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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Oct 17. 2022

[,] 아근바근한 볶음밥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과 '모든 것은 변한다'는 말이 있다. 살아보니 둘 다 맞는 말이다. 나만 하더라도 어떤 점은 지겨울 정도로 그대로이고 어떤 점은 놀랄 정도로 바뀌었다. 가장 변한 것은 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린아이에게 꿈을 묻는 게 일상적이다. 초등학생의 나는 한 번도 어른이 된 내 모습을 진지하게 생각한 적도 없건만 누가 꿈을 물으면 선생님이라고 대답했다. 그게 가장 무난한 답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그렇다고 쭉 문학가를 꿈꾸지는 않았다. 중간에 잠깐 거쳐간 꿈이 몇 개 있다. 그중 하나는 농부다.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친환경 농법을 실천하는 농부가 되고 싶었다. 실제로 한 달쯤 농촌 활동을 해보니 고되지만 단순한 일상이 성향에 딱 들어맞았다. 결국 공동체 생활에 녹아들지 못해서 관뒀지만. 이런저런 시도 끝에 몸도 마음도 지친 나는 일단 입에 풀칠이나 하자는 생각으로 아르바트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게 고용주 눈에 들어 여기저기서 직원직을 제안받았다. 이대로 직원으로 눌러앉아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몰상식한 손님과 상사의 이중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백수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룬 것도 없이 삼십 대에 들어서고 나니 내가 청춘을 그리 잘 보내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 일을 하나씩 적어나가다 보니 생각보다는 꽤 도전적인 삶이었다. 20살의 나, 21살의 나, 22살의 나,...,29살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내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우리는 서로를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한심해 하고, 불쌍히 여기고, 부러워하고, 슬퍼하고, 원망하고, 여러 감정이 들 것이다. 분명 우리는 한 사람이었지만 세월은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나눠 놓았다. 지금 이 순간도 나는 새로운 나와 이전의 나로 나뉘고 있다. 분리되는 한 순간을 명확히 짚을 순 없지만 분명히 아근바근 벌어지는 중이다. 


아근바근
「1」 목재 가구나 문틀 따위의 짝 맞춘 자리가 조금씩 벌어져 있는 모양.  
「2」 서로 마음이 맞지 아니하여 사이가 벌어지는 모양.  


보통 집밥이라고 하면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를 떠올리겠지만, 나에게 집밥 느낌을 가장 강하게 풍기는 음식은 볶음밥이다. 자취하고 나서 가장 많이 만들어 먹은 음식이 볶음밥이기 때문이다. 화려하게 프라이팬을 휘두르는 기술은 없었지만 기름에 밥과 채소를 같이 볶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때로는 밥이 질어 밥알이 덩어리지거나, 화력이 약해 당근과 감자가 덜 익을 때도 있었지만 한 번도 남긴 적은 없었다. 내 취향은 당근, 양파, 감자, 호박을 작게 사각썰기하여 소금으로만 간을 맞춘 볶음밥이다. 대파 기름을 내거나 굴소스를 쓰는 등 고수들이 알려주는 비법을 쓰면 맛은 나아지겠지만 향수를 불러일으키진 않았다.


중국집에서 볶음밥을 시키면 짜장 양념을 같이 보내준다. 하지만 마른 볶음밥 상태로 그냥 먹는 게 언제나 낫다. 짜장을 뒤집어쓰면 고슬고슬한 식감이 사라지고 기름의 고소한 맛과 은은한 채소 향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재료가 뒤섞인다는 점에서 볶음밥과 비빔밥의 기본 원리는 비슷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비빔밥은 고추장의 찰기가 밥과 채소 사이를 끈끈하게 이어주지만, 볶음밥은 미끌거리는 기름이 밥알과 채소를 아근바근 떼어놓는다. 몸은 그렇게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정신은 하나로 이어져 있는 게 볶음밥의 미덕이다.


오랜만에 볶음밥을 시켜 먹으며 과거의 나와 화해했다. 더없이 가까운 사이였던 우리는 다시는 볼 수 없는 남이 되었지만, 절대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는 사실은 불행이 아니라 다행일지도 모른다. 하나처럼 보이는 지금의 나도 매순간 벌어져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로 갈라지겠지만, 그것이 삶의 풍미를 더해준다면 아쉬워 할 이유가 있을까? 내 인생에 얼마나 많은 재료가 쓰였는지, 그래서 얼마나 풍부한 맛이 나는지에 더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가끔 싫어하는 재료가 볶음밥에 섞이더라도 삶은 고소함이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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