들도 마찬가지로 정주의 삶이 아닌 치열한 이주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노예가 된 백성들을 이끌고 험난한 출애굽을 감행했던 모세의 생이 그랬고, 인간으로 세상에 온 예수도 마구간에서 태어나 이집트로 피신을 가는 난민의 신분으로 삶을 시작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마 25:40)     


 현재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의 외국인은 전체 인구에 15%에 달한다. 유럽 내에서도 다양한 문화와 개방성으로 주목받는 대표적인 도시다. 독일의 전신인 프로이센의 수도였을 당시 18세기에도 관용과 열린 문화의 도시였음을 증명해 주는 곳 중에 하나가 베들레헴 교회 광장(Bethlehemkirchplatz)’이다. 체크포인트 찰리(Check-Point Charlie) 검문소에서 프리드리히 슈트라세(Friedrichstrasse)를 따라 북서쪽으로 약 200여 미터 떨어진 곳이다. 미테 (Mitte) 지구에 있는 1,500m² 규모의 도시 광장으로 지하철“Stadtmitte”와 “Kochstraße”(U6)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베를린 방문객들이 쉽게 지나칠 수도 있다. 2차 대전 이후로 장벽이 지나갔던 자리여서 그전까지 공식적 이름이 없었으나 통일 이후 1999년에 지금의 이름이 붙여졌다. 1737년에 이곳에 문을 연 베들레헴 교회는 보헤미안 교회(Böhmische Kirche)라고도 하는데 체코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보헤미아 왕국에서 당시 자행되었던 신교 박해를 피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베를린으로 망명했던 개신교 피난민들을 위해서 지어졌다. 독일과 보헤미아 왕국과의 긍정적 관계를 나타내는 건축물이었다. 1747년부터 이들은 세 개의 별도 교구를 형성했으며 그중 두 개는 교회의 공동 소유주였다. 최초의 베들레헴 교회는 1945년 2월 공습으로 파괴되었고, 1960년대에 모두 철거되었다. 광장 바닥에 있는 여러 색의 모자이크는 이전 교회의 평면도를 보여준다.     



    베를린에서도 특이한 이력을 지닌 이 광장에 매우 독창적인 공공미술 작품 2개가 연이어 놓여있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체코의 종교개혁 역사를 더듬어 보아야 한다. 종교개혁의 선두였던 1170년경 프랑스 남부 왈덴스인들(Waldenses)을 시작으로 14세기 옥스퍼드의 학자인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0~1384)가 일으킨 개혁의 파문은 보헤미아의 개혁자 얀 후스(Jan Hus, 1369-1415)를 통하여 독일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보헤미아 종교개혁 (Bohemian Reformation)은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보다 100여 년을 앞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폐단에 맞서 투쟁했던 보헤미아 왕국(체코) 기독교인들의 운동으로 유럽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중심에 섰던 체코의 신학자인 얀 후스는 교황의 우상화와 부패한 가톨릭 교회를 비판한 죄로 화형을 당하게 된다.


  이후에도 보헤미아에서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종교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1618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안 왕에 오르자 개신교 탄압은 더욱 가혹해졌고 반발한 민중들에 의해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는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참 폐한 개신교는 대부분 권력을 빼앗기고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 가의 속령이 되었다. 체코어 사용 금지, 종교와 문화적 탄압을 통한 합스부르크의 압정으로 인해 많은 보헤미아 신교도들은 유럽 각지에 망명을 가야만 했다. 이렇게 19세기 초까지 보헤미아는 긴 '암흑의 시대'를 맞았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와 2세는 어려움에 처한 보헤미아 망명자들을 기꺼이 수용하고 이들에게 정착할 수 있는 경제기반과 종교 활동의 자유를 보장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허락했던 낭뜨 칙령(dit de Nantes, 1598)이 1685년에 루이 14세에 의해 폐지된 이후 종교 난민으로 전락한 프랑스 위그노 교도들을 위해서도 교회를 세워주고 이들을 적극 받아주었다. 당시 프로이센이 유럽에서 신흥 부국 강국으로 설 수 있었던 것은 군사력뿐만 아니라 이민자들에 대한 관용을 베풀고 문호를 열어 새로운 인재들을 영입해 발전을 도모했던 개방정책도 큰 몫을 했다.      


‘베들레헴 교회 광장(Bethlehemkirchplatz)’에 들어서면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거대한 구형 조형물이다. 높이 약 8.4미터 직경 7.4미터에 달하는 구형 볼은 밝은 파스텔톤의 양탄자들로 뒤덮여 있고, 그 위로 탁자, 의자, 사다리 등 각종 가구들과 살림살이들이 굵은 밧줄로 얽히 설키 묶여 있다. 스테인리스 스틸, 섬유 강화 플라스틱, 황마 그물, 폴리 우레탄 및 폴리 염화 비닐 폼 등의 여러 재료로 만들어졌다. 미국 팝아트 작가인 클래스 올덴버그(Cleas Oldenburg)와 코샤 반 브룽겐(Coosje van Bruggen)이 공동 제작한 하우스 볼(House Ball)이란 작품으로 1999년에 이곳에 안착하게 되었다. 원형에 번들로 묶인 가재도구들은 18세기 초에 가톨릭의 탄압과 압정으로 고향에서 추방되어 베를린의 Böhmisch-Rixdorf (오늘의 Neukölln)에 정착한 보헤미아 망명자들의 고통과 애환을 상징한다.


 구형으로 된 하우스 볼은 어느 방향으로 쉽게 굴러갈 수 있는 역동성과 쉽게 정착해 설 수 없는 불안한 심정까지 담는다. 작품에 보여지는 여러 색상은 이주민들의 다양한 문화적 배경 여기저기 아무렇게 묶여 있는 세간살이들을 보자면 마치 늘어난 집세에 수없이 이사 다녀야만 하는 어느 가난한 세입자의 이삿짐 트럭을 들어다 보는 듯 애잔하다. 보헤미안 종교 피난민들은 물론  모든 이주민들의 가난과 고단한 삶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종교, 전쟁, 기타 여러 이유에서 삶의 터전을 떠나 낯선 땅으로 떠나야만 하는 난민들에게 이고 진 짊의 무게는 그들의 고단한 삶만큼이나 무거웠을 것이다.   

  

 올덴버그는 60년대 소비사회의 페티시 오브젝트를 이용한 ‘Soft Sculpture’라는 개념으로 작업을 해왔다. 예를 들면 크게 만들어진 ‘케이크 한 조각(Piece of Cake)’은 확대와 부드러움을 통해 또 다른 은유와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세계 많은 도시에서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데 도시문화와 공공미술의 연관 관계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작품 중 다수는 2009년 사망한 부인 쿠스제 반 브루겐 (Coosje van Bruggen)과 공동으로 제작되었다. 우리에게는 2006년 서울 종로구 청계 1가 청계광장에 세워진 일명 소라탑으로 더 유명한 ‘스프링(Spring)’을 만든 작가로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일상의 집안의 살림들이 굴러 나와 볼(Ball)의 형태로 뭉쳐진 하우스 볼에서도 올덴버그 특유의 팝아트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공공미술로서 하우스 볼은 사실 1996년 베를린의 이 광장에 세워지기 이 전에 만들어졌다. 이 작품은 이곳에 오기 전에 몇 군데 다른 지역에 머물다 이동하다를 반복하며 소위 떨구어진 조각(dropped sculpture)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마다 조금씩 의미가 달라지긴 했지만 우연히도 메인 주제는 늘 이주(migration)와 변이(displacement)였다. 그 첫 여행에서 하우스 볼은 1985년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 동안 Venetian Arsenal에서  "Il Corso del Coltello"라는 거리 퍼포먼스에 참여하기 위해 뉴욕에서 베니스까지 이동했다. 이 퍼포먼스는 베니스를 무대로 건축, 문학, 연극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 인물과 작품들로 꾸며졌는데 하우스 볼은 의복 등의 잡동사니가 얽힌 공으로 개인의 소유물을 상징하고 스스로 굴러가는 이동수단이자 자체적인 ‘집’으로서의 의미도 담고 있다.


 퍼포먼스 연극 중에 Coosje van Bruggen이 연기 한 조지아 샌드백(Georgia Sandbag)의 캐릭터와도 연관이 있는데 여기서는 국가 전위(dislocation)의 상징으로 등장했다. 퍼포먼스 마지막에는 아르세날의 다리 위를 굴러가면서 20세기 이주문제를 환기시키기도 했다.  이후에 쿠스제가 1993년 베를린의 한 장소에 이주민들의 시련의 상징으로 새로이 하우스 볼 조각을 세울 것을 제안했고 승인까지 되었지만 건물주의 계획 변경으로 다시 본의 주립 미술전시관(Kunst- und Ausstellungshalle der Bundesrepublik)으로 이동하게 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파나마 운하와 라인강을 따라 배로 이동하고 이듬해 발트해의 로스톡(Rostock)에서 다시 헬리콥터 아래 300피트 긴 케이블에 매달린 채 마침내 베를린의 베들레헴 광장에 안착하게 되었다. 작품이 상징하는 변이와 이주의 경험을 작품 자체가 몸소 겪은 것이다.     


 하우스 볼 바로 연해서는 건물 모양의 거대한 강철 구조물이 세워져 있다. 스페인의 개념미술가인 유안 가라이 자발(Juan Garaizabal)의 ‘도시의 기억 베를린(Memoria Urbana Berlin)’ 이란 작품이다. 작가는 특정 도시에 역사와 관련된 건축물을 대형으로 재현하고 작품 전체에 기술적인 전기장치까지 추가한 묵직한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유명하다. 빛과 그림자의 생명력 있는 연주를 통해 더 넓은 동시대의 문맥으로부터 고립시키고 환기시킨다. 현대 도시의 대중 공간을 분석적으로 다룬다.


 가장 알려진 공공미술 시리즈인 "도시의 기억(Memorias Urbanas)"은 하바나, 마이애미, 발렌시아, 베를린 등지에서 진행되었다. 베를린의 작품에서는 결이 다른 ‘부재’를 다루고 있다. ‘도시의 기억 베를린’은 보헤미아에서 망명한 개신교 신자들을 위해 1737년 봉헌된 ‘베들레헴 교회’의 외관을 나타낸다. 실제 베들레헴 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에 폭격으로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동독 시절에는 그 남은 폐허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후 교회가 있던 자리는 체크포인트 찰리의 시설용지로 편입되었다. 당시 베들레헴 교회는 15.7미터, 높이 36.4미터에 이르는 돔 형태의 예배당으로 약 600명의 신자를 수용할 수 있었다. 정확한 위치는 크라우센슈트라세와 마우어 슈트라세의 합류점에 서 있었다. 강철로 된 골격은  800평방미터의 정사각형 콘크리트 블록에 고정되어 21개의 기둥과 8개의 아치로 구성되어 있고, 300미터에 달하는 LED조명이 그 위에 추가되어 무게만 40톤에 달한다. 사라진 건축 구조물의 실루엣을 따라 공중에 그려진 드로잉 형태로 볼륨감이 잘 드러난다. 밤이 되면 건물의 윤곽을 따라 켜지는 조명들로 인해 작품의 존재감은 더욱 확연해진다. 베를린에 세워진 작품은 애초에 2012년 6월 27일부터 9월 30일까지만 임시로 설치된 계획이었으나 2014년에 지방 의회는 광범위한 지지자들의 권고에 따라 장기적으로 이 자리에 남게 되었다.     

 

 당시 프로이센의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종교적인 이유로 고향을 잃은 보헤미아 난민들을 받아들였고 이들 대부분은 농부와 직조공으로 일했다. 이들의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세워졌던 베들레헴 교회의 초창기 설교 언어는 체코어 였다. 프리드리히 2세가 즉위한 이후로도 이들의 종교생활은 안전하게 보장받았고, 1750년부터는 루터교의 독일어로 설교가 진행되었다. 교회는 독일과 보헤미아 왕국과의 관계에서 가장 긍정적인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이는 프로이센 제국의 토대인 ‘관용’을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흥미로운 점 하나는 가라이 자발의 ‘도시의 기억 베를린(Memoria Urbana Berlin)’이 한국에도 설치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조선왕조 말기 1884년에 고종의 부분적 선교 허용 조치가 나오기 이전부터 개신교 선교사들의 활동들이 있었다. 한국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개신교 선교사로 독일 출신의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1803-1851)가 있었다. 그는 1832년 7월에 조선에 통상 요청을 하러 온 동인도회사의 상선을 타고 왔다 충청도의 작은 섬 고대도에서 한문성경과 전도 문서를 배포한 후 돌아갔다. 당시 서양 감자 파종법을 알리고 주기도문 번역을 하는 등 짧지만 다양한 선교활동을 펼쳤다고 한다. 칼 귀츨라프는 요하네스 예니케 목사 (Johannes Jaenicke)가 1800년 설립한 독일 최초의 베를린 선교학교의 출신이며, 베들레헴 교회가 바로 이 베를린 선교학교와 고쓰너 선교회를 설립했던 모교회였다. 이런 인연으로 충남 보령시는 베들레헴 교회와 관련된 선교와 관용, 상생의 의미를 담아 가라이 자발의 작품을 이곳에 세운 것이다. 실제 크기는 베를린보다 작은 5m로 축소 제작되었고 귀츨라프를 태우고 온 영국 상선 암허스트호가 정박해있던 고대도 앞바다를 배경에 두고 서있다. 야간에는 역시나 원본과 같은 LED조명이 비치고 있는데 친환경적인 태양광 에너지를 이용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국제 이민자의 수는 1억 2천만 명 정도며, 그중 130만 명 정도가 매년 유럽연합으로 들어간다. 독일은 그러한 이민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국가이며 유럽 국가 중 전체 인구에서 외국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다. 21세기 들어서 2003년 이라크 전쟁,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 알바니아의 혼란과 유고 내전 최근의 시리아 내전 등으로 인해 2015년 8월 이후 그 이전보다 기하급수적으로 많은 대량의 난민들이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유럽에서 가장 많은 난민을 받아들인 나라는 독일이다. 메르켈 총리는 난민사태를 인도적 차원으로 접근해  난민들을 적극 수용했지만, 독일 내에서 사회부담비용 증가와 치안 불안에 따른 범죄 증가 우려로 비판 여론이 높아지면서 지방선거에서 잇달아 연패하고 18년 연임의 기독교 민주연합(CDU)의 당대표를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보수적인 독일의 특성상 비판과 반대도 있지만 이주민들을 환영하고 이들을 적극 수용하는데 찬성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존재한다.


 독일이 난민과 이주민들을 수용해서 그들의 정착을 돕고 상생과 관용을 베풀었던 역사는 근래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다. 유럽 내 프로이센 제국 시절부터 유럽 전역의 피난민, 예를 들어 휴그노 (Huguenots), 짤츠버거 (Salzburger), 펠자 (Pfälzer), 또 보헤미안들과 모라비안들에게 베를린과 그 주변 지역 마을에서 그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토지와 가옥은 물론 일련의 가축들, 농업 도구와 건축자재까지 제공했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보장하는 것은 물론 세금 면제나 군대 복무의 의무도 제해주었다. 1685년 10월 루이 14세가 앙리 4세의 낭트칙령 폐지로 프랑스 개신교 신자들인 위그노(Huguenot)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망명길에 오르고 프로이센은 이들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위그노 신자들을 위한 교회가 바로 베를린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인 젠다멘마크(Gendarmenmarkt)에 세워진 프랑스 돔(Französischer Dom)과 독일 돔이다.  이렇게 난민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이들을 수용하고 상생하면서 이주민들은 열심히 일했고 다양한 인재들로 인해 독일은 부국강병을 이뤘다.


 그러나 독일은 20세기 들어 세계 1, 2차 대전을 일으킨 전범국가라는 불명예를 얻게 된다.  나치 정권 시절(1933-1945) 600만의 유태인과 50만의 집시족을 학살하고, 3백만 명의 소련군을 죽였으며, 외국인 노동자를 강제 징용했다. 이 시기 독일에서 해외로 망명한 인구수가 10만이 넘는다. 나치의 탄압을 통해 많은 우수한 인재들이 독일을 떠났고 독일은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칸트, 헤겔,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가, 괴테의 문학, 과학자 아인슈타인, 베토벤, 하이든, 헨델, 바흐 같은 음악가를 배출한 지성의 나라에서 어떻게 그런 끔찍한 흑역사가 벌어졌는지는 세기의 미스터리다.  다만 분명한 것은 보편적 인권을 무시하고 외국 문물에 대한 배척과 차별은 역사적 후퇴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여전히 네오나치들과 극우파들이 존재하지만 독일 정부와 많은 수의 민주시민들은 극우파들을 역사에서 배운 것이 없다라며 비판하고 이민자들과 연대하여 차별주의를 경계하고 있다.   

         

 이제까지 두 작품들 각각이 갖는 의미와 장소성, 미학적 가치와 완성도를 볼 때 나쁘지 않은 점수를 줄 수 있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은 작품의 배치와 공간이 문제다. 두 작품 모두가 8미터 15미터에 이르는 대형 작품인데 광장의 전체 면적 자체가 두 작품을 수용할 만큼 크지 않다. 게다가 광장 자체가 건물에 둘러 쌓여 있고 면적이 크지 않은 공간에 대형 작품이 거의 연이어서 붙어 있어 관람객이 볼 때 답답하고 감상할 만한 충분한 여유를 주지 못하다. 또한 두 작품의 조형언어와 분위기가 매우 달라서 부 조화스럽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민자의 고단함과 노마디즘이라는 큰 주제 내에서 종교적 관용까지 작품의 주제 면에서는 연결점이 충분히 있다. 작품의 결합력은 독특한 도시의 캐릭터와 함께 하나는 중앙에서 하나는 경계 밖이라는 두 공간의 연결점을 그려준다. 그 연결점은 부서진 과거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고 환기시킬 수 있는 기억의 구조 안에서 도시의 시공간 레이어를 통해 관심을 끌어낸다.


 가라바잘의 작품은 과거의 부재를 현대적으로 잘 접근했다. 반면 하우스 볼은 본래의 취지대로 노마드적인 현대인의 삶을 상징하는 기호로서 계속해서 다른 장소로 이동해 가는 프로젝트가 이어진다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영구적으로 박재되어 있기보다는 이동함으로 작품의 생명성이 더해질 수 있다. 다만 공공미술의 경우 설치와 이동의 문제는 소유자와 지자체 등의 공공의 협의가 이루어져야 하기에 쉬운 문제는 아니다. 이 작품을 리서치하면서 주제로 다루는 동안 워낙 작품 자체가 여러 장소로 옮겨지며 노마드적인 여정을 실천해왔고 집필 도중에 베를린을 떠나는 게 아닌가 걱정을 했었다. 장기간 베를린에 안착해 있어 기우이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볼’은 정주보다는 맘껏 굴러가야 매력인 듯하다.      


 힘들고 고단한 이민자의 삶이지만 저 건너편의 희망을 넌지시 보여는 올덴버그의 하우스 볼과 자유를 찾아온 이들을 따뜻하게 품어준 베를린의 관용과 상생의 역사가 주는 교훈을 되새기며 ‘도시의 기억 베를린‘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여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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