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나는 30년의 세월을 뛰어 넘었다. 아픈 걸로.
70대의 척추라고 보시면 돼요. 심각합니다.
40대가 되자마자 의사에게 들은 말이었다. 나는 아직 내 나이 앞에 붙은 4자를 어색해하는 '내가 벌써 40대일 리 없어'였다. 이 단계는 부정의 단계다. 40대라뇨? 뭐 했다고 내가 40대야? 아저씨인 건 (어쩔 수 없이) 인정함. 한편으로는 한국식 나이 세는 법의 부조리함과 비효율성이 국익에도 결코 도움 되지 않음을 갑자기 깨닫기 시작하던 때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한테 환갑도 건너뛰고, 70대라구요? 내가… 70대?
하지만 아주 놀랍지는 않았다. 언젠가부터 TV에서 연예인들의 신체를 검사하고는 신체 나이를 측정해 주는 것이 종종 나왔다. 운동광으로 알려진 연예인 A 씨, 간 나이는 50대!, 동안 피부 배우 B 씨, 혈관 나이 역시 동안! 뭐, 그런 식으로. 나는 평생 운동과 담을 쌓고 살았다. 태어날 때부터 운동을 못했고, 학창 시절 내내 체육 점수가 제일 낮았다. 하루종일 앉아서 하는 일을 하고, 앉은 자세는 내가 생각해도 불량했고, 체중도 많이 나갔다. 배도 나오고, 허리도 구부정하고…. 결국 허리가 아파서 병원을 찾지 않았는가? 누가 봐도 신체 나이 - 여기서는 허리 나이가 되겠지 - 가 젊을 리는 없다.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했다. 측정하기 전까지는 정상이 아닌가. 연일 이어지는 회식에 술은 부어라 마셔라, 스트레스 핑계로 담배는 끊을 수 없고, 실제로 스트레스도 많고 - 그런 한국의 중년 직장인들이 자신의 건강에 불안해하면서도 '난 괜찮을 거야. 아직 젊잖아. 담배도 조금밖에 안 피우고, 비타민도 챙겨 먹고, 운동도 (아주 가아끔) 하고…' 하는 생각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뚜껑을 열기 전까지는 그냥 평범한 허리 질환자였다. 허리 아픈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긁기 전까지 꿈과 희망…까진 몰라도, 아무튼 긁지 않은 복권이었는데 괜히 긁었더니 꽝이 확정인 복권이 되어 버렸다. 나는 이제 70대의 허리 인간이 되어 버렸다.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의사의 입에서는 정신을 차리기 힘든 말이 계속 쏟아졌다. 대충 축약하면, 절망편으로는 퇴행성 척추관 협착증이라 완치는 불가능 어쩌고…가 있었고, 희망편으로는 아직 젊으니까 수술은 하지 말고 최대한 운동요법과 주사치료와 어쩌고로 치료해 보자…는 게 있었는데, 사실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의사가 70대의 척추 운운한 뒤에 이어진 말은 척추는 좋아지진 않는다, 더 나빠지지 않게만 할 수 있다는 말이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내 척추는 69세, 65세, 60세가 될 수 없고 71세가 72세가 되는 것만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심지어 주위에 꽤 흔한 디스크도 아니었다. 척추관 협착증이라는 병은 처음 들었다. 나중에 검색해 보니 꽤 있는 병인 것 같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디스크는 무거운 거 들다가 터졌다는 핑계를 댈 수 있다. 그런데 척추관 협착증은 노화, 퇴행 이런 게 차이란다. 어… 아저씨인걸 받아들이는데도 한참 걸렸는데, 그건 아저씨 화끈하게 건너뛰고 할배가 되고 싶다는 말은 아니었습니다만?
나의 순수한 충격과 공포는 전혀 위로받지 못했고, 이제 그에 걸맞은 처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아니, 돈 얘기가 시작됐다. 정말 자연스럽게. 그리고 여전히 충격에서 회복하지 못한 나는 생각해 볼 시간도 없이 거기에 이끌려갔다.
우선 병원 안에 있기는 하지만, 뭔가 다른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운동 치료실로 안내되었다. 거기서 아마 이 병원의 물리치료사 중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보이는, 그래서 실장님이라는 칭호로 불린 중년 남자가 등장했다.
이 분의 지도 하에 나는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발과 걸음걸이를 조사받았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아치가 완전히 무너져 있는 등 족형 자체가 비정상이란다. 걸음걸이도 문제가 있다고 했다.
아니, 내가 아무리 운동을 못해도 걸음걸이는 자신 있었는데요? 걸음걸이에 문제가 있을 수 있나요? 걸음 잘 걷는데?!
하지만 의사든, 물리치료사든 병원 사람들은 아무리 친절해도 의문을 속 시원하게 해결해주진 않는 법. 아무튼 그렇다고 했다. 이것을 바로잡아야 장기적으로 허리가 더 이상 나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특수 제작한 깔창을 신발에 깔아야 한다고 했다.
'실장님'이 내게 반말을 섞어가며 몇 번이나 혀를 차가며 내린 진단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니, 나도 40대인데 왜 반말이여...?' 싶지만, 일단 나는 아직도 충격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고 허리가 아파서 항의하거나, 빈정댈 기력도 없었다.
아무튼 (다른 칭호로 부르기 애매해서 '실장님'으로 부르면, 내가 마치 부하직원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 칭호를 가진) '실장님'은 내게 여기까지 툭 던진 다음에 빠른 최종 결정을 촉구했다. 그 결정의 내용은 이렇다!
깔창을 깔아라!
그리고 빠르게 퇴장하셨다. 그리고 바로 선수 교체. 아주 젊은 여성 상담 직원 분이 등장. 네, 그렇죠. 오늘의 리빙 포인트. 비루한 돈 얘기는 막냉이한테 떠넘기는 게 좋다!
결론적으로 깔창은 한 족에 70만 원!
아니, 선생님. 제가 아직 신발도 70만 원짜리를 못 신어봤는데요. 깔창 한 족에 70만 원이라뇨?
여기에서 멍한 기분이 들었다. 끝이 아니었다. 마사지와 운동 치료를 겸한 도수 치료를 해야 하는데, 이걸 20회를 한 번에 등록하시면 세트 할인(?)으로 120만 원에 해드립니다. 1회에 8만 원이에요. 그러니까 원래는 160만 원인 거죠. 할인폭이 참 높죠? 허리와 바꾸시는 거잖아요. 허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아시죠? 허리잖아요. 아직 한창 일할 나이신데.
의사의 폭탄선언에 이미 정신이 혼미해졌는데, 일단 200만 원 긁고 시작하자는 각종 처방에 나는 혼란을 느꼈다.
저기요. 저... 마음의 준비 좀... 깜빡이 좀... 선생님들? 좀 천천히 진행하면 안 될까요? 저도 좀 알아보고...
병원과 질환의 세계에는 그런 거 없다.
일단 진단받으면 끝이다. 여기서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을 뿐이었는데, 하나는 내 영역에 있어서는 안 되는 괴생명체(손님)가 들이닥치는 상황을 목도한 고양이가 쏜살같이 안방 침대 속 가장 어두운 곳에 들어가 모든 것을 외면하듯 내게 내려진 진단을 외면하는 것이다. 아냐, 그럴 리 없어, 내가 70대의 허리일리 없어, 예전에도 종종 그랬듯이 다시 나아질 거야. 위대한 자연 치유의 힘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다른 하나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은 빛이요, 진리니 그 사도들을 믿고 따르라, 전문가의 진단을 믿어 의심하지 말지니. 믿고, 긁고, 구원받으라.
나는 선택했다.
- 이 글은 운동은 제대로 해본 적도 없고(깔짝거려 본 적은 있음), 운동 신경도 없고, 운동 없이도 잘 살아(왔다고 믿어) 온 한 아저씨가 살기 위해 운동을 하지만, 운동을 하기 싫은 징징거림을 담아 계속 연재됩니다... 아, 그리고 이 글은 수영일기입니다. -