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닙 Oct 10. 2016

2월의 이탈리아 | 에필로그

어디론가 떠날 땐 생각이 (더) 많아진다 

새벽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는 고요하다. 기내는 승객들로, 창 밖은 구름마저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꽉 찼다. 먼 길을 떠나는 사람들은 이유가 무엇이든 조금은 떨리기 마련인데, 담요를 머리 끝까지 덮은 옆자리 사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움직임 하나하나가 조심스럽다. 설렘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들은 모니터에서 부지런히 영화를 고른다. 나는 새로 산 초록색 노트를 꺼냈다. 비행기가 흔들렸다. 첫 장부터 글씨가 흐늘 흐늘거린다.  

 



어젯밤엔 4시간밖에 못 잤다. 액션캠을 기껏 사놓고 가져가느냐 마느냐를 새벽 3시까지 고민했다. 그러고도 7시에 눈이 떠졌다. 아침잠은 또 기가 막히게 없으니까. 이러면 좋지 않다. 대낮부터 졸려서 괴롭다. 부랴부랴 가방을 챙기는데, 짐 챙기기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여행을 아무리 다녀도, 짐 챙기는 시간은 별로 줄지 않는다. 


집을 나서는 순간까지 배낭 꾸리기는 계속됐다. 현관에서 아빠가 카드는? 현금은? 핸드폰은? 안경은?... 하시는 순간 떠올랐다. 하마터면 내 생명줄인 렌즈 약을 두고 갈 뻔했다. 역시 챙겨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있어야 한다. 평소 외출할 때 아빠가 소지품 목록을 읊을 때마다 당연히 다 챙겼다고 큰소리치던 나인데. 잔소리는 진한 애정과 동의어다.



보안검색대를 통과한 후 나는 비로소, 간만에, 완벽히, 혼자가 됐다. 침묵의 시간.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귀도가 독일 의사와 수수께끼를 푸는 장면이 떠오른다. 


"당신이 나의 이름을 말하면 이미 그곳엔 내가 없습니다." 



나는 누구? 그렇다. 침묵이다. 나에게 침묵이 인사한다. 공항 면세점 앞에서 한숨 돌리며 외로이 서있는 나에게 침묵이 걸어와 인사한다. 앞으로 18일, 잘해보자고. 혼자 하는 여행의 맛이란, 침묵이랑 동행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혼자 여행하는 사람에게 침묵이란 고마운 선물이다. 일상의 그 어떤 순간보다도 마음껏, 끝없이 그 선물을 즐길 수 있다. 




여행 직전의 고요한 설렘을 몇 번만 더 쓰고, 본격적으로 여행기를 풀어가야겠다. 게으름을 피우다 벌써 8개월이 지난 후에야 쓰게 됐지만, 아직도 그때의 감성과 기억이 생생하니까, 내 초록색 노트에 고스란히 남아있으니까, 휘발성 강하지 않은 오래 남는 여행기를 쓸 거니까,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