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을 업으로 삼으며 느낀 것들

사랑이 시작되면 반드시 이별이 온다

by 김열매

2024년 1월부터 8월까지 짧은 기간이었지만 반려동물 장례지도사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돌아보면 그 일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한 생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자리였다.


우리 집은 총 세 마리의 강아지와 인연을 맺었다. 첫 번째 강아지는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아빠가 친구에게 받아온 시츄였다. 시츄라는 종의 특성상 온순하고 애교도 많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당시 엄마는 집에서 강아지를 기르는 것을 못마땅해하셨고, 형편도 넉넉하지 않았기에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앞집에 입양 보내야 했다.

그 뒤로 강아지와는 인연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열네 살 때 우울증이 극심했던 나를 위해 엄마 아빠는 한 번 더 강아지를 들이는 것을 허락했다. 아빠는 원래 동물을 좋아했지만 엄마는 아니었다. 그래서 사실상 엄마의 허락이 가장 중요했다. 지금 생각해야 소용없지만, 그때 강아지를 키우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를 가끔 한다. 반려동물을 키운다는 건 단순히 귀엽고 예쁘고 사랑해 주는 일이 아니라, 언젠가 맞이하게 될 이별까지 책임지는 일이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반려동물은 장난감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이다. 예전에는 ‘애완동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애완(愛玩)의 뜻이 ‘가지고 놀다’라는 뜻을 가진 ‘놀이 완(玩)‘이라는 이유로 점차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요즘은 즐거움의 대상이 아니라 가족, 동반자라는 의미로 반려자(伴侶)로서의 동물이라는 뜻을 담은 반려동물을 사용한다. 과거 소유의 개념이었던 인식이 현재는 가족으로 변화한 것은 사회적으로도 큰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2019년 봄, 중학생 시절부터 10년 동안 동고동락한 아이를 떠나보내게 되었다. 처음 ’죽음‘으로서 맞이해 보는 이별이었던 탓에 그 충격은 꽤 오랫동안 마음에 머물렀다. 반려동물 장례식장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경황이 없었던 탓에 장례식장 직원분들의 안내에 따라 멍하니 절차를 따라갔던 기억만 남아있다.

화장된 아이의 유골을 확인해 보겠냐는 직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아직도 뇌리에는 내 강아지의 두개골 모습이 훤하게 그려진다. 당시에는 감각이 없어 몰랐지만 꽤 충격적이었던 탓일 것이다.


그날 이후 우리 가족은 모든 정성을 집에 남아있는 마지막 아이에게 쏟게 되었다. 이 아이가 우리 집의 마지막 강아지라고 다짐하면서.




코로나 시기에 외로움이 많아진 사람들이 반려동물을 입양하는 일이 많았다. 수많은 보호자와 동물들이 함께 살았고, 그만큼 이별의 순간도 늘어났다. 나도 그 시기, 진지하게 반려동물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직업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나는 일에 애정을 가지고 진심으로 근무할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싶었다. 정보가 거의 없었기에 무작정 자격증 과정을 찾아 등록했다. 민간 자격증이지만 직업 이해도와 취업에는 분명 도움이 되었다.


처음 반려동물 장례식장을 찾았던 5년 전과 달리, 최근에는 여러 업체들이 사업을 확장하는 추세였다. 그 말은 즉, 동물 장례사업이 돈이 된다는 뜻이었다.


근무하게 된 회사는 규모가 작은 곳은 아니었다. 누구나 처음에는 열정이 넘친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됐다면 더더욱.


나 역시 그랬다. 고된 근무 환경과 비합리적인 스케줄이었지만 그냥 버텼다. 버티다 보면 무엇이라도 손에 쥘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근무 6개월이 넘어가자 처음의 감동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회사는 직원을 소모품처럼 다뤘다. 오전 8시 30분에 출근해 오후 11시에 퇴근한 날이 여러 번이었다. 아무리 야근 수당을 챙겨준다고 한들 장기 근무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살은 점차 빠져 최저 몸무게를 기록했고, 주말에 일하고 평일에 쉬는 스케줄 근무가 내 성향과 맞지 않아 우울증까지 도지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체력적인 문제라 억지로라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정신적인 부분이었다.


장례식장도 결국 사업장이다. 고객의 니즈를 충족시키기 전에 돈이 되어야 사업장을 유지할 수 있다. 그 돈은 결국 고객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고, 곧 장례비용을 의미했다. 고객에게 장례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 사업장의 목적이지만, 그 목적을 내세우지 않은 채 티 나지 않는 세일즈를 해야 했다. 고객에게는 “여기는 돈보다 아이들을 먼저 생각해 주는 곳”이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했다. 나는 진심으로 반려동물의 마지막을 책임져주고 싶다는 생각에 이 직업을 선택했지만, 종국에는 장례상품을 판매하는 영업직에 지나지 않았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보호자의 슬픔은 사업의 가장 안정적인 수익원이기도 했다.


그다음 회의가 든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사람 장례식도 이 정도로 예민하지는 않을 텐데, 일부 보호자들은 너무 날이 서있었다. 나도 반려동물을 키우는 입장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슬픔을 분노로 바꾸는 고객들을 만나면 감정이 지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 사람은 부모 장례식에서도 이렇게 하나하나 따지며 직원을 괴롭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내리사랑에 취약하다. 자식, 그리고 반려동물.

내가 애정을 주고 돌보고 키워야 하는 존재에게 강한 애착과 사랑을 느낀다. 그 사랑을 더 이상 건네지 못할 때 사람의 감정은 무너져 내린다. 나 역시 겪어봤던 감정이었다.


좋은 보호자 아홉 명이 ”지도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마지막을 잘 보냈어요.“라고 말해주면 기운이 샘솟았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악담은 앞선 아홉 명의 진심까지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이거 저희 아이 유골 맞아요? 혹시 섞인 거 아니에요?”

이 한마디는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이 한 마리마다 진심을 다해 화장하고, 수습하고, 직접 손으로 분골 했다. 그 노력과 정성을 의심받는 기분은 생각보다 훨씬 불쾌했다.


“그렇게 못 믿으시겠으면 사유지에 직접 묻어주지 그러셨어요.”


정말로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유는 복합적이었지만 결국 8개월을 채우고 퇴사했다. 하고 싶었던 일을 직접 경험해 보니 미련도 아쉬움도 없었다. 퇴사 이후 나는 다시 엄마의 봉제 일을 돕고 있다. 가끔 ‘나는 왜 이렇게 무능력하지’라는 자괴감이 솟을 때도 있지만, 인생은 길고 나는 또 다른 나만의 길을 찾을 것이다.


그때 배운 한 가지가 있다면, 사랑과 이별은 하나라는 점이다. 사랑이 시작되면 언젠가 반드시 이별이 온다.

떠난 사람, 떠난 반려동물을 붙잡고 오열해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있을 때 한번 더 사랑한다고 말하고, 안아주고, 표현하는 것. 그것이 이 지구 위의 모든 생명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