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구름 May 19. 2021

클리셰, 독을 약으로 사용하기

필살VS로맨스(2020)/구르/네이버웹툰

순정과 무협 장르를 섞었더니 개그가 되었다. 이 작품은 오로지 클리셰만으로 스토리가 진행되는데 그것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녹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웃음을 자아낸다. 그리고 순정과 무협 각각의 클리셰가 따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클리셰를 두 가지 장르가 독자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두 장르의 경합하지 않고 화합을 이루어낸다.


첫 화를 보면 무협고등학교에 다니는 천유비가 사물함에서 도전장을 발견한다. 발신자는 아버지의 원수였다. 그녀는 비장하게 약속 장소로 향한다. 같은 시각 순정고에서는 김신우가 후배가 보낸 고백 편지를 발견한다. 우연히도 약속 시간과 장소가 천유비와 같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 길을 떠나는데 가는 곳마다 마주치게 된다. 그래서 천유비는 김신우를 아버지의 원수로, 김신우는 천유비를 자신을 좋아하는 후배로 오해한다.


천유비는 다짜고짜 무공을 발휘해서 김신우를 공격하는데 김신우는 (아무런 무공이 없음에도) 멀쩡히 살아남는다. 작가의 내레이션을 빌리자면 '순정만화의 주인공은 어떤 폭력에도 꼴사납게 쓰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정 때문에 천유비는 김신우를 상당한 고수라고 오해한다. 김신우는 더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천유비에게 호감을 품게 된다. '대체 뭐하는 여자지? 날 때린 여자는 처음이다.'


이와 같은 변주는 작품 속에서 여러 번 반복된다. 순정과 무협이 접점을 갖고 있는 클리셰가 상대의 관점으로 재해석되는 것이다. 그때 발생하는 웃음을 더 강화시키는 건 상대의 반응이다. 서사가 무협의 방식으로 흐르다가 순정에 속하는 인물들이 개입하여 방향을 틀면 무협에 속한 인물들은 황당하거나 어이가 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인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인물들이 상대방의 장르를 아주 낯선 듯 바라보면서 유머는 극대화된다.


또한 주목할 점은 인물이 본인의 장르에서는 어떠한 이질감도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며든다든 사실이다. 아무리 비현실적인 사건이 벌어져도, 대놓고 전형적인 전개가 펼쳐져도 조금의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독자의 관점에서는 무협이든 순정이든 어느 쪽이라도 클리셰를 금방 발견하고 익숙함을 느낀다. 이러한 차이는 웃음의 대상을 교묘히 바꿔놓는다. 다시 말해서 독자는 장르가 교차할 때 의외성에서 한 번 웃게 되고, 그 순간 다른 장르에 충격을 받고 허무해하는 캐릭터를 보고 또 웃게 된다. 작품 속에서 '액션'과 '리액션'이 동시에 제공되는 셈이다.


꼭 개그나 유머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감정적인 호응은 생활 속에서 흔하게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티브이가 시청자들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방식이 그렇다. 주인에게 버려져서 비쩍 마른 강아지가 비를 맞는 영상이 나왔다고 치자. 일반적으로 시청자는 강아지에게 안쓰러움과 슬픔을 느낀다. 여기에 더해서 카메라는 그 영상을 보는 패널들의 얼굴을 비춘다. 그들은 눈물을 글썽이고 훌쩍이고 가슴 아픈 표정을 짓고 있다. 그들의 반응에 시청자의 슬픔은 더욱 증폭된다. 유튜브에 '리액션' 영상이 구독자들을 매혹시키는 원리도 이와 비슷하다.


두 장르를 한 작품에 담으면서 작가는 용두사미 구성을 적극 활용한다. 시작은 최대한 진중하고 장대하면서 끝은 허무할 정도로 미약하고 손쉽게 마무리한다. 무협에서 시작해서 순정으로 끝내거나, 순정으로 시작해서 무협으로 끝내버리니 어느 쪽도 진지함이 머물 틈이 없다.


버스 안에 사람들이 꽉 들어차서 유비와 신우가 딱 붙는 상황을 예로 들어보자. 신우는 그 순간 두근거림을 느끼고 꽃이 두 사람을 둘러싸는 배경이 나타난다. 하지만 유비는 무협에 속한 인물이다. 그녀는 검을 꺼내 순식간에 승객들을 정리해버린다. (죽이는 건 아니고 사람들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서 빈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걸 본 신우는 매우 단순화된 코믹한 그림체로 등장하여 공간의 쾌적함에 감동한다.


작품 틈틈이 작가는 '이미 다 아는 고수끼리 굳이 말 안 해도 알지?' 하고 독자에게 신호를 준다. 설명하자면 이런 식이다. 모험을 떠나려는 유비에게 도인은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걸 찾으러 가는 길은 무척 힘들고 괴로울 게다. 분량 30화 쯤의 고난이겠지…. 그래도 가겠느냐?" 그리고 작가는 유비의 모험을 일일이 그리지 않는다. 대놓고 '유비의 모험은 세 컷으로 줄이겠습니다….'하고 정말 세 컷만 보여준다.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은 바로 작가 본인이다. 작가는 내레이션을 적극 활용하여 각 장면이나 인물을 설명한다. 심지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재미는 조금도 경감되지 않고 오히려 배가된다. 서사가 완벽하게 클리셰를 따르고 있다는 특성 때문이다. 작가라는 화자는 일종의 길잡이처럼 정확히 그 지점을 짚어준다. 그리하여 독자는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기보다 한발 떨어져서 상황을 지켜보게 된다. 독자를 구경꾼으로 만드는 이러한 효과 덕분에 인물들이 상황에 몰입할수록, 또 진지할수록 이야기는 희극으로 변모한다.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자막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 떠올려보면 이 작품 속에서 화자의 몫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개입이 희극적인 효과를 일으키는 원인은 말투의 온도차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작품 속에서 인물들은 장르의 특성상 극적이고 과장된 언행을 하게 되는데 이와 대조적으로 작가의 내레이션은 무척 건조하고 사무적이다. 이러한 부조화 때문에 작품 속의 상황은 더욱 희극적으로 보인다. 화자는 인물의 전형성을 꼬집고 클리셰의 부조리를 인정하며 인물들의 허술함과 순진함을 비웃는다. 고로 인물이 진지해질수록 유머의 강도는 높아진다.


순정 고등학교의 축제란?
대학 축제를 뺨칠 정도의 규모와 인파를 자랑하며,
대학 축제의 뺨을 한 번 더 칠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와 이벤트가 준비된,
순정만화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초호화 이벤트를 말한다.
-24화 내레이션 중


클리셰를 정면으로 돌파해나가는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하면 역시, 이것이 '만화'라는 것을 전혀 숨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협, 순정, 개그, 세 장르를 넘나들면서 바뀌는 그림체만 보더라도 독자는 이것이 만화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시각적인 정보 이외에도 내레이션이나 인물의 대화 속에서도 이러한 정보는 심심찮게 발견된다. 회상을 사용할 때는 '며칠 전' 따위가 아니라 '몇 화 전'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작가는 독자가 장르의 문법에 몰입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이것이 만화라는 것을 일깨운다. 이것은 독자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작품 속 캐릭터인 신우조차 본인이 만화라는 세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꼭 자각몽을 꾸는 것처럼 말이다. 작가는 사실성이나 핍진성을 애초부터 내려놓았다. 대신 만화적 문법으로만 작품을 끌고 간다. 만화가 다른 예술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작가의 선택은 옳았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만화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또다시 확인했다.


어쩌면 이런 클리셰들이 진부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클리셰라는 게 오랫동안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단 뜻이니,
이 진부한 이야기도 당신에게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면 좋겠다.
-에필로그 내레이션 중


매거진의 이전글 중력을 거스르는 능력보다 특별한 해맑은 미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