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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Oct 17. 2022

[,] 자발없는 비빔메밀국수

왜 이렇게 시간은 참을성이 없을까. 아침부터 밤까지 성격 급하게 앞서간다. 나는 아직 할 일을 다 끝내지 않았는데. 내가 벌써 삼십 대 초반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열아홉이던 나는 성인이 되면 하루하루를 빠짐없이 보람차게 보낼 거라 믿었다. 수동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 학생이라는 신분을 하루빨리 벗어던지고 당당히 내 삶을 이끌고 싶었다.


이십대 초반의 객기는 보상심리가 바탕이었다. 판돈을 잃은 도박꾼이 본전을 찾으려고 계속 판에 끼어들 듯 허무하게 흘려보낸 십대 시절의 환상을 이십 대에서 찾아헤맸다. 그래서 이십 대가 유령처럼 자취도 없이 지나가버렸다. 원래 없던 것을 열심히 찾아 헤맨 잘못이다. 내가 삶의 주인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내 시간은 최저시급으로 환산되거나 때로는 그보다 저렴하게 책정되어 부실한 내 끼니가 되어줄 뿐이었다. 윗돌 빼서 아랫돌 괴고 아랫돌 빼서 윗돌 괸다는 말이 딱 맞았다.


나이가 몇이던 나는 영원히 자발없는 시간의 자녀일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영원히 시간으로부터 자립하지 못하리라. 성격 급한 부모는 뒤에서 꾸물거리는 자녀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시간은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든, 내 마음이 어떻든, 내 손을 잡아끌테고 나는 질질 끌려갈 것이다.


가끔은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영화나 만화 속 장면처럼 일순간 눈앞의 모든 것이 얼어붙었으면 좋겠다. 그 순간 나는 하늘에 얼룩처럼 눌러 붙은 구름을 보며 깊게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마침내 숨 쉴 틈이 새겼다는 듯이. 왜 이렇게 사람은 바쁘게 살아야 하는가. 빠르게 굴러가는 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 휴대전화를 새로 바꿀 생각이 없는데 깨진 액정을 바꾸러 수리를 맡겼더니 부품이 생산되지 않는단다. 제조사가 제조를 멈춰 버리면 나야 어쩔 수 없이 새 휴대전화를 사야 한다. 분명히 내가 쓰는 기종도 놀라운 기술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광고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겨우 5, 6년만에 고물이 되어버렸다.


나만의 맛집이던 식당들은 지금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 아무리 맛이 훌륭하고 정성스럽게 손님을 대접해도 유행을 따라가지 않으면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니 나이먹을수록 우울해질밖에. 내가 아무리 부지런한 단골이 되어도 가게 운영에는 새발의 피였다. 한국 국민이 유행에 민감한 것이 어떤 산업에서는 장점이라고 하지만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도 자랑스럽지 않다. 어느 하나가 유행하면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 거리에서 어떤 특색도 느껴지지 않을 때는 프랙털 구조 안에 갇힌 기분이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는 데 내 푸념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나는 천천히 가자고 하는데 세상은 늘 그렇듯 빨리 간다.


자발없다
 행동이 가볍고 참을성이 없다.  


매운 음식을 먹을 때마다 비염 때문에 맑은 콧물이 흐르면서도 비빔메밀국수룰 주문했다. 고소함과 매콤함이 적절히 섞인 양념이 내 취향을 저격했다. 미안하지만 비빔국수에서 새콤함은 낄 데가 아니다. 면발에 양념이 골고루 묻도록 젓가락으로 뒤집을 때마다 찔꺽거리는 소리가 났다. 양배추와 면을 거의 일대일로 집어 한입 크게 입안에 밀어넣었다. 역시 면은 볼이 불거지도록 씹는 게 제맛이다.


부드러운 메밀면과 아삭한 양배추의 상반된 매력 덕분에 식감이 아쉬울 데가 없다. 입천장부터 잇몸까지 매운 기운으로 뒤덮이면서 따끔거리고 열이 오른다. 그렇다고 젓가락질을 멈출 순 없다. 매울 때는 얼른 새로운 한입을 먹어야 한다. 차가운 국수가 잠깐 입안을 식히고 더 뜨거운 열을 불러올지언정 어떻게 이 맛을 포기하겠는가.


음식을 천천히 꼭꼭 씹어야 몸이 건강해진다는데, 비빔국수는 자발없이 먹어야 온전히 그 맛을 느낄 수 있다. 매워서 얼른 입안의 것을 삼키면서도 미련하게 또 새로운 국수를 입안에 넣는 어리석음이 행복하기만 하다. 부드럽게 뭉개지는 메밀면발에는 고춧가루라는 가시가 돋아 있다. 순순히 으깨지겠지만 골탕은 먹이고 사라지겠다는 심보인가. 한바탕 면이 휘젓고 간 자리에는 고춧가루의 매운맛이 사정없이 입안을 찌른다. 덕분에 찬 음식인데도 입속이 따끈하다.


한그릇 뚝딱 비우니 배가 든든하다. 수많은 면발이 훑고 지나간 입술을 휴지로 닦는데 서너 번 문질러도 발갛게 양념이 묻어난다. 휴지가 한 번은 입술, 한 번은 코밑으로 향한다. 콧물을 훌쩍이고 잇사이로 찬공기를 빨아들이며 겨우 매운맛을 다스린다. 나는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 편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적응하려고 애쓴다. 숨가쁘게 앞으로 돌진하는 시대를 어떻게든 따라가려고 애쓰는 것처럼. 자꾸 연습하다 보면 입속에 채찍질을 하는 매콤한 비빔국수든, 한계를 모르고 질주하는 기술의 발전이든 언젠가는 익숙해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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