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에서 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대하여
2021년 고독사 사망자 수는 3,378명이었다. 최근 5년간 증가 추세다. 남성이 여성의 두 배다. 고독사는 흔히 외롭고 불쌍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그러나 저자는 고독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것이 그가 생각하고 경험한 최고로 존엄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저자 최철주는 1970년대부터 40여 년간 방송국과 신문사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20여 년 동안 웰다잉 강사이기도 했다. 그는 딸과 아내를 말기 암으로 보냈다. 그리고 홀로서기를 해야 했고 홀로 죽기를 준비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죽음의 질에 대해 고민한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훨씬 넘긴 나라면 뭐하나. ‘삶은 거칠어지고 죽음은 동떨어진 곳에서 나뒹굴며 죽음의 질은 여전히 바닥을 헤매고 있는데’
50억 원이 넘는 아파트에 살아도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오히려 온갖 상속 문제로 가족에게 강제 연명치료를 당할 가능성이 높다. 동물의 생명까지 존엄성을 따지는 시대에 왜 노후에 접어든 인간의 존엄은 계속 외면당하고 있는가. 이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한 고위 공무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직 장관. 그가 고위 공무원이었을 때 대화의 주어는 항상 ‘대한민국’ 또는 ‘우리나라’였고 ‘국민’과 ‘기업’이었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는 아내와의 이별이 두렵고 언젠가 독거노인이 될 자신의 처지가 더욱 불안한 듯 느껴졌다.
지금 그가 말할 때 주어가 ‘내가’ 또는 ‘나는’으로 바뀐 것을 저자는 알아챘다. 놀라운 변화였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자신의 운명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혼자 풀려고 해도 풀어지지 않는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비로소 온전히 ‘나’로 돌아온 것이다.
저자는 80세를 넘긴 나이에 위암 수술을 받았다. 그는 암 병동에서 퇴원한 후 평소의 다짐을 가다듬었다. 가능하다면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혼자 조용히 세상을 떠날 수 없을까. 그는 그것을 자유로운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내 집에서 내가 선택한 방법으로 조용히 살다가 홀로 맞이하는 죽음을 존엄한 죽음이라 생각했다.
1인 가구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특히 저자처럼 독거노인 비중이 커지면서 아무도 모르게 홀로 세상을 떠나는 사례는 차고도 남는다. 저자는 결심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고독사의 그림자가 내 곁으로 점점 더 다가오고 있다는 불안감을 떨치기 어렵다. 이를 막을 뾰족한 방법도 없다. 나는 기꺼이 내 운명을 자연에 맡길 준비를 하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다.
그가 고독사를 결심한 것은 사실 엄청난 일을 결행하려는 각오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저 사는 데까지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의욕의 반작용이다. 고독사라는 형태로 생을 마감하는 게 오히려 평화스러운 일이라 여겨진다. 내 인생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행사할 수 있는 자기 결정권의 결과이니 말이다.
저자는 아내와 사별한 지인들이 짧게는 2~3년, 길게는 5년 후 세상을 등지는 걸 보았다. 그는 13년 전 아내를 암으로 잃었다. 그의 생존 기간이 운 좋게 길어진 이유를 요리에서 찾는다. 그는 남자의 평균수명과 건강수명이 여성보다 6~7년이나 뒤처지는 이유를 지나친 여성 의존이 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는 은퇴하기 전 아내와 아들의 권유로 요리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배운 요리 솜씨로 아내를 위로할 수 있었다. 딸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후 상실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자신이 기획한 ‘식사 챙겨주기’를 실천했다. 라면으로 때우자는 혹평도 들었지만 어떻든 그 배움이 아내마저 떠난 지금 그를 생존하게 해주는 비결이라 했다.
그에게 요리 공부는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치유의 힘이었다. ‘요리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며 영양식을 만들어 자신의 위암을 다스렸다.
무엇보다 요리는 “나 같은 독거노인이 생존 능력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작은 권력이며 자신감의 표현이다. 혼자 레스토랑에 드나들면서 1인 고객으로 냉대하는 지배인 눈치를 살필 필요도 없어졌다.”
그의 요리 본능은 그가 혼자 오래 버틸 수 있게 한 삶의 원동력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남자들이 요리 배우기를 강력히 권한다. 어떻든 몇 년을 혼자 살아가야 할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어령과 나누었던 그의 존엄사 과정을 소개한다. 이어령은 죽는 그 순간까지 서재에 병상 침대를 놓고 그의 프로젝트를 이어갔다. 책은 구술로 작업했다. 이어령은 그의 상황이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마다치 않았다. 그는 존엄한 죽음이 뭔지를 알려주려는 듯했다.
이어령은 저자에게 7년 전 자기 죽음 정리에 관해 말했다. 저자는 그가 자신의 말대로 그 작업을 끝내고 삶을 마감한 인생의 승자라고 했다.
2017년 6월 세 번째 월요일 저녁 정동 세실 레스토랑. 한 달 전 이어령이 저자에게 부탁한 자리였다. 당시 이어령은 암 투병 중이었고 자신의 상태에 관해 상세히 알고 싶었다. 저자는 진료를 받으려면 2년이나 기다려야 하는 명의 J를 소개했다.
이어령은 J에게 병원 검사 자료와 의무기록을 건네며 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내가 할 일이 참 많아요. 지금 20여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책도 여러 권 써야 하고 방송 프로그램도 있고...”
자료와 이어령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명의 J는 기상천외한 말을 건넸다.
장관님. 암을 이대로 놔두시면 어떻습니까. 그냥 이대로 사시면서요. 나는 암 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시고 일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하시는 게 낫겠습니다. 3년 사시게 되면 3년 치 일하시고 5년 사시게 되면 5년 치 일만 하시는 게 좋겠어요. 그게 치료 방법입니다.
명의는 명의였다. 그는 평소에도 암 환자에게 묻는다. 살기 위해 치료받을 것인가. 치료받기 위해 살 것인가.
이어령의 존엄사는 그의 딸 이민아와 닮았다. 이어령의 딸 이민아 목사는 난소암 4기로 2012년 3월 세상 떠났다. 이어령의 항암치료 권유에 딸은 말했다.
아빠 몇 개월 더 살자고 그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아? 그게 맞는 이야기야? 나는 통증 치료를 받으며 집에서 지내다 떠날 거야. 병원에서 죽기 싫어.
딸을 보낸 후 이어령은 죽음에 관한 글과 책을 많이 썼다. 이어령도 딸처럼 말했다.
어떻든 나는 절대로 병원에서 죽지 않아요. 의연하게 집에서 죽음을 맞이할 거요. 나한테는 살기 죽기가 아니라 죽기 살기요. 나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떠나는 메멘토 모리가 중요해요.
온갖 줄을 몸에 주렁주렁 달고 삭막한 병실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싶은가. 자기 집에서 자신이 선택한 하루하루를 보내다 홀로 고요히 평화롭게 눈감고 싶은가. 적어도 태어남을 선택할 수는 없었어도 죽음을 선택할 수는 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