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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옹알이 Sep 20. 2021

퇴사에 대하여

존재함으로써 고통 받는 삶

1. 내가 마지막으로 회사를 출근한 날은 공교롭게도 여름휴가 시작 전 마지막 출근일이었다. 4년 넘는 시간동안 다니던 회사에서 사람과 작별 인사를 나누며 떠나는 이도 남겨진 이도 슬프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여름휴가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음주 월요일엔 나만 출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출근하지 않는다. 비어있는 내 자리가 외롭지 않게 모두의 자리가 비어있을 것이다. 인간은 요상한데서마저 외로움을 느낀다.

이상하게 퇴사일은 쓸쓸하다. 첫 회사에서도 두번째 회사에서도, 지겹도록 출근하기 싫어하던 수많은 아침들을 싹 잊은 것 마냥 외로움을 느꼈다. 평소에 나는 쓸쓸하다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지금 내 마음이 완벽하지 못한 상황입니다.'하고 스스로를 낮게 말하는 것만같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자격지심이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평소 외로움을 타냐는 질문에도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첫 회사에서의 퇴사 때는 그 쓸쓸함을 숨기느라 급급했던 것 같다. 난 여기를 떠나서 매우 잘 살 거라고 마치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듯이 서운한 마음을 꽁꽁 싸맸다. 마치 버스타고 상경하는 자식의 보따리에 바리바리 싸준 반찬이 냄새를 풍길까봐 걱정해서 봉다리로 두 번씩 꼭꼭 싸매는 엄마의 손길처럼, 나는 그 불안정한 마음을 봉인하여 내면 깊은 곳에 던져놨다. 그렇다고 그 쓸쓸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서 결국 봉다리 사이로 찔끔찔끔 삐져나오는 통에 오히려 긴 후폭풍을 감당해야 했던 것은 안 비밀...

반면 이번 퇴사에서는 드러냈다. 과거에 잘못해서 이번에는 반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랬다. 당장 모든 감정이 풀어지고 뭉근하게 남은 쓸쓸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지금 위로 받고 싶다고 말한 것이었으니까. 이 글을 쓰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지금 내가 좀 쓸쓸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뭘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어떤 이유에서 퇴사하는지를 떠나, 그저 몇년간 꾸준히 있던 내 자리가 비워진다는 것이 쓸쓸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었다.

2. 퇴사를 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퇴사에 가장 필요한 것이 다름 아닌 용기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더 이상 이 회사에 나오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말도 안 되는 처우에 "다 때려친다!!!"하고 사직서를 팀장 면전에 집어던지지 않는 이상 퇴사에는 절차가 필요하다. 원래도 부정적인 의미의 말은 하기 어려워하는 편인데 퇴사하겠습니다가 쉽게 나올리 없다. 홧김에 때려치고 싶다고 친구한테 하소연하는 것과 팀장에게 퇴사 의사를 전달하는 것은 아주 다른 차원의 문제다. 내 마음이 딱 정리되어 퇴사를 결심했어도 그걸 회사에 통보하는 건 굉장히 껄끄러운 문제다. 그걸 깨닫고 나니 새삼 나보다 먼저 퇴사한 사촌동생이 존경스러운거다. 나이는 나보다 세살이나 어린데 이렇게 큰 일을 먼저 겪었구나. 아주 큰 용기가 필요했었겠구나. 사람들은 퇴사자를 마냥 부러워하는데(나도 사촌동생이 부러웠다.) 사실 그건 용기로 껄끄러운 상황을 대면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아주 타당한 것이었다. 내가 퇴사를 결심하고 말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는 말이다.

나의 퇴사를 앞두고 팀원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유독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리 친한 사람이 아니라 사실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러다 퇴사 전 마지막 야근 때 그 사람이 또 부럽다며 본인도 당장 퇴사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이라 생각해서였을까. 그 말을 듣고 내가 깨들은 귀한 진리, 퇴사에는 용기가 가장 필요하다는 말을 해줬다. 그러자 그는 본인은 처자식이 있어서 그럴 수 없다며 조금 더 잘 버는 배우자를 만났으면 나처럼 퇴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순간 또 깨달았다. 아참, 이 사람 때문에도 나 퇴사하려고 했었지. 나와 결이 아주 다른 사람이었지. 또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렸구나. 사람은 늘 본인이 깨닫는 것이 아주 정답이라고 믿는 착각을 겪는다. 늘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입을 놀렸다간 집에서 이불킥하는 것이다. 그날도 딱 그랬다. 딱 그래서 혼자 맥주를 마시며 마인드컨트롤을 했다. 저 인간이 내 말을 들어줄 거였으면 진즉 들어줬을텐데 나는 또 혼자 오지랖을 부리면서 안타까운 내 에너지를 소비했다. 젠장.

3.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왜?"였다. 그들의 질문에 담긴 의도는 제각각이었겠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나 하나다. 분명한 것은 질문하는 이들 중에서 진짜 이유를 말해주고 싶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퇴사를 결정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이미 내 가까운 사람들은 알고 있기에 따로 묻지 않았다. 표면상으로는 여러 이유를 들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가 사라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회사를 다니며 소진되고 소진되다 끝내 없어지고 싶다는 시점에 다달았을 때, 나는 존재하기 위해 퇴사를 선택했다. 이 괴로움도 고통도 모두 내가 존재해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부정되면 모두 없어질 감정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괴로움과 고통을 느낄지라도 내가 '존재'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무(無)의 평화로움보다 존재함으로써 고통받는 삶을 함께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퇴사했다. 자살보단 퇴사가 쉬우니까. 이 설명을 굳이 큰 마음을 담고 물은게 아닌 이들에게 대답할 가치가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아까웠다. 그렇게 대답하는 에너지조차 아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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