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문제를 보았을 때의 당황을 기억한다. 국어 문제에 그래프라니, 경제나 과학 지문도 아니고 문학, 그것도 현대시에 대한 문제에서 그래프라니. 그러나 잠깐의 당황을 가라앉히고 다시 보니 얼토당토않은 문제는 아니었다. 교과서에 실린지 오래된 작품들의 공통점은 비슷한 설명이 새로운 표현으로 바뀌거나, 새로운 유형의 문제들이 시도된다는 점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조차도 고등학생 때 저런 유형의 문제를 본 기억이 없다. 같은 내용을 텍스트로 풀어 놓은 문제는 본 기억이 난다. ‘시에서 시상이 전환되는 부분의 첫 어절을 찾아 쓰시오.’와 같은 문제였을 것이다. 새로운 유형의 문제를 학생들에게 해설하면서도 축 안에 갇힌 선으로 표현된 감정이 나는 여전히 어색하다.
백석의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은 1948년 10월 『학풍』에 발표된 시다. 현재는 고등국어 미래엔 등의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다. 학생 때도 만났고, 지금도 정기적으로 강의하고 있는 이 시에서 눈에 띄는 문장을 만났다.
몇 번이나 이 시를 강의했던가.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장이다.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은 삶. 때로 나는 삶에게 멱살을 붙잡혀 끌려간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10대 때는 그저 공부했다. 아니, 사실 그 때도 성실하지는 않았다. 다른 것보다 공부에 재능이 있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20대 초반에는 처음 맛본 자유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저질러 놓은 인간관계에 허덕이며 흥청망청 술을 마셨다. 중반에는 다들 그렇듯 군대에 다녀왔고, 졸업을 했고, 나름의 진로를 정했다. 그리고 지금 20대 후반에 들어서는 나이. 누군가보다는 젊은 나이일 수도, 누군가에게는 선배일 수 있는 나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이루고 싶은 명확한 목표도 없고, 그것을 창피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물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지만 그들에게 ‘너희 성적을 1등급으로 만들어주마’라는 공수표를 남발하고 싶지도 않고, ‘대학에 가면 인생이 달라져’라는 책임지지 못할 약속은 더욱 더 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는 나의 이런 태도가 학원 강사가 어울리지 않는다 할지 모르겠지만, 직업을 위해 나를 바꿀 정도로 나는 부지런하지 않다. 나는 그저 삶에게 멱살 잡힌 채 시간을 따라 나이 들어가며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요즘은 삶의 귀찮음이 종종 목을 조인다. 고작 귀찮음을 화자의 절망과 비교할 수 있느냐고? 삶의 무게감은 각자가 다르다. 귀찮음이 낳는 무기력과 절망은 자신을 버겁게 만든다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삶의 무게감
학생들에게 강의하며 얘기했다. 때로 삶에 짓눌려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운 때가 종종 있지 않느냐고. 어떤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어떤 학생들은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이 고등학생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성인들이 그렇듯 학생들도 천차만별이다. 취향부터 표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다르다. 스타 강사 김미경은 사춘기는 자기 인생에 대해 스스로 묻는 시기라고 얘기했다. 동의하지만, 한국의 고등학생들에게 물음의 시간이 허락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성적, 친구, 불투명한 미래, 부모 등 그들에게도 나름의 고민이 있다. 나는 삶에 짓눌린 경험에 공감하는 학생들보다 그렇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더 마음이 쓰였다. 그들도 언젠가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될 텐데, 공감했던 학생들보다 훨씬 힘들어 하지는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식의 명확한 전달을 위해서는 어휘가 중요하다. 온갖 예시와 설명을 곁들여 이해시켰더라도 그것을 언어로 정리하지 않으면 암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 감상을 추스르고 화살표를 이어 이렇게 정리했다. ‘삶의 무게에 짓눌린 화자’. 내가 써놓고도 저 말이 문장을 잘 설명하고 있는지 의심이 들었다. 역시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가 더 좋다.
Q. 다음 시에서 그래프의 상승이 시작되는 어절을 찾아 쓰시오.
A. 그러나
(‘그러나’를 기점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던 화자는 ‘고개를 들’고 운명에 대한 생각을 통해 극복의지를 다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