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계획은 안 세우고 밥 먹고 영화 본 이야기
여행은 어느 정도 사전 준비를 하고 가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뻔한 이유보다도, 준비하는 과정이 진짜 즐겁고 의미 있기 때문이다. 그 지역을 공부하고 나서 숙소, 교통편을 예약하는 것과 아닌 것은 차이가 크다. 또 '왜 나에게 이 여행이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그래서 여행지 공부는 조건이 아닌 필수다.
그런데 이번에는 4년 전에 다녀온 곳을 또 가서 그런지, 부작용이 생겼다. 과거의 좋았던 기억이 떠오르는 한편, 에이 이미 아는 곳인데 뭐-라는 자만심이 섞여버렸다. (결국 이 자만심은 각종 사건사고를 끌고 오고야 말았다) 그래서 하늘을 나는데도 여행자 기분이 안 났다. 새로운 여행지에 대한 설렘은 없었다. 대신 기내식에 뿅 갔다.
새벽 2시. 이륙한 지 한 시간만에 기내식이 나왔다. 비빔밥, 따끈한 모닝(?!) 빵, 통통한 새우가 들어있는 샐러드, 레몬 케이크, 김치, 비스킷, 벨큐브 치즈. 버섯, 호박, 당근, 도라지, 오이, 고사리, 콩나물이 들어간 비빔밥. 국내 항공사보다 더 맛있다. 고추장과 참기름은 여행을 위해 아껴두느라 넣지도 않았는데도 환상적이었다.
이미 달아난 잠, 뭐라도 더 읽어볼까 했지만 조명을 다 꺼서 어둡다. 옆사람이 <매드맥스>를 봐서 곁눈질로 따라 보다가, <인사이드 아웃>을 틀었다. <매드맥스>를 보고 싶었지만 너무 시끄러운 장면이 많아서 올 잠도 달아날까봐.
<인사이드 아웃>을 다시 보니 새로운 부분이 보인다. 개봉 당시 영화관에서 봤을 땐 그저 사람의 감정을 주체로 삼아서 이야기를 풀어나간 점이 흥미로웠다. 두 번째 보고 나서야 감정 컨트롤 타워의 대장들이 눈에 띈다.
주인공 11살 소녀 라일리의 뇌 속에선 Joy가 대장이다.
그녀의 엄마 뇌 속에는 Sadness가 가운데에 앉아있다.
그리고 아빠 뇌 속에선 Anger다!
어른이 되면 대장 역할을 하는 감정이 바뀌는 것일까? 왜 하필 슬픔이와 버럭이일까? 슬프다. 엄마 감정의 대장이 슬픔이라니. 아내이자 엄마이자 주부로서 여자의 역할,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슬픔의 감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한가 보다.
아빠의 다섯 감정은 모두 남자, 엄마의 다섯 감정은 모두 여자로 표현돼 있다. 반면 라일리의 경우는 기쁨이 슬픔이 까칠이는 여자, 버럭이와 소심이는 남자다. 성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기, 미성숙한 시기라고 보아서일까.
착륙 한 시간 반 전쯤, KLM 두 번째 기내식이 나왔다. 역시 만족스럽다. 소시지, 스크램블 에그, 해쉬 포테이토, 구운 호박과 파프리카와 가지, 꿀 한 스푼 넣은 요거트, 모닝빵, 수박과 배와 파인애플, 그리고 밀크티.
그런데 기분 좋게 잘 먹어 놓고, 딱 체했다. 먹기 전까진 배고파서 못 견딜 지경이었는데. 착륙하기까지 30분 동안 귀 아프지, 배 아프지, 졸리지, 제대로 고생이다. 첫날 관광 일정은 다 취소할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좋아하는 영화도 보고 맛있는 기내식도 먹었지만, 다시는 밤 비행기를 타고 싶지 않다. 조용하다 못해 쓸쓸하고, 새벽에 먹은 밥은 소화가 더 안됐다. 그리고 이건 액땜이 아니라 여행 중간중간 닥친 시련의 예고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