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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Jun 07. 2021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면 정말 바꿀 수 있을까

별종(2019)/이무기/네이버웹툰

《별종》이 그리는 세계에서는, 중학생 대대가 조카 나연을 향한 것을 제외하면, 연민이 없다. 심지어 자기 연민도 없다. 내가 누군가에게 맞는 이유는 내가 약해서라고 생각한다. 강자가 약자를 누르는 건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 우열 관계는 좀처럼 역전되지 않아서 약자들은 폭력에 적응한다. 그러다가 어쩌다 기회가 생기면 주저 없이 상대방에게 되갚아준다. 그러지 않을 이유를 고민조차 하지 않고 본인이 당한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보복한다. 완전히 폭력의 세계에 편입된 그들이기에 잔인함이나 흉포함에 대한 거부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분노가 채워지는 순간 인물들은 그 원인이 되는 대상을 압살해버린다.


대대가 속한 1999년의 세계는 '복덩이'나 '문어'가 등장하기 전부터 지옥이었다. 2화를 보면 성적이 낮은 학생들을 선생이 구타하며 폭언을 내뱉는 장면이 등장한다. 선생은 "너 낳아서 키운 부모는 무슨 죄야?!! 니네 부모가 불쌍하지도 않냐? 어?!! 아? 대대 너 아빤 돌아가셨지?", "니들은 벌레야!! 반 평균 깎아먹는 버러지만도 못한 ㅅㄲ들!!!"라는 말을 내뱉으며 자신의 우위를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확인한다.


이러한 환경에 무방비한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는데도 대대는 다소 온건한 학생이다. 한밤중에 나연이 똥이 마렵다고 하면서 깨우면 졸음을 이겨내고 화장실에 데려다주고 업어달라는 투정도 다 받아준다. 《별종》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관계가 있다면 바로 대대와 나연의 관계일 것이다. 하지만 '복덩이'와 '문어'가 등장하면서 인간적인 관계는 종말을 막지 못하는 치명적인 원인으로 전락한다. 전통적으로 인류가 지켜온 가족애라는 것이 끝까지 지켜야 하는 가치가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극복해야 하는 결함이 된다.


'복덩이'가 등장하면서 대대가 가장 먼저 알게 된 사실은 미래 또한 지옥이라는 것이다. '복덩이'가 보여준 영상을 본 대대는 그것이 2020년의 자신의 모습이라고 믿게 되고,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한 미래의 삶에 충격을 받는다. 대대의 미래를 본 낙천 또한 호기심에 '복덩이'에 손을 대는데 그의 미래도 끔찍하긴 마찬가지였다. 미래를 본 대대는 현실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잃어 버린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복덩이'의 등장은 그들에게 영원히 지옥을 벗어날 수 없다는 엄중한 선포나 마찬가지였다. 하필 주인공 친구들이 다니는 학교가 영곡(永谷) 중학교, 영원한 골짜기라는 이름을 지닌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불운한 미래를 목도한 인물들은 현실 속에서 거리낌없이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낙천은 어차피 교도소에 들어갈 것임을 알기에 더욱 주먹을 휘두르는 데 망설임이 없고, 중팔은 집안의 재력을 배경으로 권력자 행세를 한다. 이처럼 도덕적 타락이 일상처럼 벌어지는 와중에 폭발 사고, 살인마의 등장까지 연달아 발생하며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종말론을 거론한다.


하지만 종말이라는 것이 세상의 소멸이라면 차라리 그것이 구원으로 보일 정도로 그들이 사는 세상은 이미 파멸된 상태였다. 윤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은 악을 이기는 것이 선이 아니라 또 다른 악이라는 점으로 증명된다. 변태적 취향을 가진 체육 선생을 죽이는 것은 연쇄 살인범인 나미이고, '문어'에게 조정당하는 체육 선생에게 정명이가 납치되었을 때 구하러 가는 사람은 그녀가 싫어해 마지않는, 그리고 낙천을 폭행했던 임용기이다.


무엇보다 가장 암울한 사실은 중심인물들끼리의 합심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중필은 낙천의 가난을 조롱하고 대대의 미래를 비웃으며, 대대가 짝사랑하는 명이는 낙천과 사귀게 되고, 그렇게 연인이 된 두 사람은 '복덩이'가 보여준 파탄난 결혼 생활을 보고 하루 만에 헤어지고, 미래에 눈부신 미모를 갖게 된 승옥은 그러한 모습을 못마땅해하는 명이와 싸움이 붙고, 결정적으로 나연이가 바이러스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에는 모든 친구들이 대대에게 등을 돌린다. 끝까지 신뢰와 우호로 이어지는 관계는 대대와 나연뿐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는 대대가 최후의 순간까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된다.


《별종》에서 가족 관계가 불행의 양식장처럼 그려지는 것은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결국 이 작품은 바이러스를 없애지 못하고 자꾸만 과거로 회피하는 '복덩이' 때문에 생기는 무한루프와 그 속에서 지긋지긋할 정도로 반복되는 지옥도를 그리고 있는데, 인류의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관계가 바로 가족 관계이기 때문이다. 장성한 자식이 부모가 되어 자식을 낳고, 또 그 자식이 자라서 가정을 꾸리고, 또 그 자식이 자라서…….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관계의 변환 속에서 불행은 대물림되고 역사는 반복된다.


다시 말해서 가족이란, 불행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별종》의 인물들은 가족 때문에 삶에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대대만 하더라도 아버지와 누나의 부재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중필네 가정부 득순은 사장 부부의 협박으로 강제로 최철근과 결혼하게 되며(득순에게 결혼은 일종의 형벌이다), 소천은 새로운 가정을 꾸렸으면서 소천의 집에 찾아와 금전을 탈취해가는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한다. 그렇다고 소천의 아버지가 새로운 가정에서 안락한 삶을 이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가 본인의 자식이라고 믿고 있는 쌍둥이 자녀는 사실 다른 남자의 자식이었고, 경마에 빠져 살던 그가 중병에 걸린 후에는 아내에게 버림받는다. 이를 보고 있으면 가족의 구성원이 바뀐다고 해서 운명이 바뀌진 않으며 가족 안에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절망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별종》은 1부 '기쁜 우리'와 2부 '무정'으로 구성되는데 2부에서는 가족 관계에 내재하는 갈등과 불화가 더 세세하게 그려진다. '문어'가 은하의 소멸을 예언했던 시기인 2021년이 배경인데, 이미 도시는 폐허로 변해 있고 스물아홉이 된 나연과 그녀의 남자 친구 영광은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가 미미 산장 속에서 객식구가 되어 연명해나간다.


산장 속에는 거동이 불편하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할아버지와 안주인인 득순, 그녀의 딸 미미까지 이렇게 세 사람이 살고 있는데, 득순은 과거 중팔의 집에서 멸시를 받으며 일하던 가정부였으며 그녀가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노인은 사실은 득순이 모시던 사모님의 아버지였다. 딸에게 버림받은 노인을 득순이 돈을 받고 모시고 있었다. 그렇기에 노인은 상황이 악화되자 곧바로 버려지는 신세로 전락한다. 거기다 바깥 상황을 알아보러 나간 득순의 남편 최철근은 돌아오자마자 식구들 위에 군림하고 그에게 핍박받던 득순은 독약으로 암살을 시도한다.


산장의 실세나 다름없는 최철근이 노인을 내다 버릴 계획을 세울 때 그의 욕망이 드러나는 대사가 있다. 이는 작품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공포의 근원과 맞닿아 있다. 그가 "선조들의 지혜가 듬뿍 담긴 고려장"을 떠올리며 "전통 풍습"이니까 괜찮다고 말하자 나연은 고려장은 우리나라 풍습이 아니라며 이렇게 반박한다. "노인을 산 채로 버렸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될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고려의 장례 풍습이라 여기게끔 널리 퍼진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러자 최철근은 노발대발하며 "나 땐 그렇게 안 배웠어!! 내가 배운 지식이 전부 틀렸다는 거야?!!"라고 나연을 몰아붙인다. 그리고 "내가 살아온 삶이 모조리 거짓이냐고!!!"라고 격분하며 "난 나 때 배운 전통을 이어나가겠어!"라고 덧붙인다.


이 대사가 왜 등장한 걸까? 이전에도 그는 길거리에서 자신의 트럭을 빼앗으려는 젊은이들에게 탄약을 발사하며 '요즘 젊은것들'을 폄하하는 말을 내뱉는다. 이러한 행동에서 발견되는 지배자의 욕망은 본인이 구축한 질서와 가치관을 피지배자들이 그대로 세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요점은 한 치의 변화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설사 오류와 부작용이 발견되더라도 말이다. 그에게 완벽이란 결점이 없는 세계가 아니라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세계이다. 그 세계가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최철근이 침입자를 향해 산탄총을 쏘며 "내 왕국을 침범하지 마."라고 말하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자신의 세계를 공고히 유지하고자 하는지, 그 의지가 얼마나 강력한지 짐작할 수 있다.《별종》이 풍기고 있는 공포의 냄새는 이러한 억압이 근원지이며 지배자가 건재한 이상 피지배자들은 탈출의 의지를 새싹부터 짓밟히게 된다. 그리고 번식은 새로운 세계의 창조가 아니라 지배자들에게 무릎 꿇는 복종의 행위로 전락한다. 어차피 새로운 사람이 태어난들 지배자의 질서에 갇힌 자식일 수밖에 없고 자식은 언제까지나 상명하복 하는 종복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하면 득순이 죽은 뒤 나연을 새로운 여왕으로 맞이하려는 최철근의 대사는 얼마나 소름 끼치는가. "남은 자들은 악착같이 종족을 번식시켜야 할 의무가 있어. 허니는 여왕이 될 자격이 충분해! 신인류의 어머니가 되는 거야!"


이처럼 온갖 불신과 위험이 도사리는 산장임에도 나연과 영광이 그곳을 떠나지 못했던 이유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섬광이 잇따라 터지면서 도시는 이미 초토화된 상태였고 국가의 모든 기관이 마비되어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두 사람으로서는 그곳 이외에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도피라고 해봤자 그곳보다 더 최악인 환경으로 향하는 것뿐이었다. 영광이 "여기가 안전해. 지금이 최선이야."라고 읊조리며 밤을 지새우는 장면이 섬뜩하게 다가오는 것은 사실상 그 말이 일종의 자기 최면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망은 다른 차원의 나라고 해서 지금보다 나을 것 없다는 1부의 설정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지금 이곳이 얼마나 끔찍한 곳이든 어떻게든 적응해서 살아남아야 한다. 인물끼리의 불신도 연결성을 찾을 수 있다. 산장을 운영하는 가족 구성원들이 그렇고 무엇보다 끝까지 서로를 의지해왔던 나연과 영광 사이 또한 그렇다. 나연은 영광이 자신의 소꿉친구 미정과 바람을 폈을 거라는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데, 결정적인 순간 영광이 그 사실을 고백하면서 (그것이 거짓 고백일 가능성도 있지만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나연은 완전히 영광을 떠나게 된다.


그렇게 혼자가 된 나연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본인이 바이러스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가 작동하면서 땅속에 묻혀 있던 '복덩이'가 모습을 드러내고 나연은 '복덩이'를 통해 죽은 대대의 이미지와 만난다. 대대는 그녀에게 이번 차원에서 바이러스 퇴치는 이미 늦었으며 지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차원과 연결된 전화를 통해 바이러스 퇴치 방법을 알려주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차원이 반복할수록 시간과 상황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비록 현 차원은 멸망이라는 결말을 맞이하지만 또 다른 차원의 결말은 아직 모르는 것이다.


"끝이 있다는 건 축복"이라는 '문어'의 말을 빌리자면 인류는 오히려 세계의 종말을 손꼽아 기다리며 환호성을 질러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대와 나연은 무한루프를 감수하고서라도 어떻게든 종말을 막으려 한다. 종말보다 무서운 것은 종말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사람들의 태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낙천만 보더라도 그렇다. 수많은 차원을 통해 자신의 미래가 얼마나 비참한지 알게 된 낙천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살아가며 현재의 삶까지 망가뜨렸다. 결국 우리가 최선을 다해 종말을 막아야 하는 이유는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내일 죽은 내가 그토록 바꾸고 싶던 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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