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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청안 에세이작가 Nov 04. 2019

고추장 한통과 센스 매뉴얼

삶의 기브 앤 테이크, 그리고 적당한 센스란 무엇인가

     

   “내가 센스가 없었네. 인정!”

   친구 박반장(그녀의 별명)이 그 말을 했을 때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내 기준에 그녀는 항상 무던하고, 호불호가 별로 없어서 어떤 ‘센스’가 발휘될 정도로 말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원래 센스는 없잖아!”라고 하려다가 혹시나 그녀에게 상처가 될까 봐 말하지 않았다. 이 또한 나 혼자만의 착각일 수 있다. 나는 타인을 매우 신경 쓰는 사람이고, 그녀는 우직하게 소신을 지키는 타입의 사람이라 남의 시선에 큰 관심이 없다.

 

   센스는 타고나길 예민하게 태어난 사람에게만 한정된다고 믿는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너는 너, 나는 나, “내가 낸데(경상도식 당당함)” 하는 사람들은 이 ‘센스’라는 것과 거리가 멀다. 의례 사람들이 말하는 “센스 있다”는 칭찬은 나같이 예민하고, 앞서 리스크를 걱정하는 사람에게 덧씌워지는 이미지다. 내가 센스 있는 사람이라고 자랑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박반장의 ‘센스’라는 단어가 방아쇠를 당겨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박반장 스스로 본인이 센스가 없었다고 인정한 발언의 전말은 이랬다. 어느 날 그녀가 우리 집에 놀러 왔고, 나는 몇 가지 음식을 대접했다. 그녀는 착하게도 내가 요리하고 조리한(어떤 음식은 요리라고 칭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조리에 가까움) 음식들을 맛있게 먹어주었다. 그리고 이건 어떻게 만들었고, 이 소스는 무엇이며, 이 정도 맛을 내려면 어떤 비법을 가져야 하는지 물었다. 그 과정에서 고추장 이야기가 나왔다.

 

   “아니, 우리 엄마가 집에서 고추장을 담근다고 했더니 옆 팀 팀장이 그것 좀 살 수 없겠냐고 하더라. 예전에는 그분 어머니가 된장 고추장 다 담갔는데 이제 몸이 아파서 못하신대.” 박반장의 어머니는 아직 사회생활을 하고 계신데, 서울에 올라올 때면 딸들 먹으라고 늘 음식을 바리바리 싸온다고 들었다. 고추장을 담그는 것은 몰랐는데, 이 시대의 진정한 어머니 같아서 절로 감탄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박반장의 의도를 모르겠어서 이렇게 물었다.

 

   “그래서? 그분한테 팔았어?” 내 말에 그녀가 약간 당황했다. “팔긴 뭘 팔아. 딱 우리 식구 먹을 정도만 한 건데. 팔게 뭐가 있어.” 박반장이 말하는 옆 팀 팀장이라는 그분은 어머니 손 맛이 그리워서 고추장을 살 수 없냐고 물었을 것이다. “팔 수 없으면 조금만 주지 그랬어. 그분이 어머니 손 맛이 그리워서 말한 거 같은데” 내 말에 그녀가 깊은 생각에 빠지며 “그럴걸 그랬나?”했다.  


   “한번 드리면 은연중에 계속 원할 수 있으니까. 조금만 주면서 이번 한 번만 나눠드리는 거예요 라고 하면 좋아했을 것 같은데?” 나라면 어머니 손 맛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 나누어주고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단서를 달았을 것이다. 호의가 권리로 돌변하는 것은 서로 곤란하니까.

 

   “네 말 들으니까 진짜 그럴걸 그랬네. 왜 그런 생각을 못했지? 그냥 못 판다고 그랬는데. 내가 센스가 없었네. 인정. 그분이 좀 민망했을 수도 있겠다.”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방식이 있다. 같은 말, 같은 표현을 대할 때에도 어떤 사람은 화를 내고, 어떤 사람은 껄껄 웃는다. 또 어떤 사람은 무표정 무대응으로 일관하기도 한다. 기브 앤 테이크에도 저마다의 방식이 있다. 내가 베푼 친절과 센스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런 나를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손쉽게 이루려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속에 '나만의 센스 매뉴얼'을 만들었다.


1. 센스를 발휘하거나 베풀 때에는 기브 앤 테이크를 생각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내게 돌려주지 않더라도, 내 마음이 움직여 행한 일이므로 서운해하지 않는다. 나의 센스는 내 마음 편하려 선의로 행한 일이지, 되돌려 받기 위해서 혹은 생색내기 위해서 한 일이 아니다.

 

2. 원래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서비스'로 베푼 센스에는 반드시 조건을 붙인다. "이거 제가 딱 한 번만 도와드리는 거예요." 하거나, "이번에는 제가 처리하겠지만, 다음번에는 담당자에게 문의하세요."혹은 "정말 특별히 차장님이니까 제가 해드리는 거예요. 소문내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한다. 지금의 나는 당신을 돕지만, 이건 정말 한정적인 경우이며 특별한 상황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래야 탈이 없다.

 

3. 물고기를 주지 않고, 물고기 잡는 방법을 준다. 특히 회사 업무와 관련된 일에는 '물고기 잡는 방법'에 치중한다. 일의 선후 관계를 자세하게 설명하여, 물고기를 어떻게 잡을지 상대방이 생각해보도록 만드는 센스를 베푼다. 때로는 책을 선물하여 행동을 이끌어낸다. 내 입장에서는 그냥 물고기를 주는 것이 훨씬 편하고 쉽다. 하지만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언제까지나 내가 떠먹여 줄 수는 없다. 그러니 '방법'을 주어야 한다.

 

4. 아무에게나 센스 혹은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 내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 소중한 사람, 그리고 내가 베푼 것들을 감사히 여길 사람에게만 센스를 보인다. 그래야 내가 다치지 않는다.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며 행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대에게 가시가 있는데 내 손을 내밀며 다가갈 수는 없다. 나는 나를 다치게 하지 않을 사람에게만 나의 센스를 허락한다.


   나의 ‘센스’는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즐겁게 할 수 있지만, 정도에 따라서 본인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래서 과한 센스는 자꾸 덜어내려고 한다. 입 맛 당기는 고추장 한 숟갈도, 넘치면 너무 매워지는 것처럼.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자꾸 살펴야 한다. 그래도 타인을 향한 나의 센스는 자꾸만 생긴다. 나를 괴롭히는 나의 과한 센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견고하다. 어떤 이들은 이런 과한 센스를 가식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니 나는 내게 생겨나는 센스를 덜어내야 한다. 종종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고, 나를 욕 먹이는 존재이니까. 내게 '센스 매뉴얼'이 있는 이유는 타고난 타인 중심의 센스를 적당히 발휘하려는 나만의 노력이며 지혜다.

 









*** '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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