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의 딸이
“감사합니다.”
마트 계산대나 식당에서는 쉽게 나오는 말이지만, 이상하게 가까운 사람에게는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 남에게는 그렇게 자연스러운 말이, 정작 내 사람에게는 유독 인색하기만 하다.
내 사람일수록 더 감사하고, 사랑하고, 아껴주어야 하는데, 우리는 늘 반대로 살아간다.
밖에서는 가식이라는 가면을 쓰고 친절한 사람인척 명연기를 하지만, 집에서는 성격파탄자가 따로 없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내 사람‘이라는 카테고리에 매우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남이라고 인식하면 십 원짜리 하나 베풀지 않지만, 내 사람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한 없이 유해지고 가진 모든 것을 퍼주려 안달이 난다.
하지만 그만큼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 문제다.
내 사람들이 밖에 나가서 타인에게 좋지 못한 소리를 듣거나 해코지를 당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행동과 말투 하나에도 진득한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그 피해자들 가운데 첫 번째로 엄마가 있다.
“엄마! 앞을 보고 걸어야지! 사람들이랑 부딪히잖아.“
“엄마! 공공장소인데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 조용히 얘기해.”
“엄마! 셀프라고 종이에 적혀 있잖아. 글을 찬찬히 먼저 읽어!”
유독 엄마에게 엄격한 잣대를 세우며 통제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엄마가 부끄럽거나 싫어서가 아니다. 누군가 엄마를 보고 불쾌함을 느낄까 봐, 그게 싫어서다.
결국 우리 엄마 어디 나가서 욕먹지 말라는 마음인데, 종종 그 마음이 넘치게 과할 때가 있다. 나의 잔소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자마자 건너지 말랬지! 차 멈추는지 확인하고 건너!”
“친구랑 술 얼마나 마셨어? 막차 전에는 들어가야 할 것 아니야! “
“누워있지 말고 운동 좀 해! 운동해야 뱃살도 빠지지! “
“집에 잘 가고 있어? 도착하면 연락해!”
이렇게 하나하나 글로 적고 보니, 엄마가 참 숨 막히는 딸을 낳아 놓았구나 싶다.
스물둘에 나를 낳은 엄마는 가장 예쁠 나이에 제대로 한 번 놀아보지도 못한 채 이십 대를 흘려보냈다. 서른 살인 지금, 스물둘의 나를 회상해 본다. 당시에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철부지에 지나지 않는 나이다. 그 나이에 엄마가 나를 낳고 키워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내 기억 속 엄마는 늘 벅차 보였다. 가정을 돌보지 않는 남편, 시댁이 우선인 남편, 아이 양육에 무관심한 남편, 무능력한 남편, 그런데 놀기는 좋아하는 남편.
혼자서 아등바등 살다 보니 눈가에는 어느새 주름만 자글자글. “나 언제 이렇게 늙었냐. “ 혼자 거울을 보며 중얼거리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엄마는 친구가 없다. 가진 것 없이 살다 보니 사람 만날 여유가 없었다. 나는 엄마의 하나뿐인 딸이자, 하나뿐인 친구의 역할도 대신했다.
나는 열아홉에 일찍 면허를 취득했다. 아빠는 오토바이 운전만 할 줄 아셨기 때문에 우리 집에는 평생 차가 없었고, 살 여유도 없었다. 그런 엄마의 소원은 휴게소에 차를 세워 놓고 간식을 사 먹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동차 면허를 취득할 수 있는 열아홉 살 생일이 지나자마자 빠르게 면허를 취득했다. 나의 거침없는 실행력에 힘입어 엄마는 모아둔 쌈짓돈으로 내게 경차 한 대를 사주었다. 우리는 그 작은 차를 몰고 휴게소에 들러 여러 간식들을 섭렵했다. 엄마는 그 소박한 소원을 이루기까지 이십 년이 걸렸다.
내가 취업을 한 뒤, 우리는 차를 몰고 매주 드라이브와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정말 전국을 돌아다녔다. 폭염 주의보가 내렸던 2017년 여름의 남해여행은 죽어도 잊지 못할 것이다. 둘 다 땀을 한 바가지 흘린 뒤 저녁 바람을 맞으며 테라스에서 마신 독일 생맥주의 맛이 지금도 혀끝에 감돈다. 엄마가 즐거워하면 나도 즐겁고, 기뻐하면 나도 기뻤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는 게 퍽퍽스러운 것은 변함이 없지만, 이십 대 딸과 사십 대 엄마의 혈기왕성함으로 추억은 겹겹이 쌓여 지금은 사진첩에 고이 보관되어 있다.
그렇게 나에게 엄마는 늘 언제나 안쓰럽고 챙겨야 하는 존재였다. 엄마가 보호자고 윗사람인데도 나는 그 반대로 굴었다. 마치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처럼 과보호를 하는 것이다. 이유는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응당 남편이 해주어야 할 일을 남편이 해주지 못하니, 나는 스스로 딸이자 친구, 그리고 남편의 역할까지 동시에 짊어지고 있었다. 올바른 역할과 감정이 아님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엄마는 나의 통제와 간섭을 “나도 걱정해 주고 챙겨주는 사람이 있어서 든든해.”라고 말하면서도, 때로는 “내가 애도 아니고, 신경 쓰지 마!”라며 갑갑해했다. 우리는 묘하게 변질된 관계 속에서 살고 있었다.
엄마가 내 말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쉽게 짜증이 나고 화가 났다. 그런 이유로 다투기도 참 많이 다퉜지만, 여느 모녀들처럼 하루만 지나면 까맣게 잊고 화해하기 일쑤였다.
결혼을 준비하며 가장 걱정이 되었던 부분도 다름 아닌 엄마였다. ‘엄마는 나 아니면 놀 사람이 없는데, 외로워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다. 친정집과 차로 5분 거리에 신혼집을 구했지만, 함께 살 때보다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모녀가 사이가 안 좋아도 문제지만, 너무 과해도 그것대로 문제가 됐다.
신혼집으로 이사하고 한 달, 두 달, 일 년이 지나며 우리는 아주 조금씩 홀로서기를 배워갔다. 여전히 엄마는 개울가에 내놓은 아기처럼 불안하고 걱정되지만, 엄마도 성인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집착의 수위를 나름대로 조절하고 있다.
엄마도 다 큰 딸을 시집보내 놓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뒤늦은 사회생활에 조금씩 발을 들여놓는 중이다. 잊고 지냈던 사람들과 다시 연락을 주고받으며 종종 식사와 술자리를 갖는다. “적당히 먹고 일찍 들어가.”라는 딸의 잔소리는 여전히 덤이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모녀 관계를 만들기 위하여 나름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비록 불완전함에서 비롯된 조금은 엇나간 집착과 애정방식일지라도, 하나뿐인 딸의 서툰 사랑으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스물둘의 엄마에게,
서른이 된 딸은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당신의 인생은 누구보다 가치 있고, 잘 살아냈다고.
늘 감사하고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