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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린 박하 Dec 15. 2022

그 많던 토끼들은 다 어디 갔을까

토끼들의 낙원, 베를린 장벽


                  The Madonna of the Rabbit c. 1525 – 1530 _Titian (Tiziano Vecellio)


우아한 자줏빛 드레스에 청색 가운을 걸친 성모 마리아가 오른손으로 아기 예수를 받치고 왼편으로 몸을 기울여 다른 손으로 흰 토끼의 몸통을 살짝 움켜쥐고 있다. 성녀 카타리나는 아기 예수를 두 손으로 떠 앉고 훗날 그녀의 순교에 사용된 수레바퀴를 아래 두고 있다. 우측 들판에는 양들과 세례 요한이 앉아 있다. 그림 상단에는 황금 노을과 푸른 하늘이 화려하게 드리워 있다. 1530년 베네치아 화파의 거장 티치아노의 ‘토끼와 함께 있는 성모‘라는 그림이다. 감각적 색채와 서정적 묘사가 돋보이는 베네치아 화파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흰색 토끼는 기독교 도상학에서 성모의 순수와 순결, 처녀성의 상징으로 해석된다. 자궁이 2개인 토끼를 빗대어 신비한 잉태, 동정녀 마리아를 암시하기도 한다. 그림에는 중앙의 토끼를 등진 다른 토끼의 뒷 몸통이 보인다. 아래 바구니에 놓인 포도와 사과는 예수가 받을 고통과 원죄로 인한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Feldhase _ Albrecht Dürer. 1502


 토끼 소재 유명 그림 중 하나는 독일 출신 화가 뒤러(Albrecht Dürer)의 대표작으로 사실적 표현이 돋보이는 토끼(Der Feldhase)가 있다. 1502년 제작되어 특별한 상징성은 없지만 토끼 눈에 비친 창문까지 표현할 정도로 정교한 수채화다. 20세기 들어서는 요셉 보이스의 1965년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것인가?”라는 퍼포먼스에 토끼가 등장한다. 죽은 토끼를 품에 앉은 채 얼굴에 꿀과 금박을 바르고 미술관의 그림을 토끼에게 설명하는 퍼포먼스다. 토끼는 정신과 육체의 부활, 재생을 상징하며 작가 자신의 아바타(Avatar)로 작동한다. 예술을 대함에 있어 이성적 판단으로 체계화된 감상 방식에 대한 비판을 은유하기도 한다. 구약 성서 레위기에서는 부정(不淨)한 동물로, 다산(多産) 왕, 섹슈얼리티(Sexuality)와 정욕(情慾)의 상징으로 미국 유명 성인잡지 '플레이보이'(Playboy)의 로고로도 쓰였다. 16세기 독일 게르만 전설과 루터교 풍습에 따른 부활절 토끼(Osterhase) 문화가 미국에 전해져 이스터 버니(Easter Bunny)가 되었다.


우리 문화에서 토끼는 꾀가 많고 영묘한 동물로 각종 민화와 동요 등에 등장한다. 조상들은 달나라 계수나무 아래서 불사약(不死藥)을 만들기 위해 방아를 찧는 ’ 달토끼‘를 그리며 풍요와 행복을 빌었다. 토끼는 도교적으로 장생불사(長生不死)를 표상한다. 토끼는 십이지(十二支)의 네 번째 동물로 달의 정령이자 만물의 성장, 번영과 장수의 상징으로 여겼다.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의 굴뚝과 경복궁 교태전(交泰殿) 석련지(石蓮池) 같은 주로 여성들의 생활공간에 토끼가 새겨져 있는데 근심 없는 영원의 세계 월궁(月宫)을 상징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한 달의 만월 주기는 여성의 생리주기와도 일치해 여성의 몸과 음기와 연관이 있다. 명월 아래 방아질 하는 토끼는 화목한 부부애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토끼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세 미술로부터 현대 미술 작품에 이르기까지 부활, 풍요, 성적 욕망 등 다양한 메타포로 작용해왔다.


베를린도 “토끼”와 특별한 인연이 많은 도시다. 2차 대전 이후 패망한 독일의 분단 속에서 지리상 동부 소련 진영에 위치한 수도 베를린은 프로이센 시절부터 독일의 수도라는 역사적 상징성 때문에 서방 연합국에서도 일정 지분을 요구하게 된다. 그로 인해 베를린은 민주 진영의 서베를린과 소련이 지배하는 동베를린으로 나뉘었다. 사실상 공산당 독재에 가까운 정치 억압과 낙후된 경제를 피해 자유를 찾아 1961년까지 동독 인구의 약 20%가 서독으로 이주하였다. 당시 가장 동쪽에 위치한 서베를린은 동독 주민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탈출 통로였다. 교육받고 능력 있는 젊은 두뇌유출로 경제 하락을 걱정한 동독 정부는 1961년 탈출 저지를 위한 ‘베를린 장벽’을 세우게 된다.


도시 전체를 둘러싼 장벽으로 인해 서베를린은 육지의 섬으로 고립무원의 도시가 되었다. 장벽은 서독 경계선에서 동독 영토 내부에 만들어졌고, 폭 60~70m 정도의 무인지대가 형성되었다. 동쪽 초입에는 철조망을 세우고 차량 방어용 도량과 전기 감지 장치, 1200여 명의 감시병이 있는 302개 감시탑, 20개의 벙커(bunker)와 평당 30개의 지뢰가 묻힌 지뢰밭이 있었다. 서쪽 경계선 맨 마지막에 우리가 잘 아는 3.6미터의 콘크리트 장벽이 세워졌다. 장벽의 구조는 이후로도 개량이 되었고 서베를린을 둘러싼 장벽의 총길이는 155km에 달했다. 30여 년의 시간 동안 물리적, 정신적 분단의 상징으로 베를린 장벽은 독일 역사의 암흑시대를 대표하는 산물이었다.


 인간에게는 극복하기 어려운 냉전의 벽일지언정 토끼들에게만은 예외였다.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며 죽음의 제대로 불렸던 장벽의 무인지대는 인간의 침입이 없고, 감시병들의 삼엄한 경비 속에 보존되어 있는 데다, 초록 풀이 무성해 먹이도 풍부했다. 땅굴을 파서 경계를 넘나들며 생활하는 토끼들에게는 포식자들로부터 자유로운 지상낙원과 같은 곳이었다. 살벌한 냉전의 산물 속에서 자유롭게 왕래하며 마치 통일의 시대를 예견하기라도 하듯 평화의 상징으로 존재했던 장벽의 토끼들이 있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이듬해 독일 통일을 이루는 신호탄이 되었지만 정작 장벽의 토끼들에게는 안전했던 삶터를 잃어버린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사건이었다. 새 보금자리를 찾아 그 많던 토끼들은 다 사라졌지만 그들을 기억하는 작품이 있다. 1999년 아티스트 칼라 쟉세(Karla Sachse)가 디자인한 120개의 실물 크기의 토끼들이 황동판에 새겨졌다. 이른바 토끼 들판(Kaninchenfeld)이란 작품은 크로이츠베르크(Kreuzung)의 쇼쉐슈트라세(Chaussestrasse)와 리젠 슈트라세(Liesenstrasse) 모퉁이 교차로 부근의 도로와 차로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다. 실물 크기의 상감 토끼 모양은 눈코 입이 없는 실루엣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같은 모습이 하나도 없다.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앞발을 들고 먼 곳을 바라보거나, 폴짝 뛰어가던 참이나, 한참 달리는 중이거나, 잔뜩 웅크리고 앉아있기도 한다. 1952년부터 1990년까지 서베를린과 동독 외부 경계에 국경보안시스템 (Grenzsicherungsanlagen)과 동서 베를린 시내 국경 횡단보도(Fußgängerübergänge)가 존재했다. 시내에 위치한 국경 도로와 교차로만 8군데가 있었는데 외국인, 외교관 및 동독 시민 등 각각의 출입 대상과 이용시간이 달랐다. 쇼쉐슈트라세(Chaussestrasse) 부근은 뵐레 슈트라세(Wöhlerstrasse)의 모퉁이까지 이어지는데 서베를린과 동독 시민만을 위한 국경횡단 도로 중 하나였다.


리젠 슈트라세(Liesenstraße)의 모퉁이에서 바이엘 그룹(Bayer Group) 건물 바로 뒤 뮐러 슈트라세(Müllerstraße)를 따라 더 남쪽으로 가면 아스팔트에 박힌 동판 토끼들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도로 보행자들과 운전자들은 청동 상감으로 삽입된 토끼들을 다양한 속도와 강도로 인식할 수 있다. 자동차의 타이어와 시민들의 통행으로 동판 표면은 광택이 더하고 반사효과로 밤낮으로 눈에 잘 뜨인다. 1961년 이후 동서 베를린을 가로막는 장벽이라는 물리적 제한에도 불구하고 토끼들만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양쪽 진영을 활보했다. 과거 장벽이 가로질러 죽음의 지구라고 불렸던 위험지역을 지상으로 심지어 지하로 굴을 파서 다니며 절대 자유를 만끽했다. 경계를 넘기 위해 삼엄한 경비 속에 통행증이 필요했던 인간들과 달리 토끼들은 패스도 필요 없는 완전히 평화로운 삶을 누렸다. 동서 양쪽 사람들은 토끼들을 그저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악셀 스프링어(Axel Springer)가 ‘볼셰비키 살인선(Bolschewistische Mordgrenze)’으로 동독에서는 ‘반 파시스트 보호벽(Antifaschistischer Schutzwall)‘으로 피의 벽, 감옥의 벽, 수치의 벽으로 불렸던 장벽 지대는 토끼들에게만은 지상의 낙원이었다. 그러나 냉전 종식은 그들에게 유토피아적 존재로서 생의 마감을 의미했다. 그들은 서식지를 잃고 도시의 공원과 녹지로 옮겨가야만 했다.      


작가는 토끼가 동서 양쪽을 투영하는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어떤 사람들은 계속해서 자유를 위해 용감하게 도전했고, 어떤 이들은 인간의 한계를 무조건 무시하기도 했다. 토끼의 존재는 베를린 시민들에게 거부된 이동의 자유를 상기시키는 역설적 역할을 했다. 아티스트 칼라 샤흐제(Karla Sachse,1950)는 독일 쟉센 출신으로 1969년부터 1977년까지 베를린의 훔볼트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이후 베를린-리히텐 베르크(Berlin-Lichtenberg)에 있는 "시각 예술(Bildende Kunst)"스튜디오에서 교사로 일했다. 1982년부터 우편 예술(Mail Art)과 거리 행동(Straßenaktionen)을 통한 전시에 참여했고, 1988년부터 실내 설치와 공공미술 작업도 선보였다. 현재는 큐레이터로도 활동하고 있다.


1996년 토끼 들판이 당선될 당시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을 보면 ‘이 작업은 초기에 경쟁 과제의 심각성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보였다. 죽음의 지구에 평화로운 거주자로서의 토끼는 거리 공간의 장식적 요소로서 다시 재개된다. 이 작품은 정치의 불합리한 요구에 대한 자율성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토끼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 거리의 모퉁이에 새로운 건물을 짓고, 자동차를 몰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린벨트를 탈환했다. 이전 거주자였던 토끼들은 새로 연합한 번잡한 도시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놋쇠 토끼들이 묻힌 거리와 장벽의 라인을 보여주는 선들 만이 그때 그들을 기억하는 유일한 증거로 남아 있다. 작품으로서 토끼들은 무자비한 정치 체제가 양산하는 눈에 띄지 않는 희생자들을 상기시켜 준다.   

    

베를린 장벽 토끼들이 주인공인 다큐멘터리 영화도 만들어졌다. 2009년 폴란드의 촉망받는 감독 바르텍 코노프카(Bartek Konopka, 1972)의 ‘베를린 토끼’(Muerhase, 원제: Rabbit a la Berlin)라는 필름이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많은 수상을 했고 2010년 오스카상 후보에도 오르며 평계의 호평을 받았다. 영화는 베를린 장벽 ‘죽음의 지역‘에 살았던 야생 토끼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동서독 분단이 인간에게는 불안과 단절의 시간이었지만 장벽의 토끼들에게는 태평성대의 시기였다. 서열싸움이 치열한 본성도 제쳐두고 주변 일에 무관심하며 게으른 일상을 즐겼다. 그러나 천국은 영원히 지속되지 못했다. 동독 경비원들은 탈출자를 숨기는 풀덤불에 제초제를 뿌렸고, 번식력이 뛰어나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 토끼들을 대대적으로 사냥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토끼들은 살아남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장벽이 무너져버렸다.


어렵게 살아남은 토끼들은 보금자리를 잃고 다시 차가운 현실에 부딪힌다. 토끼들은 공원으로 숲으로 새로운 삶터를 찾아야만 했고, 자유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영화는  토끼의 눈을 통해 보는 낙원 시절 동독 수비대의 모습, 잔인한 토끼 대량 살상 장면과 목숨 걸고 필사적으로 동쪽 경계를 넘는 동독 시민들의 모습을 겹쳐 보여준다. 독일 통일과 관련해 냉전 당시 베를린 방벽을 방문했던 동서독 연합국 주요 인사들의 생생한 모습과 역사적 아카이브 영상들이 많이 등장한다. 폴란드 출신 코노프카(Bartek Konopka) 감독은 독일 통일과 장벽의 역사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동유럽 국가의 감시와 보호 아래 생활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동(東) 유럽인들을 토끼에 빗대어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1989년 폴란드, 헝가리를 시작으로 체코, 루마니아, 동독 등 소련 위성국가 노동자와 시민들이 연대하여 심각한 경제 위기와 소련의 강압적 통치에 반대하는 시위와 대중운동인 이른바 ’ 동유럽 혁명‘이 일어났다. 강압적 스탈린 체제 하의 동유럽 국가 독재 정부들이 연이어 몰락했고 1991년 소련마저 붕괴하며 냉전 시대는 막을 내렸다.


구소련과 동유럽 체제는 노동자 착취를 동력으로 한 ’ 국가자본주의’였다. 사회주의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일 뿐이었고 국유화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지배 관료들은 다른 형태로 시장을 통제하고 권력은 재배치되었다. 민주적인 권리들이 확대되기도 했지만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에 던져지며 새로운 자유와 환경에 대처해야만 하는 장벽 토끼들과 동(東) 유럽인들은 비슷한 운명을 공유했다. 반세기 동유럽의 역사를 베를린 토끼의 상황을 빌어 풍자하는 영화 ’ 베를린 토끼(Mauerhase)‘는 자칭 사회주의에 대한 자연 다큐멘터리라 불려지기도 한다.     


  베를린은 통일 이전까지 미소 양국을 중심으로 한 냉전의 상징이자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를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 1961년 세워진 베를린 장벽이다. 케네디(John F. Kennedy)와 레이건 대통령(Ronald Wilson Reagan)은 민주주의의 보루(堡壘)와 같은 서베를린을 방문해 역사에 남을 명연설을 하였다. 대외적으로 동유럽 혁명과 소련의 개방정책, 대내적으로 동독의 대규모 반체제 민주시위를 통한 정치적 격변, 서독의 동방정책을 통한 통일 정책의 일관성 등으로 독일 통일은 예상보다 빠르게 이루어졌다.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要塞) 같았던 흉물스러운 장벽은 1989년 11월 9일 마침내 베를린 시민들에 의해 무너져 내렸고 이듬해 동서(東西)는 가슴 벅찬 통일의 순간을 맞이했다.


쇼쉐슈트라세(Chauseestraße)에 놓여졌던 120마리의 황동 토끼들은 실제 장벽 토끼들의 운명처럼 마냥 평화롭게 살 수 없었다. 점차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 도로면 개보수와 포장 교체 작업이나 건설 현장이 들어서면서 일부 토끼 동판은 아예 사라졌고, 일부 토끼들의 꼬리나 귀, 다리가 잘려나가 손상되기도 했다. 아쉽게도 1999년에 배치된 토끼들은 이제 반도 남아있지 않다. 장벽의 위치를 기억하며 행인의 발걸음과 수많은 타이어 자국에 닳고 닳아 반짝이는 작품 속 토끼들은 통일이 되었어도 미묘한 방식으로 나눠진 수많은 것들을 상기시킨다. 독일은 우리보다 먼저 통일을 이루었지만 실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쉽지 않은 여정이다.



21세기 지상 유일한 분단국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통일은 특별한 주제다. 북한을 적이자 한민족으로 인식하는 중장년층과 달리 젊은 세대는 경제적으로 낙후된 타인으로써 이질감을 느낀다.  국내 정치, 사회적 노력에 비해 통일에 대한 열망이나 의식이 다분히 높지 않다. 실업과 경제적 불안, 불확실한 현실에서 당장 우리의 소원은 취업이고 안정이지 ‘통일’은 먼 미래의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고민과 난제(難題)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한 민족이니 꼭 통일을 해야 된다는 감정적 당위에 동의하지 않는다. 서울에서 육로로 베를린까지 갈 수 있다면. 상상력과 가능성을 담은 불편하지 않은 통일 담론도 필요하다. 순탄치 않는 과정과 어려움이 있겠지만 통일이 가지는 경제, 사회적 성장 동력으로서 실리적 순기능이 분명 있다. 우리의 오래된 미래, "독일 통일"의 환경과 과정이 한국의 남북관계와 달라 답습할 수는 없어도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베를린 장벽의 토끼들은 어쩌면 통일을 외면하고 무관심한 우리 혹은 그들 일 수 있다. 이제 토끼들은 장벽을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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