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ABAJUNG Feb 09. 2018

사직서

2017년 9월 19일

 머릿속이 복잡해서 터져버릴 것만 같다. 하루 종일 싱숭생숭 하단 말만 하고 다녔다. 그래, ‘싱숭생숭’ 이란 말이 맞을 것이다. 마음이 들떠서 갈팡질팡하고 어수선하다. 그렇게 나는 오늘 사직서를 냈다.


 사직서를 내기 며칠 전, 중국 퀵턴 비행을 다녀오고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팀장님을 붙잡았다.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니 흡연장소로 가서 이야기하자고 하신다. 뒤따라 가는 동안 온갖 감정과 생각이 머리와 가슴을 휘젓고 다니며 나를 못살게 군다. 오늘따라 팀장님 기분이 좋아 보이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마치고 담배 불을 붙이시며 할 말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는데 꼭 웃는 사람 얼굴에 침이라도 뱉는 기분이다. 두 손에선 땀이 흐르고 어쩔 줄을 몰라하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팀장님. 먼저 좋은 이야기가 아닙니다만, 오랫동안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제 인생의 방향을 찾았고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돌아오는 팀장님의 첫마디는 "일단 축하한다’였다. 그리고는 "인생 선배로서 뭘 하려고 그만두는 건지 궁금한데 들어볼 수 있을까?"라고 하셨고 나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건 무슨 감정일까. 감정이 요동치는데 이게 무엇인지 정확히 짚어낼 수가 없다. 아쉬움? 두려움? 기쁨? 걱정? 아쉽다면 아쉽고 두렵다면 두렵고 기쁘다면 기쁘고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어제는 중국 무단장으로 비행을 다녀오면서 부팀장님께도 이야기를 드렸다. 이제 남은 건 정말 ‘사직서’라는 것을 작성할 때이다. 사실 대한항공에 들어오기 전에도 IT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나오긴 했지만 확실히 그때와는 비교하지 못할 감정의 소용돌이다. 수십 번 다짐했고 주변의 설득에도 흔들리지 않을 신념을 갖고 있지만, 막상 회사에 들어오니 엄청나게 긴장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브리핑실로 올라갔다. 바로 눈앞에 동기 형이 비행을 가기 위해 브리핑 준비를 하고 앉아있다. 유니폼이 아닌 사복을 입고 회사에 온 나를 보고는 환하게 웃으면서 "사직서 쓰러 왔어?"하고 장난을 친다. 그리고 이내 진짜 사직서를 쓰러 온 것을 확인하고는 표정이 적잖이 심각해진다. 드디어 그동안 "퇴사하겠다"며 떠들고 다닌 것에 대한 실감을 한다. 승원 팀장님을 뵙고 사직 의사를 밝히니 두 장의 서류를 건네주신다. 사직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서류에는 중간중간에 빈칸이 있는데, 그곳에 이름과 사번 등을 적고 퇴직사유에는 ‘개인사정’이라고 적었다. 나는 가끔 긴장이 될 때면 손을 많이 떨곤 하는데 보통 어려운 술자리에서 술을 따를 때 그것이 아주 잘 드러난다. 그러나 펜을 집은 손이 떨리는 것은 처음이었고, 나는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꾹꾹 눌러 담아 한 자 한 자 무심한 듯 적어냈다. 승무원에게 사우론의 눈과 같은 존재인 승원 팀장님의 컴퓨터에 사번을 치니 9월 한 달 스케줄이 나왔고 "언제까지 일하고 싶어?"라고 물으셔 나는 29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날 이요."라고 했다. 그렇게 나의 퇴직절차는 5분 만에 끝이 났다. 


 인터넷에 보면 우스갯소리로 "들어올 땐 마음대로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대한항공 객실승무원의 경우는 그러지 않은 것 같다. 승무원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대한항공이라는 회사에 들어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들은 나를 검증하기 위해 몇 달에 걸쳐 서류와 면접을 진행했고, 그것도 모자라 입사 후에는 ‘인턴’이라는 이름표를 달아 놓고 2년에 걸쳐 나를 평가했다. 그러나 퇴직절차는 나의 긴 시간 고민을 민망하게 만들 정도로 허무하고 간단했다. 두 장의 서류와 5분의 시간으로 내 지난 2년 반의 세월을 깔끔하게 지웠다. 집에 가기 위해 차에 타고 스케줄을 확인해 보니 29일 이후의 비행은 이미 정리가 되어 있었다. 


 그동안 퇴사를 결정하기까지 많은 사람과 이야기하지 않았다. 생각과 고민이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처음에는 사방팔방 고민을 들어 달라고 사정하다가 점차 말을 아껴왔다. 결국 대답은 내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머릿속의 요동침을 털어놓을 곳이 없어 시작한 블로그 또한 생각이 잘 맞는 사람들에게만 주소를 공개했다. 사실 생각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여 보여준다는 것이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퇴사 날짜가 확정되고,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동기들에게 알리고 인스타그램이라는 공간에 그것을 공유했다. 생각보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응원해주었고, 관심을 가져주었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비로소 꽃이 되었다"라고 했던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응원이 이런 결정을 빛나게 만들어 주었다. 어리석게도 나는 회사에 더 이상 미련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생각을 마치고 어느 날 주변을 돌아보자 엄청나게 크고 빛나는 보석들이 놓여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다. 대한항공에 입사하고 가장 먼저 만난 동기들, 비행을 하며 만난 선배와 후배들 그리고 존경하며 따르는 사무장님들이 빛을 내며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이제 유니폼을 벗어던지며 아쉬울 것이 없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두고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오랜 고민 끝에 9월 29일부로 대한항공을 퇴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번 더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었네요. 할 일이 있어서 나오는 것은 아니고 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어요. 1년 정도 아시아 육로 여행을 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을 좀 해보려고 해요. 그 후로 딱히 정해진 계획은 없습니다. 회사를 떠나면서도 아쉽지 않은 건 제 곁에 훌륭하고 좋은 동기와 선후배님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응원해주기 때문이에요. 이들이 없다면 제 지난 2년 반의 기간이 무의미 해질 정도예요. 오늘의 선택이 어떤 내일을 만들지는 모르지만, 제가 한 선택을 옳게 만드는 것은 온전히 저의 몫인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철학과 신념을 갖고 살듯, 저도 저만의 그것들을 지켜나가며 다시 한번 세상에 도전하겠습니다. 다들 파이팅해요!



작가의 이전글 구구절절 쓰면서 느끼는 요즘의 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