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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Oct 17. 2022

[,] 홑진 콩물국수

농촌에서 잠깐 일손을 도운 적이 있다. 매일이 보람찼다. 일과는 무척 단순했다. 새벽에 일어나 김매기를 하고 아침을 먹은 뒤 김매기를 하고 점심을 먹은 뒤 김매기를 하고 저녁을 먹고 시골길을 어슬렁거리다 이른 저녁에 잠들었다. 아침마다 사지가 욱신거릴 정도로 열심히 일했지만 성과만 따지면 그리 유용한 일꾼은 아니었을 것이다. 처음 배우는 밭일이라 어쩔 수 없이 손이 느렸다. 내딴에는 시부적거리지 않고 정직하게 일했지만, 각자 이랑을 하나씩 맡아 앞으로 나가다 보면 어느 새 내가 맨뒤로 처지곤 했다.


마침 모내기철이라 내 손으로 어린 모를 심는 경험도 했다. 모춤에서 조금씩 모를 떼어 진흙 속으로 쑥 손을 집어넣는 일이 왜 이리 오사바사한지 허리 아픈 줄 모르고 일했다. 일을 끝내고 논둑으로 나왔을 때 여럿이 힘을 합쳐 심은 푸른 모가 산들바람에 아느작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오달진 마음에 피로가 싹 날아갔다. 맑은 논물에 뒷산 그림자가 거꾸로 비쳤는데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그 때 나는 일하면서도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도시의 일은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왜 이 정도밖에 받지 못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투성이었다. 한번은 원칙을 무시했다고 지적당했고 한번은 융통성이 없다고 지적당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것도 피로도를 높이는 주범이었다. 윗사람의 지시로 부정한 일에 일조할 때는, 그게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작은 관습이더라도, 마음이 불편해서 당장이라도 관두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이번 달 생활비를 생각하며 피새를 꾹 참아냈는데, 그럴수록 농촌의 홑진 일거리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세상이 발전한다는 게 점점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향하는 것 같다. 지금은 정적하게 일해서 돈을 벌면 바보 취급을 당한다. 쉬고 있을 때도 돈이 돈을 벌게 해야 한단다. 직업은 봉급에 따라 귀천이 나뉜다. 어떤 일들은 곧 로보트가 대체할 일이라며 천시당한다.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것 말고 그 일이 주는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워졌을까. 일하는 보람은 다 소용없는 것일까? 삶의 동력이 100% 돈이라면 얼마나 딱한 일인가. 오늘도 나는 갈수록 복잡해지는 세상에 더 홑지게 살아가고 싶은 푸념을 남몰래 삼킨다.


홑지다
「1」 복잡하지 아니하고 단순하다.  
「2」 성격이 옹졸한 데가 있다.


몇 주를 벼르다가 마침내 시간을 내어 서리태 콩국수 가게에 찾아갔다. 여름엔 찬 콩국수를 겨울엔 따뜻한 콩국수를 파는 곳이었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국물이 진하고 고소했다. 국물과 반죽의 사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질퍽하고 걸쭉한 식감이 일품이었다. 나는 설탕을 넣지 않고 먹는 편을 좋아한다. 그래야 콩의 고소한 맛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간에 아삭하고 짭짤한 생김치를 곁들여 먹으면 간이 딱 맞았다.


먹다 보니 콩국수가 참 정직한 음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찬으로 곁들이는 김치를 빼면 오로지 콩 맛 하나로 밀고 나가는 음식이 아닌가. 조미료, 향신료, 육수, 재료들의 조화, 다양한 식감, 이런 수법을 하나도 쓰지 않고 서리태 하나로 이렇게 든든한 음식을 완성하다니. 콩국수의 홑진 맛에 집중하다 보면 온갖 자극을 받아들이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간종그리는 기분이다.


되직한 국물을 바닥까지 푸지게 마시고 나니 단순하게 사는 방식이 옳다는 확신이 든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애면글면 나를 치장하고 포장하는 일은 죽을 만큼 피곤하다. 이미 나는 완전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기억에 남는 맛을 만들려고 굳이 어울리지도 않는 재료를 섞을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내 인생만 지저분해질 것이다. 좋으면 좋은 것, 싫으면 싫은 것, 이 원칙만 잊지 않고 나에게 보람있는 것을 찾아가고 싶다. 내것이 아닌 것을 손에 넣으려고 터울거리기보다는 타고난 내 모습을 끝까지 밀고 나가련다. 오늘부터 그것이 내 뚝심이고 보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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