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조각난 하루들을 꿰매는 일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위한 18개의 노트
1부 - 경계에 머무는 사람
1. 예술가가 되지 않으려 애쓰는 예술가
2. 확신이 없는 사람의 세계
3. 나는 왜 자꾸 사라지려 하는가
4.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 사이에서
5. 내가 만든 것이 나를 만든다
6. 흔적은 때로 말보다 무겁다
Interlude - 머물렀던 자리로부터
2부 - 조용한 무게들
7. 결핍이라는 출발선
8. 말보다 오래 남는 것들에 대해
9.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에 대해서
10. 응시와 침묵 사이의 나
11. 존재는 때로 아주 작고 조용하게 지나간다
12. 무응답이라는 대화
Interlude - 조용한 무게들을 향해
3부 - 나를 지나가는 감정들
13. 나는 나를 의심한다
14. 사라지지 않기 위한 방식
15. 무언가를 만들지 않아도 괜찮은 날
16. 조각난 하루들을 꿰매는 일
17. 감정은 늘 조금 늦게 도착한다
18. 나는 여전히 예술가가 되지 않으려 애쓴다
16. 조각난 하루들을 꿰매는 일
어떤 날은 하루가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한 덩어리의 감정으로 흘러가지 못한 채, 아침과 저녁 사이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듯한 날…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초조해지고, 괜찮다고 믿었는데 문득 쓸쓸해지는 순간들... 하루는 그렇게 조각조각 흩어지고, 어떤 것도 완성되지 못한 채 저물어간다.
그런 날들이 쌓이면, 나는 나라는 사람조차 부서진 파편처럼 느껴진다. 말이 이어지지 않고, 감정도 통일되지 않으며, 한 문장을 쓰는 일조차 벅차다. 쓰다 만 문장들이 노트에 덕지덕지 붙어 있고, 그 속에서 나는 자꾸만 멈춘다. 무엇을 느끼는지도, 지금 어떤 기분인지도 모르겠다. 집중하려 애쓰지만, 머리는 멀리 떠 있고 마음은 그보다 더 먼 곳을 헤맨다. 하나의 감정으로 나를 설명할 수 없고, 하루라는 시간 안에 내가 온전히 담기지도 않는다. 아침과 점심과 저녁의 내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듯하다. 같은 몸을 지니고 있지만, 서로 다른 나들이 각자의 시간 속에 흩어져 있는 기분... 그 모든 조각들이 모여 오늘이 되었지만, 나는 정작 그 안에 온전히 머물지 못하고 있다는 감각…
마감일이 다가올수록 그런 날은 더 자주 찾아온다. 나는 이미 조각난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안다. 스트레스는 최고치를 향해 치닫고, 해야 할 일들은 한꺼번에 쏟아진다. 그럴 때 나는 아주 작고 느슨한 실로 하루를 꿰매기 시작한다.
아침은 세 살 아이의 볼에 뽀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온기를 입에 담은 채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아이를 등원시킨 뒤, 조용히 작업실로 향한다. 작업실에 도착하면 커피를 내리고, 담배를 피우며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는다. 벌어져 있는 일들을 하나씩 주워 담고, 우선순위조차 흐릿한 일들을 가만히 바라본다. 어쩌면 이 모든 행위는 무언가를 하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 내가 오늘 이 하루 안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의식에 가깝다.
그렇게 조각난 하루를 이어 붙인다. 먼저 노트를 펼쳐 오늘 해야 할 일들의 리스트를 작성하고, 무엇부터 손댈지 가늠해본다. 생각의 결들을 정리하면서 우선순위를 적어 내려가는 그 순간, 비로소 나는 하루 안에 들어온다.
이제 노트북을 켜고,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고, 마우스를 움직이며 하나하나 작업을 시작한다. 겉보기엔 단순한 반복일지 몰라도 그 안에서는 나의 뇌가 쉼 없이 작동한다. 여러 갈래의 뉴런이 서로 연결되며 생각하고, 떠올리고, 조합하고, 만들어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뇌가 포화 상태에 다다랐다는 신호가 온다. 그럴 때면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없이 멍하니 담배를 피우고 찬물에 손을 씻는다. 그 차가운 물의 감각이 손끝을 지나갈 때, 복잡했던 머릿속도 잠시 맑아진다. 그리고 다시 조용히 작업실 안으로 들어간다.
그 일련의 행위들은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한 능동적인 의지가 아니라, 조각나버린 나를 천천히 이어 붙이는 몸의 리듬에 가깝다. 노트를 펼쳐 하루를 정리하고, 마우스를 움직이고, 무언가를 쓰는 동안에도, 나는 작업보다 나 자신을 수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 리듬은 느리고 엉성하지만, 그 안에서만큼은 내가 잠시라도 나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스며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은 흔적들은 비록 거창하지 않아도, 내가 오늘을 버티고 있고, 여전히 여기 있다는 조용한 증거가 되어준다.
조각난 마음을 억지로 붙이지 않아도 좋다. 조각은 조각대로 흩어져 있어도 괜찮고, 연결되지 않아도 당장은 무너지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 조각들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는 시선이다. 오늘 나에게 어떤 감정이 있었고, 어떤 흐름으로 지나갔는지를 알아차리는 일... 그저 그것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다는 것... 그 시선은 아주 작고 희미할지라도, 나를 완전히 잃지 않게 해준다.
그 시선 하나로도, 나는 오늘을 다시 꿰매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말이 되지 않는 시간들 속에서도, 내가 나를 감싸 안을 수 있다는 것... 정돈되지 않은 하루와, 채 끝나지 못한 감정들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천천히 나를 붙잡는다.
삐뚤빼뚤하지만 나만의 리듬으로... 그것은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하게 보일 수도 있는 느리고 비효율적인 방식이지만, 나에게는 가장 정직하고, 가장 나를 닮은 생존의 리듬이다. 나는 오늘도 그 리듬을 따라, 조용히 하루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