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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린 박하 Sep 24. 2023

버려진 방

아우슈비츠 이후, 산 자의 소명은 기억하는 것

   


 쇼이넨피어텔(Scheunenviertel)은 베를린 미테(Mitte) 지구의 로젠탈러 슈트라세(Rosenthaler Straße)와 하케셔 마크(Hackescher Markt)의 중세 Altberlin 지역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웃한 슈판다우어 교외(Spandauer Vorstadt)와 함께 유대인 문화 및 상업 생활의 중심지였다. 독일어로 쇼이네(Scheune)는 곡물 창고라는 뜻이다. 쇼이넨피어텔(Scheunenviertel)은 1672년 성벽 바깥에 지어진 대형 건초 헛간에서 유래되었다. 예전 대형 가축 시장이었던 알렉산더플라츠(Alexanderplatz)에서 필요한 건초들은 저장하는 곳이었다. 1737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베를린 유대인들이 이곳에 정착하도록 했다. 동유럽에서 온 유대인 이민자의 비율이 높았고 제2차 세계 대전 전까지 슬럼가로 여겨졌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활발한 무역과 문화적 부흥을 이루고 20세기까지 빠른 산업화로 경제성장을 이뤘다. 그러나 나치 정권이 들어서며 유대인 차별정책으로 이곳의 유대인들은 강제 추방당하게 된다. 동독 시절까지도 전쟁의 상흔이 많고 낙후되어 베를린 어느 지역보다 집세가 상대적으로 저렴해 가난한 예술가, 장인들과 창의적인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1938년 포그롬의 밤 2주 전, 약 10,000명의 유태인 시민이 Scheunenviertel에서 추방되었다. 11월 9일 "수정의 밤(Reichskristallnacht)"기간 동안 새 회당이 나치에 의해 불에 탔다. 쇼이넨피어텔은  나치가 유대인들을 강제 수용소로 추방하기 시작한 1933년까지 많은 동유럽 유대인들의 고향이었다. 갱스터, 공산주의자, 나치, 매춘부, 유대인들이 한때 같은 도로를 공유했던 베를린 중심부의 광장. 한때 동부 유대인 이민자들이 거주하고 갱스터와 매춘부 사업을 하던 게토였다. 그러나 악명 높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소위 Scheunenviertel은 정치와 예술의 중심지였습니다. 독일 공산당은 광장을 본부로 사용했다. 히틀러가 집권 한 직후 이 동네는 나치 베를린의 상징이 되었다. 전쟁 후 완전히 파괴된 이 지역은 소련이 점령했다. 스탈린의 사진이 정면을 장식했다. 예술가들은 오래된 집으로 이사했다. 오늘날, 이 지역은 새로운 베를린의 중산층 힙 스터 지역이다. 이 일대는 지금 베를린 출신 디자이너들의 아지트로 각광받고 있다   

  

 전쟁으로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지만 여전히 역사적인 발자취를 따라 걸을 수 있다. 독일 통일 이후 Scheunenviertel은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세련된 지역이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Rosa-Luxemburg-Platz)의 폭스뷰네(Volksbühne, 국민극장)와 같은 유명 건축과 역사적 기념물이 광범위하게 개조되어 있다. 하케셔회페(Hackesche Höfe)에 바로 연해있는 슈바르젠베르크(Schwarzenberg Haus)에는 멋진 벽화들과 아티스트 아틀리에, 영화관, 안네 프랑크 박물관 등이 있다. 인근 오라니엔부르거(Oranienburger Straße) 거리에 신 시나고그(Neue Synagoge)는 1866년 베를린 유대인 공동체의 주요 예배 장소로 지어진 회당이다. 전쟁 피해는 복원되었고 현재는 회당 역할을 하지 않고 유대인의 역사에 관한 전시 등이 열린다. 바로 옆 아우구스트 슈트라세(Auguststraße)는 베를린 비엔날레가 열리는 KW Institute을 비롯해 수많은 현대미술 갤러리들이 운집해 갤러리 거리로 알려져 있다.



 걷다 보면 독특한 붉은 벽돌 건물이 눈에 띄는데 1927년 알렉산더 비어(Alexander Beer)가 설계한 前유태인 여학교 (Jüdische Mädchenschule)다. 여기에는 미쉐린 원스타 파울리 잘(Pauly Saal) 레스토랑과 최고의 파스트라미(pastrami)를 맛볼 수 있는 "모그앤멜쩨(Mogg und Melzer)" 등의 유명 맛집과 갤러리 등이 자리하고 있다. 조금 더 가면 역사적인 거울 댄스홀 모습 그대로 간직한 아름다운 ‘클래현 발하우스’(Clärchen's Ballhaus)를 만날 수 있다. 거리 곳곳에 독특한 갤러리, 편집샵, 서점,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가득하다. 시간을 내어 쇼이넬피에텔 주변을 소소히 산책하기에 좋다.     


쇼이넨피어텔 가장 중심에 코펜 플라츠(Koppenplatz)라는 작은 공원이 있다. 그로쎄 함부거슈트라세(Große Hamburger Straße)와 리니엔슈트라세(Linienstraße) 그리고 아우구슈트라세(Auguststraße)와 접해 있다. 1853년 8월 12일부터 코펜 플라츠로 불리게 되었고, 베를린 시 수비대장(Stadthauptmann)이자 시의원(Ratsverwandten)이었던 크리스티안 코페(Christian Koppe,1669~1721)의 이름에서 기원한다. 코페는 1696년 이 지역을 매입해서 1704년 베를린 빈민 행정부에 기부했고 1853년까지 가난한 시민들과 기독교 묘지에 묻히지 못하는 자살자들 위한 공동묘지(Armenfriedhof)가 지어졌다. 1721년 크리스티안 코페도 유언대로 이곳에 묻혔는데 코펜 플라츠의 건물 정면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슈튈러(Friedrich August Stüler)의 코린트식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다. 오늘날 다른 묘지들은 모두 없어졌지만 코페의 묘비는 여전히 남아 있다.     


  몇 개의 벤치와 나무들 사이로 난 좁은 길, 작은 녹지 공간 코펠 플라츠 중앙에 뜬금없이 낯선 오브제 하나가 눈길을 잡는다. 7개의 어린 나무들이 마치 벽처럼 둘러져 있고 오크색 어두운 목재 느낌의 테이블 하나와 2개의 의자가 놓여있다. 그중 하나는 바닥에 넘어져 있다. 오래된 목재 테이블과 바닥은 사실 청동으로 주조되어있다. 평범한 가정용 가구들보다 약간 큰 사이즈인 데다 이런 공간에서 만나기에는 생소한 느낌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탐정처럼 사건 현장에 놓인 증거물을 단서로 사건 당시를 상상해본다. 크리스마스를 한 달 앞둔 어느 날 비가 부슬부슬 내리지만 집 안은 따뜻한 기운이 감돈다. 언제나처럼 저녁을 먹고 난 후 하루 일과를 나누며 주인집 내외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심상치 않은 요즘 상황과 걱정의 대화가 오간다. 그러다 갑자기 거칠게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무례한 침입자들은 동의도 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흙이 잔뜩 묻은 군홧발에 거실 바닥은 금방 더려워졌다. 군복을 입고 총을 든 그들은 수긍하기 어려운 이유로 그들을 연행하려고 한다. 저항할 새도 없이 무자비하게 제압당한 남편은 체포되고 겁에 질린 아내는 살려 달라 울부짖는다. 저항하는 이들은 무자비하게 강제 연행되고 의자는 넘어지고 집안은 난장판이 되었다. 그들은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갔고 집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참혹하고 싸늘히 버려진 공간, 넘어진 의자는 결코 다시 세울 수 없었다. 더없이 잔인하고 비극적인 날이었다.    

    

 이 작품은 나치시대에 쇼이넨피어텔(Scheunenviertel)에서 추방된 수많은 유대인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의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 평범한 가정용 가구는 무수히 무고하게 쫓겨 난 유대인들을 연상시킨다. 넘어진 한 개의 의자로 일상의 광경은 비극을 암시한다. 어깨너머로 뒤돌아 보는 그녀의 시선, 뒤집힌 의자에서 들려오는 쿵쾅거리는 소리, 마지막 식사를 나눈 테이블에 두려움의 땀 냄새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폭력이 있었고 가해자는 숨겨져 있다. 희생자들은 추방되고 납치되고 죽임을 당했다. 살인 사건 이후의 공허함을 이보다 더 설득력 있게 묘사할 수 있을까?


 ‘버려진 방(Der verlassene Raum)’은 1991년 칼 비더만(Karl Biedermann)과 조경가 에바 부츠만(Eva Butzmann)이 함께 했다. 비더만(Karl Biedermann)은 1947년 베를린 출생으로 드레스덴의 미술대학(HfBK와 Kunsthochschule Weißensee)에서 수학했으며 1978년부터 베를린에서 조각 작업을 하고 있다. 베를린 여러 공공장소에서 그의 작품을 찾을 수 있다. 시온교회(Zionskirche) 앞에 독일 루터교회 목사이자, 신학자이며, 반 나치 운동가인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를 기리는 청동작품, 체크포인트 찰리 근처 찜머 슈트라세(Zimmerstrasse)에 1962년 장벽을 넘나 숨진 벽돌공 페터 페히터(Peter Fechter)를 위한 기념비도 비더만의 작품이다. 그는 독일 역사의 주요한 장면과 인물들을 기리는 공공미술 작품들을 많이 제작해 왔다. ‘버려진 방’은 작품과 주변 조경이 어우러져 자연과 조각이 결합된 하나의 조용한 기념관이 되었다. 비더만의 디자인은 1988년 베를린의 1938년 11월 9일 포그롬(pogrom)의 밤 50주년을 맞아 개최된 기념비 공모전에서 우승했다.


 실제 작품은 8년 후 1996년에서야 코펜 플라츠(Koppenplatz)에 세워졌다. 작품 바닥은 빗살무늬의 목재 바닥으로 보이나 가구들과 마찬가지로 청동으로 제작되었고, 네모진 바닥 프레임을 따라 노벨상 수상자 넬리 작스 (Nelly Sachs)의 시구절이 새겨져 있다. 구체적인 시의 내용과 의미를 들여다보기 전 작품의 배경이 된 일명 ‘수정의 밤(Kristallnacht)‘이 일어난 1938년으로 먼저 되돌아가 본다. ’ 수정의 밤‘은 1938년 11월 9일과 10일에 발생한 폭력적 반유태주의 포그롬(pogrom)을 의미한다. 당시 공격받은 유대인 가게의 유리 파편들이 거리에 가득 차 수정처럼 반짝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이는 지극히 미화된 표현으로 독일에서는 공식적으로 ‘포그 롬(대박해)의 밤’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나치의 대대적인 유대인 추방정책으로 고통받는 가족들의 부당함에 분노한 폴란드 청년 헤어셸 그린츠판(Herschel Grynszpan)이 1938년 11월 7일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 직원 에른스트 폼 라트(Ernst vom Rath)를 저격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것을 빌미로 나치 정권은 언론을 통한 대대적인 과장보도와 선동으로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폭력을 가중시켰다. 나치 대원(SA: Sturmabteilungen)들과 독일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유대인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했다. 수많은 유대인 상점들이 약탈당하고, 아파트 및 유대인 묘지가 파괴되었고, 대부분의 시나고그(유대교 사원)가 불길에 휩싸였다. 살던 집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두드려 맞고, 굴욕 당하고 수용소로 넘겨져 죽임을 당했다. 포그롬(유대인 박해)의 밤은 유럽에서 가장 큰 집단 학살의 공식 신호탄이었고, 나치의 반유대인 정책의 중요 전환점이 되었다. 독일인들은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무너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많은 이들은 환호하고 소리쳤고, 어떤 이들은 무관심하게 바라보거나 외면했다.      


 다시 버려진 방의 쪽모이 세공 마루 바닥에 넬리 작스(Nelly Sachs, 1891~1970)의 시로 시선을 돌려 본다. 네 귀퉁이에는 독일어로 쓴 “오 굴뚝이여(O die Schornsteine)”라는 시의 중간 부분부터 오롯이 새겨져 있다. 1947년 동독에서 첫 출간된 Leonie (Nelly) Sachs의 컬렉션 “죽음의 아파트에서(Der Gedichtband In den Wohnungen des Todes)‘란 시집의 표제시였고, 1967년 영어 번역본 작품집 제목이기도 하다. 작스는 베를린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의 딸로 태어나 음악과 무용을 배우고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읽으며 문학적 소양을 키웠다. 17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독일 낭만파와 스웨덴의 S.O.L. 라게를뢰프(Selma Ottilia Lovisa Lagelöf)의 영향을 받았다. 독일의 유대인 추방과 학살을 피해 1940년 어머니와 함께 스웨덴으로 탈주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나치 시대 유대인의 비참한 현실과 구약성서 속 유대민족의 비극적 운명이 겹쳐진 예언자, 묵시록 분위기의 슬픔을 탁월하게 표현해낸 문학적 공로로 1966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나치시대 상황을 형상화해 억압과 부자유에 따른 고통과 절망, 구원에 관한 시를 많이 다뤘다. 그녀 자신이 유대 민족의 비극과 동일시되었고 동시에 인류 보편적 고통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연작시 형태나 제명(題名) 없이 시집명이나 페이지로 구분되는 시를 썼다. 죽음은 그녀의 선생이었고 그녀의 은유는 상처였다. 희생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적에 대한 증오 대신 깊은 슬픔과 용서가 있다.


 비더만의 작품 속 작스의 시 ’ 굴뚝이여 ‘는 나치 수용소에서 죽어간 수많은 유대인들의 고통과 그들의 영혼을 위로한다. 간결하면서도 부드럽고 신비로운 이미지가 결합되어있다. 이스라엘의 육신이 죽음의 수용소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처럼 떠오르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기 19장 26절     


오 굴뚝

의미심장하게 꾸며진 죽음의 집에

이스라엘의 육체가 공기를 통해

연기가 되어 올라갔을 때

별 하나가 굴뚝청소부를 맞이했을 때

별빛이 꺼져버렸나

아니면 그건 햇살이었던가?     

오 굴뚝!

예레미야와 욥의 먼지를 위한 자유의 길

누가 도대체 굴뚝을 만들어내었나

난민을 위한 길을 연기로 만들었는가     

오 죽음의 집

너무나 매력적으로 준비된

다른 때라면 손님이었던 집주인을 위해

오 당신의 손가락     

문지방을 깔고

그것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칼처럼

오 굴뚝이여

오 손가락이여

이스라엘의 육신은 공기를 통해 연기처럼 사라지네          


 제목의 굴뚝은 유대인 수용소의  화장시설을 말한다. 보통 굴뚝이 있는 집은 생계를 위해 지어졌지만 여기선 접대와 환영 대신 위험하고 잔인한 파괴와 살육을 위해 세심하게 준비된 죽음의 위선이다. 유대 민족이 태워지는 용광로의 연기는 첫 번째 연에서 먼지가 되는데, 연이어 예레미야와 욥이 등장한다. 일련의 사실적인 이미지는 작스의 다른 작품에서도 드러나는 산재된 종교적 시퀀스와 대조된다. 종교적 시퀀스로서 홀로코스트(Holocaust)의 사상자는 예레미야와 욥과 연결된다. 성경에서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로 불리며 정치적 추방자로, 극단의 고통과 축복을 받은 욥은 사회적 인물로 나온다. 둘은 모두 하나님의 공의를 쉽게 추측하지 않으며 계속해 질문하고 때론 원망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는다. 시인은 유대인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이는 재, 먼지, 연기로 분해 더 구체적으로 식별 가능하게 되었다.


 화장터의 굴뚝은 시체의 연기를 공중으로 이끌어 이내 검은 구름처럼 가득 차 별빛 또는 햇빛마저 어두워졌다. 시인과 독자 모두가 이제 범죄를 목격하고 있다. 육체가 연기에 녹고 도로가 먼지로 구체화되는 역동적 이미지의 변형이 시 전체에서 일어난다. 세 번째 연에서 ‘손님이었던 집주인’은 수용소에 일어난 사건을 명확하게 밝힌다. 자신의 삶을 저주한다는 파우스트(Faust)의 불만에 메피스토(Mephisto)는 "그러나 죽음은 결코 환영받는 손님이 아니다."라고 답한 것처럼 죽음은 그저 반기지 않는 ‘손님’ 일뿐이다. 그녀의 시에서 "게스트"는 "호스트"가 되고 방문자인 죽음은 편재하는 소유자로서 "주인"이 된다. 연이어 언급된 ‘손가락’은 유대인의 생사를 결정하는 나치의 잔인한 지침을 의미한다. 절멸 수용소에 처음 온 유대인들은 생체실험이나 강제노동에 쓰일지 가스실로 갈지가 바로 결정되는데 이는 독일 장교(Sturmbannführer)의 손가락에 달려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는 문턱 위 칼처럼 쉽고도 잔인했다. 마지막은 짧은 애도로 마무리된다.   

  

시의 제목 아래 바로 인용된 욥기 19장 26절은 성서학자들 사이에도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의견이 분분한 난해 구절이다. 일부는 내세에 대한 희망이나 부활에 대한 예시라고 말하기도 한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육체가 공기를 통해 연기로 변태 하는 죽음의 고통 이후에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희망을 두었던 욥을 상기했다. 욥기는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고통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다. 살면서 부딪히는 불행이 개인의 잘못에 상응하는 벌이 아닐진대 이해 불가한 신의 섭리 안에서 고난의 의미를 사유(思惟)하게 한다.     

 칼비더만(Karl Biedermann)의 버려진 방(Der verlassene Raum)으로부터 화려했던 베를린의 파란만장한 역사의 장소 쇼이넨피어텔(Scheunenviertel), 나치 유대인 박해의 시발 크리스털 나흐트(Kristallnacht)와 아도르노의 명제에 반박한 유대 시인 넬리 작스(Nelly Sachs)의 시까지 인권이 무너지는 잔혹한 역사 앞에 인생의 고통과 불행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Nach Auschwitz ein Gedicht zu schreiben ist barbarisch.

: 아우슈비츠 이후, 시작(詩作)은 야만이다. 


아우슈비츠란 인간 존엄이 무너진 시대, 추락한 영혼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이 아닌가. 아도르노의 시 무용론에 대한 주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마주하고 아픔에 언어를 주었던 프리모 레비(Primo Levi), 넬리 작스 등 많은 문인들에 의해 반박되었다. 그것이 화해가 되었던 원한의 수사(修辭)가 되었던 인간의 잔혹성 앞에 천근같이 무거운 괴로움은 표현의 권리를 지니고, 암울하고 참혹한 역사의 반복 속에서 여전히 예술의 가능성은 유효하다. 온전한 경험의 여부나 사변적, 객관적 서술의 한계를 떠나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방식은 과거의 해석이자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피해자로서 유대인의 고통과 가해자로서 독일에의 규탄, 선과 악의 이분법적 닫힌 프레임은 한계가 있다. 우리는 양 당사자가 아니면서 동시에 그 모두이기도 한 ‘인간’이다. 아우슈비츠의 참상이 도구적 이성을 강조한 필연적 결과라고 했을 때 오늘날 개인의 고유함이 통계와 교환가치로 환산되어 관리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홀로코스트의 암울(暗鬱)은 걷히지 않았다.


 3차 대전을 방불케 하는 코로나 판데믹 속에서도 여전히 피부색, 종교, 인종의 다름으로 차별과 분쟁은 끝이 없다. 나의 악의 없는 일상에 의해 발현되고 지속되는 악의 평범성은 인류 보편의 문제다. 누군가는 절망에 던져진 인간의 유일한 구원은 예술이라 하고 어떤 이는 뛰어넘을 수 없는 운명이라 자포한다. 산 자의 소명은 기억하는 것이고 정의는 그곳에 살아 있다. 망각은 그래서 위험하다. 역사에서 배우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과거의 아픔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메피스토에게 영혼을 팔아도 될 만큼 행복하고 멋진 삶의 한순간을 멈춰 세우는 파우스트처럼.


"멈춰라 순간이여, 너 참 아름답구나 “ Verweile doch! Du bist so schö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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