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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Oct 17. 2022

[,] 뒤뿔치는 애호박찌개

뒤뿔치다
남의 밑에서 그 뒤를 거들어 도와주다.


대부분 요리에서 채소와 고기가 섞여 있으면 고기가 주인공이 된다. 채소는 가끔 입안의 기름기를 씻어주며 뒤뿔치기나 하는 환기용이 되고 만다. 하지만 애호박찌개는 아무리 큼직하고 신선한 돼지고기가 들어가도 애호박이 주인공이다. 흐물거리는 애호박을 국물과 같이 한입에 넣으면 애호박은 있는 듯 없는 듯 혀를 간지럽히다 홀랑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씹는 것도 얼마 없는 그 건더기를 입속으로 더듬는 게 왜 이리 달근달근한지 숟가락으로 국물을 자꾸만 휘적이게 된다.


애호박찌개는 보기엔 새빨개서 매울 것 같지만 사실 매운 찌개라고 볼 수 없다. 그러기엔 애호박의 부드럽고 은밀한 달금함이 매운맛을 가뿐히 누른다. 국물 속에는 돼지고기의 풍미, 마늘의 알싸함, 고춧가루의 매콤함 등 여러 맛이 섞여 있는데 어떻게 그 모든 맛을 뚫고 애호박의 감칠맛이 제일 돋보이는 걸까. 맹해 보일 정도로 힘이 없는 이 채소가.


애호박이 맛이 강렬한 채소였다면 애호박찌개는 전혀 다른 음식이 되었을 것이다. 아니, 아예 이런 음식이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뚝배기 바닥이 보이도록 국물을 떠먹고 나니 이제껏 내가 살아 있는 이유는,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화려한 재능이 아니라 하루하루 이어온 성실한 노동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멀리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바빴지, 새삼 내 두 다리가 어딜 딛고 있는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땅이 내 두 다리를 단단히 붙잡아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고개를 꺾어 하늘을 보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껏 이룬 것도 없이 삶을 낭비했다는 자괴감이 흐릿해졌다. 원치 않은 일이었을지언정 나를 먹여 살렸다. 좁은 고시텔 방이라도 한 몸 뉠 곳을 마련했다.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옷은 아니지만 깔끔하게 차려입혀 주었다. 돈이 돈을 버는 세상에 어떤 일은 소득이 적다는 이유로 보잘것없는 일이 된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도 초라해진다. 입안에서 소리 없이 스러지는 애호박처럼 내 인생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하고 사라지겠지만 알고보면 내 인생도 꽤 맛있는 축에 속할지 모른다. 나 말고도 많은 인생이 그럴 것이다. 살면서 산해진미를 탐하는 마음을 완벽하게 버릴 순 없어도, 가끔은 애호박찌개를 본받아 뒤뿔치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뜨거운 찬사를 보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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