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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Apr 24. 2021

내일로 건너가는 방법

죽어도 좋아♡(2018)/골드키위새/다음 웹툰

백 과장은 유교의 폐습을 그대로 이어받은 구시대적 발상에 사로잡혀 성 차별, 학력 차별, 외모 비하, 인신공격, 인격 모독을 밥 먹듯 해대는 악덕 상사이다. 같은 부서의 부하 직원들은 매일 같이 그에게 못된 말을 들으며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그렇다고 나이도 많고 직급도 위인 그에게 대놓고 대들 수는 없었다. 뒤에서 실컷 욕하며 죽으라고 저주를 내리는 것으로 서로의 속상한 마음을 달래기만 할 뿐.


그러던 어느 날 이루다 주임이 타임리프를 경험하며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그녀는 누군가가 백 과장을 상대로 '죽어'라는 말을 하면 그가 사고를 당해 죽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가 죽으면 하루가 리셋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타임리프를 인지하는 건 본인뿐이었다. 그때부터 그녀에겐 남모를 임무가 시작된다. 백 과장을 개과천선시켜서 누구에게도 원한을 사지 않게 만드는 것. 내키지도 않고 실현 가능성도 매우 낮았지만 내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만인의 미움을 사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여기서 좋은 사람이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 혹은 성인군자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무리 없이 다른 사람과 어울리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만큼 최소한의 호의와 배려를 갖춘 사람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백 과장은 애초부터 본인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백 과장은 주변 사람들에게 악담을 퍼부으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듣는 사람보다야 아니겠지만 나름대로 불쾌함을 감수하고 그런 말을 조언이랍시고 했던 것이다. '세상이 미련하다 욕해도 조급해하지 말자.', '리더에게는 무거운 책임감이 따른다. 리더는 언제나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만은 없다.'라는 게 그의 진심이었다.


과장에게 있어서 회사 여직원들은 자기가 훈수를 둬서 마땅히 고쳐놔야 하는 '틀려 먹은' 인간들. 자신의 지적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며 사람들이 자길 싫어하는 건 그런 솔직함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0화 중


이해할 수 없는 이러한 신념엔 허점이 있다. 솔직함이 자신보다 사회적 위치가 낮은 사람들에게만 발휘된다는 것이다. 즉 솔직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위험부담이 전혀 없었다. 유 부장이 자신의 심기를 건드려도 함부로 대꾸하지 못하고 뒤에서 화풀이를 하는 모습만 봐도 그의 솔직함이 얼마나 비겁한 이중 심리인지 여실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 현실 속에서 신입 사원이 과장에 면전에 대고 그의 인격적 단점을 지적했다고 생각해보자. 그 사원은 퇴직을 비롯한 모든 징벌을 각오하고 그 말을 꺼냈을 것이다. 반면 과장은 근무 시간이든 점심시간이든 아무 때고 편하게 그 사원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 것이다. 우리가 상사의 험담을 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발언권의 불평등. 


그렇다면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는 '백 과장'들은 영원히 나아질 수 없는 것일까? 우리가 '몹쓸 인간'들을 단칼에 처단할 수 없는 건, 그게 유일한 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대안을 찾는 중이다. 악을 악으로 처단하는 순간 우리 또한 타락하리란 걸 잘 알고 있기에 굳이 어려운 길을 돌아가는 중이다. 타임리프 때문에 이루다와 백 과장은 좋든 싫든 운명공동체가 되고 만다. 현실이라고 다르지 않다.


백 과장이 새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은 그가 지닌 결점 안에 숨어 있다. 어쨌든 그는 (사실이 아니라 착각이지만) 본인이 좋은 사람이라는 데에 상당히 만족했다. 좋은 사람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동기만 잘 부여되면 개선의 의지가 발동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그의 문제는 자기애가 지나쳐서 다른 사람의 반응을 무시하고 본인의 기준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에게 필요한 건 본인의 행동을 돌아보게 할 수 있을 만큼 의미 있는 사람이었다. 자기가 한 말을 듣고 울든 말든 귀찮기만 한 그런 사람이 아니라, 자꾸 관심이 가고 궁금하고 호감을 받고 싶은 사람만 생긴다면, 그 사람의 반응이 따라 변할 수 있었다.


이루다와 사귀는 강 대리의 존재는 백 과장의 회생 가능성에 더욱 힘을 더해준다. 착한 사람으로 평판이 자자한 강 대리는 어릴 때만 하더라도 타인의 고통을 예측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본인의 이기심을 인지하고 그때부터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사회화 학습에 온 힘을 쏟는다. 본인이 바뀔 거라는 자신이 없던 그에게  누나는 이기적으로 살더라도 좋은 이기주의자가 되라고 조언한다. '세상엔 수많은 이기심의 파편들이 있는데 그중 가장 고귀한 이기심이 이타심'이라며, '남을 위해 자신의 무언가를 포기하는 게, 결국은 남을 생각하는 자신을 위한 행동'이라는 가르침을 준다.


이러한 관점이 와닿는 이유는 본래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완전히 지워버리고 새로 태어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갖고 있는 심성을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방법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이기심이 강한 사람을 뿌리부터 이타적인 사람으로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이기심이라는 것을 낱낱이 파헤쳐서 어떻게든 이타심과 맞닿은 지점이 발견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태생부터 완벽한 환경에서 길러져서 사랑이 넘치는 사람보다 노력해서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찾아간 사람들이 훨씬 아름다운 법이다. 후자는 전자와 다르게 의지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강 대리의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백 과장님은 아직 만나지 못한 게 아닐까. 이기심과 이타심이 가장 가까워지는 순간을." 그 순간은 바로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다. 사람은 사랑에 빠졌을 때 가장 이기적이자 이타적인 존재가 된다. 사랑이라는 내 감정을 지키기 위해 내린 선택이 동시에 사랑하는 상대에게도 이로운 선택이 된다. 백 과장 또한 이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이루다가 본인을 좋아한다는 착각에 빠지고 점차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 그러다 이루다와 강 대리의 교제 사실을 알게 된 뒤 엄청난 질투에 휩싸이는데, 특히 '왜 본인이 아니고 강 대리인가'라는 사실에 크게 분노한다. 본인이 보기에 강 대리보다 자신이 훨씬 더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인지부조화를 극복하려고 강 대리를 관찰하던 그는 결정적 차이를 발견한다. 강 대리는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일말의 고민 없이 몸을 던질 정도로 이타적인 성품의 소유자였다.


후에 백 과장은 홀로 타임 리프에 갇힌다. 강 대리를 따라 선로에 떨어진 날, 이루다는 전날 자기가 죽었던 것도, 하루가 되돌아간 것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이를 기점으로 타임 리프의 주도권은 완전히 백 과장에게 돌아간다. 백 과장은 반복되는 하루를 살면서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는 이루다가 죽지 않는 결말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아예 타임 리프가 발생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데 성공한다. 타임 리프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려준 건 이루다였지만 결국 그것을 지운 건 백 과장이었다. 문제를 인식하는 단계에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바뀌는 건 결국 본인의 힘으로 해내야 한다. 누구나 그러한 힘이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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