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번호는 다섯 개뿐이었다

관계의 깊이

by 김열매

십 대 시절에는 보통 가족보다 친구가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 첫 발을 내딛으며 나름의 사회생활을 통해 관계를 배우고, 감정을 나누며 어른이 될 준비를 하는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이다.


나 또한 그 시절에는 그랬다. 작은 고민, 큰 고민 가릴 것 없이 친구들과 함께 나누었다. 기쁜 일이 생기면 기뻐서, 슬픈 일이 생기면 슬퍼서, 우리는 그 감정을 함께 안아주며 성장했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나름 친구도 많고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당시 싸이월드 방명록과 일촌평은 다수의 친구들이 남긴 흔적으로 가득했고, 사진 하나만 올려도 ‘퍼가요~‘라는 댓글이 달렸다. 싸이월드는 단순한 인터넷 공간을 넘어, 누가 ‘인싸’인지 보여주는 사회적 무대였다.


하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SNS는 결국 보여주기 식에 불과하다. 하루 방문자를 표시해 주는 ‘투데이 수’는 그 사람의 인기도를 실감하게 해 주었고, 그 숫자를 인위적으로 올려주는 버그 프로그램도 많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그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어린 마음에 그렇게라도 인기가 있어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유난스러웠던 싸이월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십 대 후반으로 접어들며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같은 새로운 SNS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나 포함 많은 사람들은 페이스북의 ‘따봉’과 인스타그램의 ‘하트 수‘에 목을 매었다. 하지만 결국 ‘있어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허상일 뿐이었다.


그즈음, 인간관계에서도 회의감을 느꼈던 것 같다.

늘 그 자리에 있어줄 것만 같았던 친구들도, 자주 만나지 못하거나 연락이 뜸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져 갔다.


‘시절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그 시절에는 인연이 맞닿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관계를 뜻한다. 이 이야기는 연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정에도 나름의 시절이 존재한다.


한 때, 시절이 지난 우정을 떠올리며 마음이 쓰리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깨달은 사실은,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는다는 점이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멀어졌다면, 그만큼의 인연이었을 뿐이다.


나는 대신 원초적인 인연에 힘을 쏟기로 했다.

가족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감정을 나누며, 우정보다 가족의 사랑을 더욱 깊이 느꼈다.


하지만 인간은 결국 사회적 동물이다. 가족 외에도 감정을 나누고, 우정을 쌓는 일 역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최소한의 사람들만 곁에 두기로 했다.


지금 당장 전화해서 ”뭐 해?“라고 편하게 물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일까? 연락처에는 삼백 명이 넘게 저장되어 있었지만, 선뜻 통화버튼을 누를 수 있는 사람은 열명도 채 되지 않았다. SNS의 숫자와 좋아요는 결국 허상일 뿐, 이것이 진짜 관계의 깊이를 말해주는 지표였다.



연락처를 과감하게 정리했다. 정리하고 보니, 가족을 제외하고 남은 번호는 겨우 다섯 개뿐이었다. 씁쓸한 마음도 있었지만, 오히려 생각은 단순해졌다. 이제 내가 지켜야 할 관계가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좁디좁은 인간관계지만 깊이만큼은 두터웠다.

언제 연락해도 불편함이 없고, 언제 만나도 어색함이 없는 사이야 말로 온전한 내 사람들이었다.


옛날엔 친구가 많은 사람들이 좋아 보였다.

단체 모임을 즐기며 활발한 사회생활을 하는 외향적인 사람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꼭 친구가 많을 필요는 없다. 진정한 친구 한 둘만 곁에 남아 있다면 그것 또 한 성공한 인생이라 자부할만하다.




나이가 들어가며 깨달은 사실이 세 가지 있다.


첫째, 입이 무거워야 한다는 것.

둘째, 내 이야기를 굳이 많이 할 필요 없다는 것.

셋째, 남의 이야기는 절대 가볍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


어릴 땐 친구들과 시시콜콜한 대화부터 진지한 대화까지 곧잘 나누곤 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믿고 털어놓은 속사정이 결국 약점이 되어 되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정말 모든 것을 내어 줄 정도로 믿음직스러운 친구가 아니라면, 내 이야기든 남의 이야기든 입에 지퍼를 채우는 게 우선이다. 입만 잘 다물어도 많은 일을 피할 수 있다.


결국 인생은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오래 곁에 남을 단 몇 명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내면은 궁핍할 수도 있고 풍족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내 연락처에 남아 있는 다섯 개의 번호가 자랑스럽다. 친구는 적지만 부끄럽지 않다.

관계의 깊이가, 내 삶의 깊이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인생을 지탱해 주는 것은 수많은 인연이 아니라, 끝까지 곁에 남아 줄 가족과 단 몇 명의 사람들이다.

당신의 연락처에는 몇 개의 이름이 남아 있는가?

나는 오늘도 그 이름들에 감사한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