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청안 에세이작가 Jun 28. 2022

히어로가 될 수 없다면 빌런이라도 되겠다는 친구의 말

과연 유명해지면, 역사에 이름을 남기면 우리는 행복할까?


내가 아는 '가장 똑똑한 친구 S'와 올봄에 나눈 대화가 잊히지 않는다. S는 초식동물의 이미지보다는 강인한 육식동물이 좋고, 평화로운 시대를 유지한 조용한 왕보다는 혁신과 변화를 이끌어 당대를 개척해나간 왕이 좋다고 했다. 역사에 임팩트 있게 기억되는 사람들이 좋다며, 어차피 사는 것 조용히 사라지기보다는  이 세상에 스크래치라도 내고 싶다 말했다.



내가 생각하는 '빌런'의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S와 나눈 대화를 살짝 정리하자면 이렇다. ▼


S : 나는 그냥 시시하게 살다가 죽기는 싫어. 좋은 쪽으로 이름을 못 날린다면 나쁜 쪽으로라도 남겨야겠어.


나: 캬! 히어로보다는 빌런이 되시겠다?


S : 프리츠 하버라는 독일 유태인 화학자가 있어. 이 사람은 공기 중에 있는 질소를 암모니아로 전환시키는 하버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비료 산업에 큰 공헌을 하고 농작물 생산량을 늘리게 했지. 그걸로 노벨 화학상을 탔어. 양자 물리학자인 막스 보른하고도 같이 연구하기도 한 사람인데, 와이프도 독일 최초 여성 화학박사를 딴 분이었고!


나 : 갑자기 그런 얘기가 왜 나오는 거야?


S : 연관이 있으니까 들어봐. 암튼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며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을 해. “ 과학자는 평시에는 세계에 속하지만 전시에는 국가에 속한다.”라고. 그러면서 독일군에서 최초의 화학전을 발생시키게 만든 염소가스 기반 화학무기를 만들었지. 근데 와이프도 화학박사라고 했잖아. 와이프는 반대를 했어. 과학은 결코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근데 이 사람은 국가를 위해서 와이프 말을 안 들었지.


나 : 아내와 남편의 가치관이 충돌하네


S :  그래서 와이프가 죄책감과 우울증으로 집 마당에서 아들이 보는 앞에서 가슴에 총을 쏴서 자살해.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하버는 전범자처럼 찍히면서 정착을 못하고 전전하며 쫓기는 삶을 살게 되지. 그가 만든 독가스로 2차 세계대전에 아우슈비츠 수용소 유태인들을 자신의 일족들을 죽이게 만들기도 했고. 결국 노년엔 여기저기 떠돌다 외로이 호텔방에서 심근경색으로 죽었다고 해.

 

나 : 비극이네. 그럼에도 너는 이 사람처럼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은 거야? (하략)





그날 이후 S의 발언에 확실히 자극받았다. 그래서인지 '나도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조금 했다. 얼마 전 열린 2022 서울국제도서전 (at 코엑스)에 김영하 작가님의 프로필 사진이 크게 걸린 것을 보고, 같이 갔던 친구에게 "나도 아이돌이 되겠어!"라고 했다. 무슨 뜻인지 되묻는 친구의 표정을 알아채고, "김영하 작가님은 문학계의 아이돌"이라고 말했었다. 실력도 유명세도 탁월한 분이라고 설명하며 내가 한껏 욕망을 드러내자, 친구가 "행운을 빈다"고 말했다. 나를 드러내길 지극히도 싫어하는 사람이, 세상에나 '문학계의 아이돌'이 되겠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됐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다. 유명해지는 게 더 영예롭고 더 가치 높게 여겨졌으니 말이다. 확연히 S와의 대화 이후 가치관에 변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이 날 내 발언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유명해지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어쩌면 문학계의 아이돌이 아니라 '히어로'가 되겠다는 초심자의 의지 같은 거였다. S가 명백히 유명해진다면 빌런이라도 상관없다고 외쳤던 것과는 결이 다르다. 사소한 부분도 흠잡히길 싫어하는 나 같은 사람은 아무리 욕심(모국이 전쟁에서 이기길 바라는 대의적인 것이라 해도)이 나더라도 이것저것 다 따지다가 하버 같은 선택을 하지 못할 거다.


요즘 드라마(최근 방영작)에 자주 나오는 대사가 있다. '괴물을 잡으려다가 괴물이 되었다'는 대사. 무슨, 유행어 돌려막기라도 하고 있는 것 같다. 너무 자주 나온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되려거든 히어로가 되어야지. 세상을 구하는 건 언제나 히어로라고 믿는다. 다만, 큰 히어로는 몇 명 없다. 그래 봐야 뭐 어벤져스 정도인가? (이분들 다 쉬고 계신 것 같던데 그럼 지구는 누가 구할지 모르겠...) 그러나 작은 히어로는 너무도 많고 하루하루 주어진 여건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소시민 히어로도 많다. 물론 S가 이뤄내고자 하는 '역사에 길이 남을' 히어로는 '소시민 히어로'와 거리가 멀겠지만 말이다.  '유명해지면, 네가 O을 싸도 박수를 쳐준다'는 웃지 못할 말이 있지만, 그거야말로 유명세와 실력이 결합된 일종의 선순환이다. 유명해서 O 쌌던 그 사람은 O 싸는 것에 있어서도 뭔가 남달랐겠지. 그런 생각도 해본다.


나는 빌런이 되겠다는 S를 누구보다 존중한다. 이 말이 결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님도 정확하게 이해한다. 그래서 S가 유명해지기를, 그가 원하는 대로 역사에 이름을 선명히 새기길 바란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빌런보다는 히어로가 되기를, 거기다 기왕이면 자신의 생을 즐기는 히어로가 되기를 바란다. 질서 정연하고 투명한 그는, 부지런하고 아이디어가 샘솟는 그는! 빌런보다 히어로가 훨씬 더 잘 어울린다.



'프리츠하버에 이은 또 하나의 유명한 독일인,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언제나 현재를 즐길 것 , 인생은 현재의 연속이다


모두 모두 행복해져라! 빌런도 히어로도!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는 것. 그건 어쨌거나 죽은 뒤의 일이다. 즐기는 사람이 승자라 생각한다. 빌런 혹은 히어로, 무엇을 선택하든 즐기는 사람의 행복은 살아생전에야, 오로지 살아있어야만 누릴 수 있다. 때때로 자신의 가치관이 이리저리 충돌해서 혼란함이 상처를 내더라도, 눈치 보고 타인의 인생을 베끼며 '돌려 막기'하지 말자. O 싸다가 주저앉더라도 웃고 넘기자. '그럴 수도 있지'하며 툭툭 털고. 그러면 유명해지지 않아도 사람들이 박수를 쳐줄 것만 같다. 빌런도 히어로도 모두 주인공. 주인공의 다음 스토리가 기대된다. 행복해져라! 같이 주문을 외워준다.


거기! 주인공! 안 일어날 거야?
그러다 주인공 뺏긴다.
얼른 일어나!
아직 촬영 남았어.








*** 사랑에 대한 산문집  '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를 썼습니다.




***  네이버 불면증 오디오클립,  '책 읽다가 스르륵'을 연재 중입니다.








https://www.instagram.com/chloe_lhj/

*** 일상 소통은 인스타그램으로 놀러 오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상사 욕 절대로 하지 마라 : 직장 내 인간관계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