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형 애착
과거에 딱 한번 심리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사실 나는 상담이라는 것에 불신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로 알지도 못하는데, 몇 번의 대화와 상담지 몇 장만으로 어떻게 한 사람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한다는 것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애착 유형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열매씨는 불안형이에요. “
애착에도 유형이 있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았다. 우울과 불안이 심하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내가 ‘불안형’이라는 건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었다.
상담 선생님과 상담지를 바탕으로 대화를 이어가며 ‘나는 왜 불안형이 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불안형 애착을 가진 사람은 상대에게 끊임없이 애정을 확인받길 원한다. 상대의 작은 말과 행동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며 버려질 수도 있다는 강한 두려움이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다. 늘 사랑을 갈구하지만, 동시에 상처받을 자신을 우려하며 불안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은 어린 시절 주양육자의 일관성 없는 양육 태도, 안정감 보다 눈치를 많이 본 환경에서 비롯된다.
어느 날은 다정하고, 어느 날은 무심한 양육자의 일관되지 못한 태도는 아이에게 혼란을 남긴다.
생각해 보면 우리 엄마가 그랬다. 본인이 피곤하거나 힘이 부칠 때면 작은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곧 잘 짜증을 내시곤 했다. 하지만 기분과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한 없이 다정한 엄마였다. 그러나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도 그럴게, 하루에 13시간 이상 고되게 일을 하셨기 때문에 여유롭게 자식을 품어 줄 여력이 당시 엄마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집에 돈이 없으면 부부는 아주 높은 확률로 부부 싸움을 자주 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부싸움이 일상인 집에서 어린 나는 엄마의 눈치를 보며 감정을 살폈다. 엄마의 불안, 짜증, 분노는 곧 장 나에게 전달되었고, 나는 그 감정에 쉽게 동요되곤 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날이 있다. 여덟 살 무렵, 등교하기 위해 아침밥을 먹던 중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서로에게 날이 서 있었고, 화를 이기지 못한 엄마는 눈앞에 있던 김치통을 벽에 던지셨다. 사방으로 김칫국물이 튀었고, 김치 이파리가 널브러졌지만 그런 와중에도 나는 밥그릇에 코를 박고 묵묵히 밥을 퍼먹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거렸지만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상황을 회피하며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길 바랐던 것 같다. 여덟 살짜리 어린애가 김치가 날아다니는 상황에 놓여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다니, 지금 돌이켜보면 참 심란하다. 성인이 된 후 엄마에게 김치통 사건이 기억나느냐 물었지만 기억하지 못하신다 했다. 엄마에겐 그저 그런 부부싸움 중 하나였겠지만, 어린 나에게는 꽤나 충격이었나 보다.
“크게 말하는 소리나, 큰 소음을 들으면 저도 모르게 짜증이 밀려올 때가 있어요. 예를 들면 누군가 조심성 없이 재채기하는 소리에도요.“
“또 요?”
“엄마가 무섭진 않아요. 솔직히 머리도 컸고, 제가 이기려면 이길 수 있는 존재인 걸 알거든요. 그렇다고 저를 때리거나 혼내신 적도 없고요. 그런데 이상하게 엄마가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면 불안하고, 짜증 나고 심장이 빨리 뛰어요. 대상이 제가 아닌데도요.“
선생님은 잠시 ‘음’ 하시곤 말씀을 이었다.
“일종의 트라우마라고 보면 돼요. 엄마의 화내는 목소리나 상황이 어릴 적 불안했던 상황을 되새김질시키는 거죠.”
아! 그렇구나!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엄마의 감정에 쉽게 동요되었던 이유를 드디어 납득할 수 있었다. 내가 느끼는 불안, 분노, 심란함은 어린 시절 느꼈던 감정 그대로였던 것이다.
결국 나의 어린 시절 불안은 엄마의 일관되지 못한 양육 태도 속에서 싹텄지만, 그 뿌리를 따라 올라가면 아빠의 가정적 부재와 무심함까지 닿는다.
나는 아빠와 사이가 멀다.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면, 좋아하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아빠는 내 곁에 ‘있지만 없는 사람’이었다.
늘 노는 일이 우선이었고, 술자리와 친구들을 좋아했다. 그래서 어린 나는 아빠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했다고 느꼈다. 아빠를 그저 ‘늘 집 밖에 있는 사람’ 정도로 여겼다. 함께 살며 나를 돌봐준 막내 외삼촌이 아빠의 역할을 대신해 주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어른이 되고, 결혼을 했지만 아빠의 중심은 여전히 친가 쪽에 머물러 있었다. 엄마와 나는 아빠의 중심이 된 적이 없었다.
결혼을 하면 으레 자신의 가정이 어디인지 알아야 할 텐데, 아빠의 마음속 가정은 언제나 엄마와 내가 아닌 친가 식구들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친가를 유독 불편하고 거북하게 느끼며 왕래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아빠의 오랜 태도가 단단히 자리하고 있다.
가정적이지 않은 남편은 아내와 다투기 마련이고, 그 갈등의 한가운데에서 자식은 부모의 벌건 얼굴을 번갈아 보며 자란다.
나 역시 그랬다.
두 사람의 싸움이 끝나길 기다리며, 언제나 중간에서 눈치를 봤다.
어릴 적부터 사람들은 나를 예민하지 않고, 무던한 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극도로 예민하고 불안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법을 일찍 터득했을 뿐이다. 그때의 불안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었다.
엄마는 아빠 때문이라고 탓하고,
아빠는 엄마 때문이라고 탓했다.
제삼자의 눈으로 보면, 삼십여 년의 세월 앞에서 그 잘잘못을 가리는 일은 결국 의미 없는 소란일 뿐이다.
불안은 사라지는 감정이 아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의 불안을 이해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미움과 원망, 분노도 마찬가지다.
결국 그 감정에 망가지는 것은 자신이며,
자신의 소중한 사람에게까지 전염되어
또 다른 마음의 질병을 만들어 낸다.
모든 것은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비워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 또한 이 과정을 아직 완벽하게 이행하지 못한 불완전한 사람이다. 그러나 조금씩, 아주 조금씩 불안을 안정으로 바꾸어가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잘 살아낸 나를, 우리를
어여삐 여겨주는 마음이 필요하다.
불안과 안정은 늘 한 끗 차이.
그 한 끗을 알아차리는 연습은 오늘도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