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사라지지 않기 위한 방식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위한 18개의 노트
1부 - 경계에 머무는 사람
1. 예술가가 되지 않으려 애쓰는 예술가
2. 확신이 없는 사람의 세계
3. 나는 왜 자꾸 사라지려 하는가
4.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 사이에서
5. 내가 만든 것이 나를 만든다
6. 흔적은 때로 말보다 무겁다
Inturlude - 머물렀던 자리로부터
2부 - 조용한 무게들
7. 결핍이라는 출발선
8. 말보다 오래 남는 것들에 대해
9.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에 대해서
10. 응시와 침묵 사이의 나
11. 존재는 때로 아주 작고 조용하게 지나간다
12. 무응답이라는 대화
Interlude - 조용한 무게들을 향해
3부 - 나를 지나가는 감정들
13. 나는 나를 의심한다
14. 사라지지 않기 위한 방식
15. 무언가를 만들지 않아도 괜찮은 날
16. 조각난 하루들을 꿰매는 일
17. 감정은 늘 조금 늦게 도착한다
18. 나는 여전히 예술가가 되지 않으려 애쓴다
14. 사라지지 않기 위한 방식
나는 종종 내가 흔적 없이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누군가의 기억에서조차 잊히고,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조용히 지워질까 봐… 그 두려움은 거창한 상실이 아닌, 아주 사소한 순간들 속에서 더 또렷하게 다가왔다.
어린 시절 나는 부모님의 잦은 부재 속에서 자랐다. 집보다는 학교와 친구들 사이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자연스레 친구들에게 정서적으로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그 친구들이 나를 떠날까 봐, 혹은 나를 잊을까 봐 나는 늘 불안했고, 그 불안을 감추기 위해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맞춰주려 애썼다. 친구의 기분을 먼저 살피고, 무언가를 함께할 땐 늘 ‘나는 괜찮아’라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라도 곁에 남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지워지지 않고 싶었다.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잊히지 않기 위해 애쓰는 마음’이 내 안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건… 그래서였을까, 시간이 흘러 한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프랑스로 떠나올 때, 나는 이상할 만큼 큰 공허함을 느꼈다. 마치 그곳에 있었던 내 삶의 서른 해가 한순간에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내가 살던 동네, 자주 가던 식당, 우연히 마주치던 얼굴들, 그리고 오랜 시간 함께했던 직장 동료들과 친구들, 그리고 점점 늙어가시는 부모님까지… 그 모든 장면들이 조금씩 내 기억에서 흐려지는 걸 느낄 때면, 나는 그 시절의 나까지 함께 지워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지금의 나는, 여전히 나의 존재를 증명하려 애쓴다. 지금 이 프랑스에서의 삶 속에서도, 나는 마치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보여주듯,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또 증명하려 한다. 그건 나 자신을 향한 증명이기도 하다. 내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는 것. 내가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믿기 위한, 조용하지만 집요한 강박...
때로는 아무도 나를 바라보지 않는데도, 나는 나를 보여주려 애쓴다. 무언가를 만들어야 할 것 같고, 작업하지 않으면 곧 사라질 것만 같다.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않더라도, 내가 만든 장면이나 문장 하나쯤은 이 세상 어딘가에 남아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건 누군가를 위한 것도, 인정을 받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를 향한 작은 저항 같은 마음. 사라지지 않기 위해, 조용히 흔적을 남기고자 했던 몸짓...
물론 그 흔적들은 완벽하지 않다. 때로는 조잡하고, 때로는 모호하며, 때로는 스스로조차 이해할 수 없는 형체로 남는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마저 나라는 것을, 나는 이제 조금씩 받아들이게 된다.
사라지지 않기 위한 방식은 거창하지 않다. 그건 아주 조용한 반복이기도 하고,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장면을 붙잡는 일이기도 하며, 때로는 나조차 잊고 지낸 감정을 다시 꺼내어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