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를 기억한 날

스물네 번째 편지_과거의 이야기

by 아기도토리

소복소복 눈이 내리던 크리스마스를 기억해.

그날은 모처럼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 무척이나 행복한 날이었어. 아침엔 따끈한 토스트와 양파 수프와 달걀 스크램블을 먹었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셨지.


교회엔 사람이 많았어. 사람들은 모두 찬송가를 부르며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뻐했지. 빼곡한 인파 속에서, 나는 멀뚱멀뚱 기다란 의자에 앉아 있었어. 방긋 웃는 사람들, 왕왕 우는 아기들, 크리스마스의 복작거리는 겨울 아침.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점심을 먹고 교회를 나섰어. 거리에는 알록달록하게 장식한 가게들이 있었고, 흥겨운 캐롤이 흘렀고, 왁자지껄 떠들며 지나가는 사람들 소리가 들렸어.


찬 바람이 부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어. 눈 내린 정류장 뒤에 유행이 지난 티셔츠를 파는 가게가 있었어. 버스가 올 때까지 시간이 남아서 가게를 둘러보기로 했어. 할인하는 상품이 있었고, 탈의실에서 옷을 입는 사람이 있었고, 느긋하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는 아이와 어머니가 있었지.

난방을 틀었는지 버스 안에 훈훈한 공기가 돌았어. 나는 빨간 목도리에 턱을 깊숙이 묻고 꽁꽁 언 서울을 바라보았어. 높고 낮은 건물들과 햇볕을 받아 차르르 빛나는 한강이 있고, 버스와 자동차와 지상으로 나온 지하철이 보이는, 언제나 그랬던 풍경을 나는 바라보았지.






병원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에 다다르자 새파랗게 고요한 복도에 아는 얼굴이 보였어. 키가 크고 머리를 올려 묶은 여자가 병실 앞에 서 있었어.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어릴 때 종종 함께 놀곤 했던 친척 언니. 언니의 말대로 우리는 정말 오랜만에 만난 듯했어. 거의 십 년 정도.


“못 보던 사이에 정말 많이 컸네.”

“언니도.”

“‘언니도’는 무슨. 나는 성인 된 지가 언젠데.”


언니는 내 등을 톡톡 두드려 주었어. 병실에 들어가 보라는 신호. 나는 조심스레 노크한 뒤 병실 문을 열었어.

문을 열자 병실 침대 옆에 보조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있는 이모와 어머니가 보였어. 내가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이모는 나를 바라보면서 덤덤하게 인사를 건넸어.


“잘 지냈니.”


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어. 어머니는 말없이 아버지의 바싹 마른 손을 조심스레 매만지고 있었어.

아버지의 얼굴은 핼쑥했어. 듬성듬성한 머리카락과 푹 들어간 눈. 호흡기를 대고 겨우겨우 숨을 쉬는, 보라색 입술.


“아빠한테 인사해야지.”


아무 말 없던 어머니가 나에게 말했어. 그러자 아버지는 스르륵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쳐다보았어.

있잖아, 앤. 아버지의 눈은 처음 만난 사람을 보는 듯한 눈이었어. 생생한 사람의 눈빛과는 전혀 다른, 생기 없는 눈동자.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데 아버지는 계속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어.

아버지는 나를 못 알아보는 것 같았어. 아버지는 도르르 눈동자를 굴리더니 내게서 눈을 돌렸어. 마치 나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아버지는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어. 아버지의 눈에는 그 어떤 것도 비치지 않았어. 아무것도 없었어. 텅 빈 눈동자. 텅 빈 사람.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둠 속에 사는 사람처럼.





늦은 저녁. 병원 로비 한가운데에 반짝이는 별과 동그랗고 커다란 방울로 장식한 아름다운 트리가 있었어. 나는 그 곁에 앉아 트리를 바라보았어. 캄캄한 어둠을 밝히는 노랗고 조그만 불빛들이, 아지랑이처럼 눈앞에 흩어졌어.


고요하고 순결한 밤.

소복소복 눈이 내리던 새하얀 크리스마스.


앤.

나는 그 밤의 아름다움을 기억해.

아름답고 가슴 아픈, 그 밤의 크리스마스트리를 기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