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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청안 에세이작가 Jan 30. 2020

나를 버티게 하는 것이, 나를 지배한다

조금만 더 나태해질 것을 묵인하는 '나'를 자꾸 발견한다면

   휴일 오전, 뇌는 이미 잠에서 깨어, 있는 대로 활성화되었다. 하지만 몸은 꼼짝하지 않고 누워있다. 내 정신상태는 육체에게 계속해서 신호를 보낸다.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제발 좀 움직이라고. 그런데 그 신호는 보통 이삼십 분쯤 무시되다가 외부의 강력한 자극이 있거나 스스로 정말 추레하게 느껴져야만 벌떡 일어나 반응한다. 외부의 자극은 대게 이런 것이다. 가족 중 누군가가 밥 먹으라고 강제로 소환한다거나, 약속시간이 임박했다거나 하는 것들. 이렇게 자극받아 하루 일과를 시작하면 뱃속 내장지방 한 복판이 뭔가 답답하고 찝찝한 것이, 저녁 무렵까지 개운치가 않다. 그런데도 그다음 휴일이 되면 마치 데자뷰처럼 정신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고 이불속에서 볼을 부비며 '조금만 더 나태해질 것을 묵인하는' 나를 발견한다. 참 징그럽다.



   그러고 보면 정신이나 영혼이 육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관성에 의해 지배당한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이를테면 오늘은 출근길로 향하지 않고 다른 목적지에 가기 때문에 지하철을 반대로 타야 하는데 몸이 나를 같은 방향으로 이끄는 경우다. 또, 글을 쓰려고 컴퓨터를 켜놓고는 목적을 상실하고 인터넷 쇼핑을 하고 있을 때. 운동을 하러 헬스장이나 문화센터로 향해야 하건만 내 발이 저절로 집을 향한 귀소본능을 보일 때. 이런 때는 여실히 육체가 정신을 지배한다.


   그래도 나는, 정신이 육체를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계상황에서 육체는 정신을 다스릴 수 없지만 정신은 육체를 통제할 수 있다. 이것이 '정신력'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이유가 아닐까. 얼마 전 TV에서 '1박2일(KBS)' 재방송을 보았다. 화질이 또렷하지 않았고 멤버 구성을 보았을 때, 시즌1 초창기 방송인 것 같았다. 이들은 겨울 설악산 종주를 시도했는데,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과적으로는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모두 성공했다. 프로그램은 이들에게 '한계를 희망으로 극복했다'고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출연자들은 서로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산꼭대기 대피소에 모여 앉아 언 발을 녹이며 담소를 나누는데, 이승기가 하는 말이 웃기면서도 무섭다. 글쎄, "조상님을 네 분 뵈었다"고 한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출연자와 스태프 모두 프로정신과 투지로 버텨낸 성과였다. 멤버들은 다음날, 대청봉에서 일출까지 무사히 본다. 구름은 그들의 발아래 있었고, 온 세상은 그들의 시선 아래 겸손히 위치하고 있었다. 육체적 고통을 정신력으로 버텨낸 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풍경이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이 끝나면, 사람들은 주목받은 선수들이나 메달을 쟁취한 선수에게 관심을 가진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 정도의 성과를 내기까지 얼마만큼의 노력을 쏟아부었을지 가늠하기 때문이 아닐까. 예측하려 하지 않았지만 예측되는 피땀도 있다. 얼마나 많은 시간 힘들게 여기까지 버텨왔을까. 무엇보다, 그들은 공정하게 여기까지 왔다. 시간은 때로 사람을 뛰어넘고, 사람은 때로 시간을 뛰어넘는다. 육체의 고통을 뛰어넘은 정신의 승리이다.


   만약 어느 휴일 아침, 뇌는 진즉 정신을 차렸지만 몸이 움직이고 싶지 않았던 그 순간 '오늘은 아침부터 밤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는 날'이라고 내가 정했다면 어땠을까. 애초부터 계획된 일과를 내가 실천하고 있는 것이었다면. 아마 찝찝하고 답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널브러져 있기를 소망하는 육체에 지배당한 것이 아니라, 멀리 걷기 위해 쉬어가는 현명한 정신의 계획적 휴식이었다면. 나를 버티게 하는 것이 나를 지배하게 된다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 나를 버티게 하는 것은 육체보다는 정신에 가까워야 즐겁고 개운하게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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