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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린 박하 Sep 24. 2023

베를린을 지켜 준 하늘 길

베를린 공수 기념비(Luftbrückendenkmal)

 




 전쟁 말기부터 시작된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한 민주진영 대 공산진영의 갈등은 1946년을 지나며 더욱 첨예하게 대립한다. 소련은 폴란드, 체코, 루마니아 등의 동유럽 공산국가를 지원해 위성국을 만들고, 미국은 폐허가 된 서유럽을 위한 유럽 부흥계획인 마셜플랜(Marshall Plan)을 통해 그들의 경제성장을 도왔다. 미국의 원조를 받은 국가들은 자유민주주의로 편입되었다. 그중 독일은 미국과 소련, 두 세력의 대치가 확연히 드러나는 곳이었다. 스탈린은 독일을 공산화해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1945년 7월 2차 세계대전 이후 포츠담 협정에서 미국·영국·프랑스·소련 승전 4개국은 패전 독일이 안정될 때까지 독일을 4개의 구역으로 임시 분할점령한다는 이전 얄타회담의 원칙을 재확인했다.


 본디 전쟁의 최종 승리는 적의 수도의 함락이다. 2차 대전 말기 독일의 수도였던 베를린은 연합군의 집중 공격으로 그야말로 초토화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을 제압한 소련군은 서방 연합군보다 독일로 먼저 진입했고, 특히 베를린에서 나치에 대한 보복이라도 하듯 수많은 독일 부녀자들을 무차별 강간하고 재화를 약탈했다. 베를린은 소련 영역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으나 독일의 수도이자 역사적 상징성으로 연합국에 의해 다시 네 토막이 나게 된다. 베를린은 냉전시절 내내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세력다툼과 이데올로기 각축장으로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도시였다.      


 당시 독일에서는 전쟁 이전의 제국 마르크(Reichsmark)를 단일 통화로 사용했으나 조폐 청(造幣廳)을 차지한 소련은 연합군 동의 없이 군비 확충을 빌어 마구잡이로 화폐를 발행했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1948년 6월 독일의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고심하던 서방 3개국은 단독으로 화폐개혁을 추진한다. 新마르크화는 동베를린에 까지 흘러들어 가 유통되었다. 동독 안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으로 베를린을 쉽게 차지하고자 했던 스탈린의 야욕은 위기에 부딪힌다. 이에 소련은 4개국의 베를린 행정위원회 폐지와 베를린의 서유럽 연합국 통치권 무효를 선언하고, 1948년 6월 24일, 서베를린과 연결된 모든 도로와 철도를 포함한 육상, 수상 교통망을 차단하는 이른바 베를린 봉쇄(Berlin Blockade)를 단행한다.


 소비에트 지역을 통해 서베를린으로 의 접근을 보장하는 공식 계약이 없었기 때문에 봉쇄조치에 서방 연합국은 속수무책이었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4개국 모두 전후의 상처를 추스르기도 전에 또다시 전쟁을 치를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서방과의 관계에서 격전지 독일에서 만큼은 우위를 점하고 싶었던 소련은 비교적 평화로운 방법을 택한 것이다. 당시 서베를린에는 36일 치의 식량과 단 45일 분의 석탄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서독에서 모든 물자를 공급받던 서베를린 주민들은 모든 생필품과 전기 공급이 중단되며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서베를린은 소련의 붉은 군대로 둘러쳐진 그야말로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섬이 되었다. 당시 만해도 소련은 봉쇄로 인해 서방진영이 쉽게 서베를린을 포기하게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소련의 갑작스러운 조치에 서방측은 난색을 표했고 백악관에서는 베를린 철수론까지 거론되었다. 그러나 미국 입장에서 소련 영역 한가운데 있던 베를린을 지켜내는 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유럽지역에서 미국이 떠나지 않는다는 결의를 보여주는 상징이자 민주진영의 자존심이 걸린 사안이었다.


 전쟁 후 서방 연합국과 소련은 동독 지역을 통과해 서베를린으로 접근하는 지상 교통권에 대한 구체적 협상은 없었고 다만 1945년 3개의 공중 화랑에 대한 서면 합의만 되어 있는 상태였다. 모든 육로와 수로를 봉쇄당한 서베를린으로 가는 방법은 하늘 길밖에 없었다. 서방 연합국은 서베를린 시민과 현지 주둔한 자국 군대의 안위를 위협받는 상황에서 이들에게 필요한 식량과, 연료를 항공로를 이용해 수송하는 ‘베를린 대공 수작 전(The Great Berlin Airlift)’을 결정하였다. 2백만 서베를린 시민을 위해 일평균 3,600톤이라는 어마어마한 물자를 안전하게 공수할 수 있을지 여부와 소련의 방해 작전도 염려되는 상황이었으나 미국의 트루먼(Harry Truman) 대통령은 서베를린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로 공수작전을 강행했다. 소련군은 작전 초반에 위협 비행, 항공기 추락 시도, 낙하산 투하 훈련, 선전 비방 방송 등으로 미국의 공수 작전을 방해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공 조종사들까지 참가하여 군용 수송기와 화물기 380대를 동원하여, 1일 4,700톤의 식량과 생활용품을 서 베를린의 템펠호프(Tempelhof) 공항이나 테겔(Tegel) 공항까지 공수하였다.


 1948년 템펠호프에 모인 어린이들에게 게일 할보르센(Gail Halvorsen)이란 조종사가 비공식적으로 껌과 간식거리를 나누어 준 미담이 전해지며 미국 전역에서 엄청난 양의 초콜릿, 사탕 등의 후원이 쇄도했다. 모인 간식들을 운반한 리틀 비틀스 작전(Operation Little Vittles)이 펼쳐지며 서베를린 시민들의 환호와 지지를 받았다. 지금도 실제로 그 당시를 기억하는 베를리너들은 달달한 간식 비행기 일화를 제일 먼저 떠올린다. 공수작전 중에는 희생도 잇따랐다. 기상 악화 등으로 항공기 25대가 추락하였고 101명이 희생되었다. 공수작전 절정기에는 원래 필요한 보급 물량을 넘어 기호 물품까지 조달하며 봉쇄 전보다 더 많은 생필품을 서 베를린에 운반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소련은 1949년 5월 12일 공식적으로 봉쇄 조치를 해제했다. 공식적으로 15 개월 후인 1949년 9월 30일에 끝났다.


  베를린 봉쇄를 통해 서방 국가들을 압박하고 베를린을 차지하려던 소련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서방 국가들의 우월한 보급 능력과 미국의 가공할 경제력을 증명한 계기가 되었다. 이때의 경험이 현대적인 항공교통관제가 발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베를린 봉쇄는 종전 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 격화로 인한 실력대결의 장이었고 본격적인 냉전시대를 불러오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후 1949년 9월 미국·영국·프랑스의 3개국 점령지구가 통합해 서독 연방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한 달 뒤 10월에 소련 점령 지구에서 동독 정권이 선포되었다. 독일은 분단되었고, 세계는 동서 냉전체제로 돌입했다.      


 소련군의 봉쇄 종식이 공식 선언된 직후 당시 서베를린 시장 에른스트 로이터(Ernst Reuter)는 곧바로 기념비 설립을 추진했다. 군사적 업적을 빛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대한 평화의 상징을 템펠호프 공항에 세우자는 기획이었다. 베를린 공수작전 시 가장 많이 이용했던 공항이 테겔과 템펠호프(Berlin-Tempelhof)다. 템펠 호프는 공수작전의 중심지였다. 터미널 건물단지는 1.6km 길이의 거대한 캐노피 스타일의 격납고 지붕이 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양쪽으로 뻗은 반원형이 독수리의 날개 모양으로 설계되어있다. 세계적 건축가인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는 ‘템펠호프를 현대 최고의 건물 중 하나로 모든 공항의 어머니‘로 묘사하며 극찬했다.


 공모를 통해 서독의 다양한 예술가들로부터 300개가 넘는 기부 작품들이 접수되었다. 본래 취지를 담은 조각과 건축적 방향을 공유하는 많은 예술적 스펙트럼이 제안되었다. 이 중에는 나치시대 최고의 조각가이자 건축가로 추앙받던 아르노 브레커(Arno Breker)와 그의 제자였던 베른하르트 하일리거(Bernhard Heiliger)의 작품도 들어 있었다. 심사 끝에 총 3개의 수상작이 선정되었고 에드와르 루드비히(Eduard Ludwig)의 작품은 처음에는 공동 2위를 차지했었다. 이후 최종 선정까지 계속해서 결정이 번복되다 마지막에 루드비히의 작품이 최종 선택되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5일 로이터 시장이 상원 의원의 선고를 받았을 때부터 기념비 건설이 끝날 때까지 많은 잡음과 논란이 있었다. 우선 자금이 부족했다. 작가는 작품 제작을 위한 자금 출시까지 몇 달을 기다려야 했다. 다행히 프로젝트 최종 확정 후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4월 7일부터 60명의 건설 노동자가 밤낮없이 일했고 1951년 7월 10일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에른스트 로이터 시장은 개막식에서 "항공 역사에서 이렇게 위대한 시간은 거의 유일무이할 것이다. 기호적으로, 비행기의 3개의 호는 미국, 영국 및 프랑스 국가의 도움을 상징한다. 우리는 서방 진영에 속하고 연합되길 원하며 그중에서도 최고의 대표라고 믿는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이렇게 냉전의 어둠을 뚫고 베를린의 새로운 아이콘, 빛나는 상징물이 탄생했다.



  베를린 공수 기념비(Luftbrückendenkmal)를 만든 에두아르 루트비히(Eduard Ludwig, 1906~1960)는 독일 건축가였다. 그는 튀링겐의 하우젠(hausen)에서 태어나 목수인 아버지 밑에서 수습생으로 목공을 배웠고, 1925~26년 블란켄부르크(Blankenburg)에 있는 예술 학교와 1926년 드레스덴 예술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1928년 그의 예술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결정으로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건축학과에 입학해 1937년 베를린에서 졸업했다. 루드비히는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으로 칭송받는 미스 반 데어 로에 (Ludwig Mies van der Rohe)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제자였다. 그의 건축들은 심플하면서도 기능적 미학이 담긴 바우하우스 특유의 조형미를 지니고 있었고, 스승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가 제작한 50년대 학교용 가구 시리즈는 가벼우면서도 우아한 디자인으로 수십 년 동안 사랑받았다. 1951년에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베를린 봉쇄 기념비(Luftbrückendenkmal)가 세워졌다. 후보작 경쟁에서 무려 324대 1의 경쟁을 뚫고 최종 선정되었다.


  에두와르 루드비히(Eduard Ludwig)의 작품은 높이 20미터에 달하는 철근 콘크리트 조각으로 올라갈수록 벌어지는 다리 기둥 형태를 하고 있다. 세 개의 뼈대는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데 이는 모든 길이 막혀버린 서베를린 시민들을 구원한 유일한 통로였던 3개의 하늘 길을 상징한다. 우선 당시 서독에 있는 프랑크푸르트, 하노버, 함부르크 공항과 베를린의 템펠호프(Tempelhof), 가토우(Gatow), 테겔(Tegel) 공항을 연결하는 3개의 항공 통로를 굽은 아치형으로 형상화했다. 기념비 밑동에 32cm 높이의 청동 밴드에는 공수작전 도중 목숨을 잃은 70명의 조종사들의 이름과 비문이 적혀있다. 이는 베를린 봉쇄 기간 동안 서 베를린 시민들의 생존을 보장해 준 하늘 길을 상징한다. 조형물의 모양과 당시 시민들의 기근을 해결해 준 의미를 더해 베를린 사람들에겐 기아 갈퀴(Hungerharke), 기아 발톱(Hungerkralle)라고도 불리며 베를린의 관광명소로 기념우표의 모델로도 사용되었다.


 "그들은 공수작전 복무 중 베를린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1948/1949 “

Sie gaben ihr Leben für die Freiheit Berlins im Dienste der Luftbrücke 1948/49     


 원래는 항공기 건설과 관련된 알루미늄 피복 구조를 계획했으나 당시 전후 경제상황도 좋지 않았고, 제작비용과 재료도 부족했다. 기술적인 한계까지 부딪히며 결국 작가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철근 콘크리트에 만족해야 했다. 기념비 바닥 부근에 기억의 동판 추가 설치 제안도 최종적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대신 작품 아랫둥을 30센티미터 높이의 청동 테이프 형태로 둘러 그 위에 공수작전 중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겼다. 작가는 이 비문 제작을 위해 특별한 산세리프체(sans serif)를 디자인했다. 제작 시기와 위치, 선정 과정과 완성까지 순탄하지 않은 과정을 겪었지만 베를린의 특별한 역사의 한 장면을 기억하는 의미 있는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평생 독신으로 지낸 루드비히는 그의 나이 54년 되던 해 아부스(AVUS)에서 빨간색 스포츠카를 몰다 사고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았다. 공교롭게도 자신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인 공수 기념비의 뻗은 도로 모양을 한 장소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베를린 외에 공수작전에서 중요 역할을 담당했던 1985년 프랑크푸르트 공항의 이전 공군 기지와 1988년 칠레(Celle)의 공군기지에도 베를린 기념비와 같은 모양의 크기가 작은 복제품이 세워져 있다. 베를린 봉쇄는 전후 유럽에 대한 경쟁 이데올로기 및 경제 비전을 강조하는 역할을 했으며 1955 년 몇 년 후 서독을 NATO 궤도로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P.S : 템펠호프 공항

 베를린 공수 작전 때 큰 역할을 한 연고로 공수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템펠호프 공항은 1923년 10월 8일 베를린 최초의 공항으로 문을 열었다. 중세 템플러 기사(Templar Knights) 소유의 땅에서 기원한 이름으로 18세기에는 프로이센 군의 퍼레이드 장소로 1909년 비행 선구자 오빌 라이트(Orville Wright)가 2인승 동력비행기를 선보였다. 1926년 독일의 대표 항공인 루프트한자(Deutsche Luft Hansa)가 세워졌고, 1930년대 중반 나치의 게르마니아 계획의 일환으로 에르찌 쟈게빌(Erzi Sagebiel)에 의해 대대적인 증축 작업이 이루어졌다. 공항은 활주로가 좌우로 길어야 이착륙에 좋은데 템펠호프는 원형에 가까워 활주로가 짧아 대형 항공기가 출입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구조적 문제와 도심 한가운데 있어 생기는 소음발생, 효율성 문제 등으로 공항은 2008년 10월 문을 닫게 되었다. 2015년 유럽발 난민 사태의 영향으로 템펠호프 일부는 긴급 난민 캠프가 되었다. 나치의 유산과 냉전의 상처가 남아있는 사연 많은 공항은 유럽 최대의 난민 수용소가 되었다. 주정부의 주택개발 건설 계획이 있었으나 주민들의 투표로 막아냈고 현재는 베를린 시민들을 위한 멋진 공원으로 거듭났다. 380헥타르 면적의 열린 공간은 뉴욕 센트럴파크이나 베를린의 유명 공원 티어가르텐보다도 크며 베를리너들이 좋아하는 최대의 도시공원이다. 터미널과 활주로도 그대로 남아있고 거친 풀이 자라 있어 화려하진 않지만 시민들은 공항이라는 공간의 기억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주말이면 산책 나온 시민들과 레저 스포츠와 조깅, 스케이트 등 저마다의 방법으로 공원을 즐기려는 이들로 북적인다. 광활한 활주로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거나 끝도 없이 먼 지평선 노을을 바라보면 도심 한 복판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해방감과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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